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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을 극장에서 보기를 무척이나 기다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클로드 미셸 숀버그의 [레미제라블]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입니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무대에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원작의 스펙터클은 어떻게 구현됐을까, 일단 이름값으로는 최강인 스타들이 어떤 식으로 노래를 소화할까. 당연히 궁금했죠.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얘기는 톰 후퍼 감독의 고민과 노력에 대한 칭찬입니다. 이번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나면, 왜 여태까지 이 뮤지컬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 원작 소설 '레미제라블'은 최근 5권으로 완역본이 나왔을 정도의 대작입니다. 이미 수차례 영화화됐지만 만만찮은 규모의 물량이 투입되어야 하는 대작이죠. 이런 규모의 작품과 무대용 뮤지컬을 조화시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시카고'나 '아가씨와 건달들'과는 다른 작품이라는 얘기죠.

 

물론 '그래서 그 결과물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걸작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좀 망설이게 됩니다만. 

 

 

 

 

'레미제라블'을 모르는 분은 없겠지만 - 오래 전 이 뮤지컬에 대해 처음 글을 썼을 때도 했던 얘기지만 - 우리나라의 많은 분들은 '레미제라블'이 그냥 "미리엘 주교가 전과자 장발장에게 '자네 왜 은식기만 가져가고 은촛대는 놓고 갔나'라고 말해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드는 이야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19세기 초, 한마디로 격동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던 하층민들의 세계를 진지하게 그려보려 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결국 이 작품의 클라이막스는 1832년 6월 파리 슬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봉기로 이어집니다. 물론 민중의 힘에 기반한 혁명이 아니고 일부 학생들의 봉기였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죠.

 

 

 

 

뮤지컬에서도 수많은 명곡들이 있지만 스토리의 진행상 가장 중요한 노래는 학생들이 봉기를 결의하고 부르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과 봉기 전날 밤, 등장인물 전원이 다음날 아침 각자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까를 놓고 부르는 'One Day More'입니다. 각자 흩어져 자기의 삶을 살던 인물들이 이 봉기를 통해 같은 시공간에 모이고,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되죠.

 

(그 결과도 대단히 현실적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도 이 봉기의 핵심 지도자인 앙졸라는 실패와 함께 이슬로 사라지지만 본래 명문가의 후손인 마리우스는 장발장에 의해 구조되어 본가로 돌아가 코제트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게 되죠. 여담이지만 80년대 운동권 학생들 중에서도 비슷한 궤적을 걸은 분들이 적지 않다는...)

 

 

 

 

아무튼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 위해 톰 후퍼 감독은 깊은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 결과 내린 결정은 '아무래도 영화라는 장르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노래를 희생시키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대 뮤지컬에 익숙한 분들이 팡틴 역의 앤 해서웨이가 부르는 'I Dreamed a Dream'이나 에포닌 역의 사만사 바크스가 부른 'On my own'을 들으면 뭔가 아쉽고 싱겁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자베르 역의 러셀 크로가 부른 'Stars'는 더 말할 것도 없을 정도.

 

많은 분들이 '아무래도 영화배우들이 전문 뮤지컬 배우들보다 노래를 못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합니다. 게다가 무대 뮤지컬에서 당연히 사용하는 전용 극장의 울림(심지어 노래방 마이크도 에코 빼고 들으면 이상하죠^^)이 사라진 노래들이라 더욱 박력 없게 들리기도 합니다. 사만사 바크스는 레미 25주년 기념 공연에도 출연한 정통 뮤지컬 배우 출신이지만 이 영화에선 완전히 힘을 빼고 부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영화 전편을 볼 때 톰 후퍼 감독은 이 작품을 제대로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무대 뮤지컬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판단은 영화 전반부까지는 매우 성공적입니다. 앤 해서웨이가 부르는 'I Dreamed a dream'은 무대 뮤지컬과는 기능이 다릅니다. 무대에선 이 노래가 공연 시작 후 40분 가량이 경과된 상황에서 관객들을 강하게 움켜쥐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관객을 압도하는 파워가 필요합니다.

 

(아래 예고편에서 그 노래의 하이라이트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 노래만 따로 들었을 때에는 '고작...?'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영화 속에서 들으면 확 달라집니다.)

 

 

 

무대 뮤지컬과는 달리 톰 후퍼의 영화에서 이 노래는 배우의 가창력이 아니라, 영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 주는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또 무대판에서 이 노래의 시점은 팡틴이 창녀가 되기 전이지만, 영화에서는 창녀가 된 뒤에 신세한탄을 하는 시점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감독은 그 상황에서 무대의 배우들이 부르듯 절규하는 팡틴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어색하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 

 

의도야 어떻든 해서웨이의 가창은 매우 성공적입니다. 이 노래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대표하는 트랙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독의 선택은 뒤로 가면서 조금씩 문제를 드러냅니다. 중간 휴식도 없이, 모든 대사가 노래로 처리되는 영화를 계속 본다는 것은 일반 관객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대라면 관객들도 박수를 쳐야 할 노래와 쉬어 갈 노래 사이에서 나름 체력관리(?)를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생동감이 떨어지는 영화 관객들은 90분쯤 지나면 눈에 띄게 지쳐갑니다. (제 옆자리의 중년 남성 관객은 어찌나 한숨을 크게 쉬던지...)

 

무대든 극장이든 가장 힘을 줘야 할 부분인 바리케이트에서의 대치 장면도 그리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래도 극장용 영화에서 뭔가 민중 봉기를 그려내려면, 관객들이 기대하는 최소한의 스펙터클이 있기 마련인데, 그렇게 배경을 펼쳐 놓으면 톰 후퍼 감독이 기대하는 '배우들이 현장에서 노래하며 연기하는' 뮤지컬로 그려내기가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결국 극장용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바리케이트 장면은 골목 하나를 배경으로 한 초 미니 사이즈로 표현됩니다.

 

 

(위 사진의 거대한 바리케이트는 엔딩 신에만 잠깐 등장할 뿐입니다. 오해 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레미제라블'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일단은 워낙 음악적으로 완성도 높은 원작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다음엔 정상급 배우들의 열기 넘치는 호연 때문이죠. 톰 후퍼 감독은 노래 하나 하나에 클라이막스를 두기 보다는 캐릭터를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데 역점을 뒀고, 배우들은 그 연출에 맞춰 최고의 기량을 뽐냈습니다.

 

주요 배우별로 얘기하자면 최고의 캐스팅은 아무래도 앤 해서웨이입니다. 노래로 전설적인 브로드웨이 스타들과 경쟁하는 대신 팡틴의 캐릭터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영화 전체를 견인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할만 합니다.

 

 

 

 

휴 잭맨도 노래와 캐릭터 모두 AA급으로 매길만 합니다(사실 장발장 역은 노래에 큰 비중이 있는 역할은 아니죠^^). 반면 러셀 크로. 연기야 흠잡을 데가 없지만 노래는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습니다. 기본은 해 줬어야 하는데 말이죠.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좀 아깝습니다. 코제트 역 같은 단역을 이런 배우에게 맡기는 건 누가 뭐래도 낭비죠.

 

 

 

 

결론적으로 '레미제라블'을 보고 나서, 뮤지컬의 영화화가 성공적이려면 노래/춤의 비율이 최소한 6:4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카고'나 '그리스'같은 작품이죠. '레미제라블' 처럼 노래와 춤의 비율이 9:1 이고 처리해야 할 드라마의 볼륨이 큰 작품을 '뮤지컬 영화'로 만들기 위해선 타협이 불가피합니다. 어떻게 해도 입체감이 희생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감독이 숭숭 생략하고 넘어가는 무대 뮤지컬과는 달리 원작의 스토리를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의지까지 갖고 있다면 더욱 더 힘든 작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톰 후퍼의 '레미제라블'은 최고라고 하기엔 좀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최선의 영화화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 만들었어도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영화화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이보다 더 잘 만들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서를 달자면,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아무래도 무대 공연을 봐야 할 것 같군요.

 

 

 

P.S. 사실 콤 윌킨슨의 출연은 전혀 모르고 영화를 봤기 때문에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윌킨슨이 출연해 줘야 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 역이라니.^^

 

오리지널 웨스트엔드의 장발장으로 유명한 윌킨슨이지만 아무래도 그에게 가장 어울렸던 역할은 '맨 오브 라만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국내건 국외건, 누구도 그가 불렀던 'The Impossible Dream'을 능가하지는 못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안 들어주면 또 서운하겠죠.^^)

 

 

 

P.S. 가장 감독에게 불만이 컸을 것 같은 배우는 앙졸라 역의 아론 트베잇. 훌륭한 목소리와 외모를 보여줬지만, 앙졸라 역의 핵심인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앞부분 독창을 없애 버렸으니, 발코니 신이 없는 로미오가 된 셈이죠.

 

앙졸라 뿐만 아니라 이 노래의 배경을 야외로 끌고 나오자는 발상은 오랜 고민의 결과인 듯 하지만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카페를 배경으로 했을 때 훨씬 효과적이었을 거라는 생각. 뭐 이 장면도 영화로 이 작품을 처음 접한 분들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그런 분들에겐 반드시 무대 공연의 박력을 느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대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대한 글:   http://fivecard.joins.com/130

현재 국내에서 투어 중인 '레미제라블'에 대한 글:   http://fivecard.joins.com/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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