728x90

폐비 윤씨가 마침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드라마 '인수대비' 속의 이야기입니다.

 

1482년, 윤씨의 나이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성종보다 2세 연상설과 12세 연상설이 있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가 12세 연상설을 따르고 있으니 성종이 25세, 윤씨는 37세로 추정됩니다. 성종 임금은 한창 피어나는 나이였던 반면 윤씨는 서서히 시들어가는 나이였던 셈이죠. 두 사람 사이에서 1476년 태어난 원자(뒷날의 연산군)는 갓 여섯살. 당연히 어머니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정현왕후(당시의 숙의 윤씨, 뒷날 중종이 된 진성대군의 어머니)를 친 어머니로 알고 성장합니다.

 

연산군이 왕이 되면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 어쨌든 '폐비를 사사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이상 이 임무는 누군가 집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세좌라는, 임무에 충실했을 뿐인 한 공무원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만약 세자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전하라는 조직의 결정이 내려지고 그 책임이 내게 맡겨질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종 13년 임인(1482, 성화 18) 8월 16일 (임자)

이세좌에게 명해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말하기를,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하였다.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신이 기해년(己亥年)에는 의논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저 신첩(臣妾)으로서 독약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한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옛날 구익부인은 죄가 없는데도 한()나라 무제(武帝)가 그를 죽인 것은 만세(萬世)를 위하는 큰 계책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여야 합니다. 신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지 오래 됩니다만, 단지 연유(緣由)가 없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跋扈)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天下)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신은 얼굴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내관(內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하니, 조진(曹疹)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內醫)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만한 것이 없습니다.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명회의 말에,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으면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후일을 염려해서 한 것일 듯하다. 그런데 전날 임금이 권경우의 아룀으로 인하여 돌아보며 물었을 적에는, 한명회가 이에 말하기를, ‘임금이 사용하던 것이면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둘 수 없는데, 하물며 국모(國母)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무람없게 거처하는 것을 혐의(嫌疑)함이고 후일을 염려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앞뒤가 어찌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가? 대신으로서 국가를 위하는 염려가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것이 운명의 8월16일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세좌가 처음부터 이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느냐는 데에는 이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래 허종, 허침 형제가 이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는데 '지혜롭게' 그 운명을 피해 갔다는 것입니다.

 

서울 경복궁 입구에는 종침교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종침교 터'라는 비석이 서 있을 정도로 꽤 유서깊은 다리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 다리는 연산군 및 폐비 윤씨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허씨 문중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1482년, 폐비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시절 허종과 허침 형제는 조정의 중신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들 형제의 누님(혹은 고모라고도 함)인 '백세 할머니'라는 지혜로운 여성이 "오늘은 조정에 어떻게 해서든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형제가 이유를 묻자 백세 할머니는 '이미 조정에서 폐비의 일을 결정할 참인데 지금 입궐하여 폐비를 핍박하는 일에 관여하면 나중에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형제는 입궐하다가 종침교(물론 당시엔 다른 이름을 썼을 것으로 추정)에 이르러 일부러 말을 다리 아래로 몰아 떨어져 부상을 이유로 입궐하지 않았다.

 

결국 허종 형제가 없자 조정에서는 숙질간인 이극균과 이세좌를 시켜 사약을 받들고 폐비에게 가게 했다. 뒷날 갑자사화가 일어나 연산군이 이극균과 이세좌의 집안을 멸문시킬 때 허종 허침 형제는 화를 피해 사람들이 백세 할머니의 지혜를 칭찬했고, 다리에 형제의 이름을 붙여 종침교라 불렀다...

 

는 것이 이른바 '종침교'의 고사입니다. 이것이 조선 왕조 500년을 지나면서도 미담으로 남았고,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처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칭찬할 일은 아닙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벼슬에 올라 임금의 뜻이 옳지 않다 생각되면 목숨을 걸고 간하고, 그래도 소용이 없으면 벼슬을 던지고 죄를 청하는 것이 사대부의 도덕률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폐비에 반대해 처벌을 받았고(물론 그중 많은 사람들은 원자 즉위 후의 '뒷일'을 걱정해 보험에 들어 둔 것일 수도 있지만), 지난번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온 선비의 기상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종침교의 고사는 결국 일신의 안위를 위해 직무유기를 시도한 공무원의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 고사가 사실이라면(후세에 윤색된 것일 가능성도 물론 있습니다), 되려 임금의 명에 충실했던 이세좌만 고지식한 바보일 뿐이고, 잔머리를 굴리지 않은 죄로 뒷날 멸문의 화를 당한 셈입니다.

 

왠지 이 대목에서 6.25 당시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킨 죄(?)로 그해 9월 총살당한 최창식 공병감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물론 종침교의 고사는 역사에 전하는 바는 아니기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해도 실제로 두 사람이 말에서 굴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허침은 이미 형 허종과 함께 덕이 높은 선비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성종이 세자의 스승으로 삼은 인물입니다. 폐비에 반대한 인물이라 세자의 스승이 되었건, 세자의 스승이라는 의리 때문에 폐비에 반대했건, 아무튼 태도의 일관성을 보인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런 일관된 입장 때문인지 갑자사화 때에는 당시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찬성한 사람들을 벌 주라고 앞장서서 외치는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실록의 기록입니다.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45 (을축)

유순·허침 등이 폐비의 일을 상고하여 아뢰다

 

 유순(柳洵)·허침(許琛)·이집(李諿)·김수동(金壽童),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아뢰기를,

회릉(懷陵)이 폐위당할 때, 언문 글 쓴 자는 나인(內人)이기 때문에 상고할 수 없으며, 《실록》이 오르지 않은 것은 상고할 근거가 없습니다. 나인으로서 그 일에 간섭한 자는 권 숙의(權淑儀)·엄 숙의(嚴淑儀)·정 숙원(鄭淑媛)이며, 일을 의논한 사람은 전에 벌써 상고하여 아뢰고 빠진 자는 없습니다. 다만 언문을 가지고 온 자는 노공필(盧公弼)·성준(成俊)이었습니다.”

 

회릉이란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모신 능의 이름으로, 폐비 윤씨를 능호로 부른 것입니다. 즉 '폐비 윤씨'라는 뜻이죠. 언문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당시 삼전이라 불렸던 세 대비(세조비, 덕종비, 예종비를 말함)가 폐위와 사사의 당위성을 말한 언문 편지를 전달한 것을 말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준과 공필의 죄는 윤필상(尹弼商)과 벌이 같을 것이다.”

하였다. 순 등이 아뢰기를,

필상은 그 일에 참여하여 의논하였으니, 준과 공필은 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회릉이 폐위되어 사삿집에 거처할 때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그것이 불가함을 간했습니다. 그리고 성종께서 의논하여 그 죄를 다스리고자, 공필을 명하여 가서 삼전(三殿)께 아뢰게 하니, 삼전께서 언문 편지를 붙여서 성종(成宗)께 아뢰게 하였으며, 준은 대사를 다 정한 후에 명을 받들어 삼전께 고하니, 삼전께서 언문 편지를 준에게 주어 아뢰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다만 삼전 및 성종의 명으로 왕복하며 회계(回啓)했을 뿐이요 건의한 일이 없으니, 그 죄는 필상과 차이가 있습니다.”

 

채수가 폐비가 곤궁하고 살고 있으니 양식과 옷을 대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죽을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는 전에 한 바와 같습니다. 나머지는 윗글에 대한 보충.

 

하니, 전교하기를,

그 죄가, 필상과 함께 벌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역시 경하게 논할 수 없는 일이니, 그들의 죄를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순 등이 아뢰기를,

준과 공필은 직첩(職牒)을 거두고, 외방에 부처(付處)하며, 그 아들도 함께 직첩을 거두소서. 또 공필은 전에 벌써 외방에 부처하였으니 먼 고을로 옮겨 정배하소서.” (이하 생략)

 

이처럼 허침은 그저 '지혜롭게 난을 피한' 수준이 아니라, 갑자사화 때 가해자 측에서 폐비를 찬성하거나 방조한 대신들을 죄 주는데 주된 역할을 합니다. 그리 아름다운 행동은 아닙니다.

 

반면 이세좌는 역시 숙질간인 이극돈과 함께 연산군 즉위 후, 무오사화의 주역으로 역사에 나쁜 이름을 남깁니다. 뒷날 갑자사화 때 이세좌가 임인년의 일(폐비 사사)을 이유로 죽음을 당한 것은 억울하다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날의 평가가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은 이른바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과오를 후세의 사림들이 잊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허종, 허침 형제가 '지혜롭고 곧은 인물'로, 이세좌가 '운 없는 인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단지 그때 한 순간의 대처가 어땠느냐만으로 가려진 것은 아니고 그 사람들의 평생 삶이 두고 두고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받은 결과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허종과 허침 형제가 평생 청백리로 이름을 남겼다는 것도 가산점을 받은 요인이겠죠.

 

물론, 아무래 그래도, '종침교에서 굴렀다'는 이야기가 마치 '좋은 처세'의 본보기처럼 전해지는 것은 역시 문제 있는 시각이라는 생각입니다. 사극의 진짜 교훈은 드라마 밖에서 찾아야 한다고나 할까요.

 

 

 

P.S.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된 뒤 연산군의 보복은 참으로 집요하고도 광기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은 어머니를 몰아낸 주역으로 윤필상을 꼽아 처단했으면서도, 윤필상의 집안(파평 윤씨)이며 어머니를 '밀어내고'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에 대해서는 아무 보복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기까지 했죠.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이건 혹시 연산군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일까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