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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페라를 가끔 봅니다만, 거기에 대해 포스팅하는 건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 네가 언제부터 오페라 타령이냐고 면박을 당할 걱정도 좀 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는 철저한 무관심을,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는 지식 부족에 대한 지적이나 받을 거라는 두려움도 앞섭니다.

 

하지만 2012년 8월24일의 위대한 공연에 대해서는 뭔가 개인적으로라도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는 정명훈 지휘, 서울 시향의 연주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국내 초연이 이뤄졌습니다. 오페라하우스가 아니라 음악당인 이유는 무대 진행이 없는 스탠딩 콘서트 형식의 공연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국내 초연이라니... 바그너 오페라 공연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실 국내에서 바그너 오페라의 공연이 이뤄진 사례 자체가 대단히 드물더군요. 저도 언젠가 '탄호이저'를 공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게 자그마치 1979년이더군요. 그 뒤로는 2005년 일본 오페라단 초청 공연, 그리고 2009년의 바그너협회 공연 정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008575)

 

 

 

 

물론 바그너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무대 장식이나 대형 합창단 등 '규모'가 크게 필요 없는 작품입니다. 오히려 무대가 거의 필요없어 이런 형식의 콘서트 퍼포먼스에 적절한 작품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도 힘든 것은 일단 공연 시간의 문제가 크다는게 현실이라고 합니다. 대개의 오페라가 4시간을 넘나드는 만큼 연주가 어렵고, 그 어려운 공연을 소화해 낼만한 바그너 전문 성악가(한 관계자에 따르면 '소처럼 노래하는 성악가'^)가 드물다는게 문젭니다. 물론 국내에 없다는 거지 한국이 낳은 위대한 베이스 연광철 같은 바그너 전문 가수들은 본고장에서 활약하고 있기도 합니다.

 

일단 공연 개요부터 정리.

 

트리스탄과 이졸데

 

지휘 정명훈

연주 서울 시향

출연

테너 (트리스탄) : 존 맥 매스터 _ John Mac Master, tenor (Tristan)

 

 


소프라노 (이졸데) : 이름가르트 필스마이어 _ Irmgard Vilsmaier, soprano (Isolde)

 



메조소프라노 (브랑게네) : 예카테리나 구바노바 _ Ekaterina Gubanova, (Brangane)

 


 
바리톤 (쿠르베날) : 크리스토퍼 몰트먼 Christopher Maltman, baritone
베이스 (마르케 왕) : 미하일 페트렌코 _ Mikhail Petrenko, bass (Konig Marke)
테너(젊은 선원, 목동) : 진성원 _ Sung Won Jin, tenor (Ein junger Seemann, Ein Hirt)
테너(멜로트) : 박의준 _ Eui Joon Park, tenor (Melot)
베이스(조타수) : 김장현 _ Jang Hyun Kim, bass (Ein Steuermann)

합창 : 국립합창단 _ The National Chorus of Korea
합창 : 안양시립합창단 _ Anyang Civic Chorale
연주 : 서울시립교향악단 _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공연의 우수함을 제가 감히 평할 수는 없겠지만, 전막 내내 지루한 줄 모르고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바그너 오페라는 '마이너 공연'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날 공연은 이미 두어달 전에 매진이었습니다. 저도 공연 약 5일 전, 예매 취소된 표를 운 좋게 사서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자발적 관객'은 역시 '공짜표 관객'과는 엄청난 차이였습니다. 일단 국내 어지간한 오페라 공연과 기침소리의 양에서 비교가 안 될만큼 정숙성이 뛰어났습니다. (제발 기침 참기 힘든 분들, 지루한 공연 보고 있으면 목이 간질간질해서 미칠 것 같은 분들, 굳이 예술의전당까지 와서 기침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비싼 공짜 표도 있는데 오페라 한번 보러 갈까' 하시는 분들, 괜히 가래 돋는 공연 보면서 기침 하지 마시고 차라리 그냥 버리세요. 어차피 1막 끝나고 다 가실 거잖습니까.) 아무튼 지금껏 본 어느 오페라 공연과 비교해도 만족도 면에서 뛰어난 공연이었습니다.

 

(괜히 또 흥분... 저도 뭐 사실 가끔 졸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유명한 유럽 중세의 전설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대략 이렇습니다.

 

1막

아일랜드에서 콘월로 건너가는 배 위. 트리스탄이 숙부인 웨일즈와 잉글랜드의 왕 마르케의 신부감인 이졸데를 호위하고 가는 여정입니다. 아일랜드는 마르케 왕의 군대에 패했고 강화를 위해 공주인 이졸데를 왕비로 내놓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배 위에서 이졸데는 트리스탄을 미워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이졸데의 약혼자였던 아일랜드 기사 모롤드가 마크 왕을 선제공격했지만 실패하고, 모롤드는 목이 잘려 돌아옵니다.

얼마 뒤 아일랜드 해안에서 이졸데는 표류된 사람을 발견합니다. 이졸데는 비전의 의술로 그를 살려내는데, 본인은 가명을 대지만 이졸데는 그가 자신의 약혼자를 죽인 기사 트리스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보고 차마 죽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트리스탄은 건강을 회복하고 아일랜드를 떠나지만 얼마 뒤 마르케 왕의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와 이졸데를 왕의 신부감으로 데려간다고 말합니다.

배 위에서도 트리스탄은 이졸데와 눈길을 마주치는 것조차 거부하고, 이졸데는 트리스탄을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라고 부르며 행동에 대해 사과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리고 시녀 브랑게네를 시켜 가전의 비약 중 죽음의 약을 가져오게 합니다. 적국의 왕비가 되는 치욕을 감내할 수 없으니 원수 트리스탄과 함께 죽겠다는 거죠.

하지만 브랑게네는 주인을 살리기 위해 약을 사랑의 미약으로 바꿔놓고,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죽는 대신 불같은 사랑에 빠져 버립니다.

 

2막

콘월의 성에서 마르케 왕의 왕비가 된 이졸데와 트리스탄은 밤을 틈타 밀애를 이어갑니다. 브랑게네는 트리스탄의 친구 멜로트가 눈치챈듯 하니 조심하라고 하지만 사랑에 눈먼 이졸데에겐 조심성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 왕이 사냥을 떠난 사이 밤이 새도록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밀회를 즐깁니다. 이들에겐 밤이 해방이요, 낮은 죽음입니다. 패륜을 저지르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과 죽음은 이들에겐 하나입니다.

 

So sturben wir, um ungetrennt. 우리 죽어요, 떨어지지 말고

ewig einig ohne End' 끝없이 영원한 하나로

 

하지만 날이 새자 마르케 왕과 멜로트가 들이닥칩니다. 마르케 왕은 '네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믿을수 없는 미녀를 데려오더니 이게 무슨 배신이냐'라며 참혹한 배신감을 토로합니다.

변명할 수 없는 트리스탄은 이졸데에게 같이 죽겠느냐고 묻고, 이졸데는 호응하는 가운데 이들을 용서할 수 없는 멜로트가 공격해 옵니다. 트리스탄은 싸움에 응하는 대신 멜로트의 칼에 몸을 던져 치명상을 입고 쓰러집니다.

 

3막

브르타뉴에 있는 트리스탄의 성. 충실한 시종 쿠르베날에 의해 브르타뉴로 옮겨진 트리스탄은 의식을 찾지 못하는 중태였지만 이졸데가 오고 있다는 말에 다시 한번 연인의 얼굴을 보려는 일념으로 몸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졸데와 마주하는 순간, 숨이 끊어지고 맙니다.

절망하는 이졸데. 이어 마르케 왕과 멜로트, 브랑게네가 다른 배로 따라와 상륙합니다. 쿠르베날은 이들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잡으러 온 것으로 생각하고 공격해 멜로트를 죽이고 자신 또한 살해당합니다. 하지만 마르케 왕은 이들을 용서하고 두 사람을 맺어 주기 위해 온 것이었죠.

결국 비탄에 빠진 이졸데는 유명한 사랑의 죽음(liebestod)를 부르고 쓰러져 죽어갑니다.

 

이 아리아가 결국 한편의 오페라를 압축한 느낌을 줍니다. 트리스탄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이름조차도 어원은 '슬픔'이라는군요), 어둠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다가 연애마저도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이졸데와 비극적인 사랑을 하다가 이승에서는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을 저승으로 미뤄 버립니다. 이 정서가 총정리된 것이 바로 이 아리아입니다.

 

이 오페라가 초연될 무렵(1859년)에는 이 노래를 가리켜 '로렐라이의 노래와 가장 유사한 노래'라는 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공의 넋을 빼어 배를 침몰시켰다는 로렐라이의 요정이 부른 노래가 아마도 이런 느낌이었을 거란 얘기죠. 그럴싸하게 이승의 노래가 아닌 듯, 노래는 몽환적이고 관능적입니다.

 

전설적인 바그너 가수 비르기트 닐손의 노래입니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이졸데 전문가 발트라우트 마이어의 버전.

 

 

마이어가 부른 이 노래의 버전만 해도 10여개 검색될 정도.

 

제가 갖고 있는 DVD도 마이어의 1995년 바이로이트 판입니다.

 

 

 

르네 콜로와 기네스 존스가 부른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의 듀엣입니다. 이 오페라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리베스토드'의 멜로디가 그대로 재현됩니다. 사실상 같은 노래인 셈입니다.

 

중세 전설의 트리스탄 이야기는 다양한 버전으로 확장됩니다. 서로 뒤섞이는 전설의 속성에 따라 어떤 버전에서는 트리스탄이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가운데 한 멤버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영화 '킹 아서'에도 트리스탄이 나옵니다. 이 영화에는 랜슬로트도 같이 나오는게 좀 어색합니다.

 

랜슬롯과 트리스탄이 공존하기 힘든 것은, 아서 왕의 이야기에서는 본래 랜슬롯이 트리스탄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친구이자 군주인 아서를 배신하고 왕비 기네비어와 불륜을 맺는 주역 말입니다.

 

그래서 아서 왕 이야기를 다룬 최고의 영화 '엑스칼리버'에서는 랜슬롯과 기네비어의 밀회 장면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을 사용합니다. 관능적인 느낌이 일품입니다.

 

 

 

뭐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바그너 음악을 많이 차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트로에서부터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지그프리트의 장례' 음악을 쓰고 있죠. 이 음악은 마지막 장면, 아서 왕의 죽음 때에도 되풀이됩니다.

 

이 영화를 통해 가장 널리 알려진 음악은 그 당시까지 마이너 음악이었던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브라나' 지만, 아서 왕 전설과 성배, 그리고 이 영화 속 퍼시벌이 바로 바그너 악극 '파르지팔'의 주인공이라는 점 등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 속의 바그너 사용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랜슬롯-기네비어 이야기와 트리스탄-이졸데 이야기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약물'의 존재입니다. 격정을 이기지 못한 랜/기 커플과는 달리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약물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약물의 존재는, 마지막에 마르케 왕이 두 사람을 용서하는 이유(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면 뭔가 멜로드라마의 요소가 약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두 사람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애절함도 훨씬 덜하죠. 물론 해석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스토리로 보면 이졸데가 트리스탄에게 그토록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처음에 그를 치료하고 살려 보낸 것이 이미 감정의 동요 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트리스탄이 배 위에서 한사코 이졸데와 대면하기를 거부하는 것, 또 본능적으로 이졸데가 건네는 약이 독약이라고 느끼면서도 복용을 거부하지 않는 것은 - 트리스탄이 기회만 있으면 죽고 싶어 안달인 염세적인 인물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 이졸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현실에선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즉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미 끌리고 있었고, 약물의 역할은 도덕률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의 본능을 일시에 폭발시킨 정도...라고 보는 것으 적절한 해석일 듯 합니다. 그리고 마르케 왕이 굳이 미약의 핑계를 댄 것은 사랑하는 조카의 사랑을 용서해 주기 위한 언턱거리 정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결론은 하나. 하루 빨리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포함해 국내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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