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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를 보면서 '무간도'와 '대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 합니다. 이 두 영화 이후에 나온 갱 영화나 언더커버 캅에 대한 영화가 두 영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평을 듣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신세계'가 이 두 영화에 대해 지고 있는 빚은 흔히 말하는 '영향'을 넘어 서 있습니다. 이른바 오마주의 세계라고 할까요.

 

사실 개인적으로 '신세계'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무간도'가 아니라 '무간도2'입니다. 전편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지는 영화지만, 개인적으로는 '무간도'를 훨씬 능가하는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수백편(수천편?) 쯤 만들어졌을, '대부 오마주' 영화들 가운데서도 손꼽을만한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안 보신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신세계'는 굳이 말하자면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룬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의 '대부 오마주' 영화 가운데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을 꼽자면 아마도 '신세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른바 '풍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 되겠죠.

 

 

 

 

국내 최대 폭력조직이며 합법적인 기업으로 진화한 골드문파의 보스 석회장(이경영)은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 판정을 받고 풀려난 직후 의문의 사고로 사망합니다. 후계자가 필요해진 상황. 연합 조직인 골드문파의 특성상 최대 계파인 재범파의 보스 중구(박성웅)와 여수 화교 중심의 파벌인 북대문파의 정청(황정민)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릅니다.

 

이런 상황은 본래 경찰이지만 비밀리에 조직에 잠입한 자성(이정재)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8년 노력한 끝에 정청의 오른팔이 된 자성은 자신을 투입한 강과장(최민식)에게 그만 풀어 줄 것을 요구하지만, 강과장은 자성에서 새로운 역할을 요구합니다. 소위 '신세계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죠.

 

 

 

일각에서 흐름이 좀 느리다는 평이 있었지만 2시간14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일단 세 남자의 대립이 촘촘하게 짜여 있고, 세 주인공의 조합은 예상대로 매우 훌륭합니다. 셋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아무래도 황정민이겠죠.

 

'달콤한 인생'에서 건달 중의 상건달 - 흔히 말하는 '양아치'에 가까운 - 역할로 연기력을 과시했던 황정민은 그와 비슷하지만 좀 더 복잡한 인물 정청 역을 맡아 신기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이 정말 본능만 있는 벌레같은 인간이라면, '신세계'의 정청은 동네 아저씨같은 인간미와 하이에나같은 악착스러움에다 뱀 같은 냉정함까지, 한 작품 안에서 이런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주연을 세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만만찮은 비중을 자랑한 박성웅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중구가 지나치게 냉정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 그런 냉정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미친개가 되는, 좀 더 감정의 진폭이 큰 인물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 합니다.

 

사실 '신세계'는 전형적인 영화이긴 합니다만, 배우들이 연기하기는 또 쉽지 않은 영화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판타지 느와르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한국 경찰과 조폭의 관계에서 이런 식의 언더커버는 불가능합니다. 어느 경찰이 8년씩 조폭 밑에 들어가서 발각되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일할 수 있으며, 수시로 인사조치가 있는 한국 조직의 특성상 어떤 중간 간부가 -이를테면 강과장이- 8년씩 그런 장기 프로젝트를 보안 위험을 감수해 가며 추진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선 불가능한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이나 미국 같이 넓은 나라에서는 혹시 또 가능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처럼 한 다리 건너면 서로 다 알고, 출신 지역이나 학력만 추적해 봐도 어느 집 누가 뭘 하는지 다 드러나는 나라에서 과연 이런 식의 철저한 은폐가 가능할까요. 더구나 경찰/검찰과 조폭의 인맥이 이렇게 촘촘하게 엮여 있는 나라에서 말이죠.^^ - 물론 '신세계' 같은 영화를 볼 때에는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어쨌든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영화니까 말입니다.

 

다만 '무간도'나 '디파티드' 같은 영화들은 가능한 한 그 현실과의 괴리를 관객이 납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를 이용해 개연성을 보강하고 있는 반면, '신세계'는 그런 부분에서 덜 치밀합니다. 예를 들어 송지효가 연기하는 바둑 선생 같은 캐릭터는 오히려 이 영화의 판타지적인 면을 더 강조해 버리는 면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야쿠자 영화를 의식한 듯한 두 차례의 장례식 장면도 비슷한 효과를 냅니다.

 

 

 

 

물론 많은 관객들은 무협영화나 '스타 워즈'를 보듯, 이 '언더커버 판타지'를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신세계'를 볼 겁니다. 그리고 이 장르에 애정을 갖고 있는 관객이라면 '신세계'는 많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관객 상당수가 '무간도'나 '도니 브래스코'류의 영화에 노출되어 있었을 거라고 전제하면, 자성이 당연히 겪어야 할 정체성의 혼란 같은 장면은 과감하게 제거하는게 당연했을 겁니다. '우리 외국 나가서 살까?' 정도의 대사로 쉽게 넘어가도 무방합니다.

 

다만 영화 전반적으로 유머감각이 다소 어정쩡한 위치에 머물러 있는 건 좀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연변 거지 개그는 무거운 흐름을 풀어 주는데 꽤 역할을 합니다만, 오히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한우 개그 같은 것은 들어 냈어도 되지 않을까요?)

 

 

 

 

결론적으로 '신세계'는 그동안 '대부'의 영향권에서 다소 먼, 비교적 독자적인 길을 걸어 온 한국 느와르가, 전 세계적인 '정통'에 다가선 물건을 내놨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아주 매끄럽고 정교하지는 않지만, 묵직한 풍미를 자랑하는 관객에게는 좋은 선물입니다. 특히 여성 관객들도 즐길 수 있는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다는 장점이 있죠. 전체 영화보다는 배우들의 호연이 더 잘 부각되지만, 휴일을 즐기는 데 후회 없는 선택일 듯 합니다. 추천.

 

 

 

 

P.S.1. 언더커버 캅이 자기 패거리에 대해 느끼는 죄책감이란 소재에 관심 있는 분들이 꼭 보셔야 할 영화는 '도니 브래스코'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논픽션에서, 마약 조직에 투입돼 상당 기간 동안 조직원 행세를 했던 주인공은 이런 후일담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조직이 일망타진되고 작전이 마무리됐을 때, 법정에서 만난 한 조직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이봐. 내가 잡혔을 때 경찰은 내게 전화를 딱 한 통 걸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어. 나는 그 전화를 변호사도 아니고, 두목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너에게 걸었지. 도망치라고. 그런데 네가 경찰이었다니.' "

 

이런 말을 듣고도 동요가 없다면 그건 정말 냉혈한이겠죠.

 

 

 

 

P.S.2. 몇가지 질문에 대해서 박훈정 감독은 고의로 대답을 마련해 놓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이건 속편 제작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면 석회장을 죽인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강과장이 언급하는 '언더커버에서 끈을 끊어 버리고 진짜 조폭이 된 전직 경찰'은 누구일까 하는 것 등입니다.

 

많은 분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예견하듯,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그 내용은 '신세계'의 프리퀄, 그러니까 이 주인공들의 과거 사연 이야기가 될 전망입니다. 이미 '신세계'의 흥행 성공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는 만큼 배우들만 동의하면 우리는 그 궁금증을 속편에서 해소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 그 답이 정 궁금한 분들은 주위 사람들을 설득해서 '신세계'의 흥행 스코어를 좀 더 올려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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