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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Z]

 

영화 '월드워Z'는 아시다시피 맥스 브룩스의 유명 원작 '세계대전Z(World War Z)'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될 무렵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마징가Z'를 먼저 연상하는 바람에 진지한 대접을 받지 못한 요소도 있지만, 사실 '좀비 문학'이라는 것이 새로운 장르로 인정받는 데에는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좀비물은 책 보다는 영화에서 먼저 장르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굳혔습니다. 그 유명한 조지 로메로 감독의 70년대 좀비물은 제작자와 관객 모두를 환호하게 만든 새로운 시장의 개적을 알렸죠. 이후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한 좀비물은 마침내 소설 '세계대전Z'로 하나의 기념비를 남겼고, 영화 '월드워Z' 역시 좀비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만 합니다. (물론 칭찬입니다.)

 

그런데, 물론 재미있게 잘 봤지만, '월드워Z'는 참 예상과는 다른 영화였습니다.

 

 

 

 

먼저 줄거리. 전 UN 조사관이었다가 은퇴한 뒤 가족과 함께 조용히 살던 제리 레인(브래드 피트)는 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에 나갔다가 갑작스런 좀비의 습격으로 도시가 생지옥이 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곧이어 미국 전역, 아울러 세계 전체가 좀비의 공격으로 인류 문명이 말살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리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UN 당시의 상관으로부터 헬리콥터를 보내주겠다는 연락이 옵니다. 간신히 탈출해 UN 소속 함대에 합류한 제리에게 "다시 현역에 복귀하는 조건으로 가족을 보호해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제리는 UN의 비밀 조사단을 인솔하고 좀비 바이러스가 최초로 보고된 한국 평택(Camp Humphreys)으로 향합니다.

 

 

 

 

영화 '월드워Z'는 공개되기 전, 예고편 단계에서부터 소설 팬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습니다. 원작의 설정과 매우 다른 장면들이 속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사실 원작은 전통적인 소설의 작법이 아닌, '좀비와 인간의 세계대전'을 가상 설정으로 두고 거기에 참가했던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작품입니다. 아마도 이 원작 하나만 갖고도 이런 저런 영화를 30편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가상 논픽션'입니다. 그런데 영화 '월드워Z'는 그런 원작의 장점을 잘 살리고 있는 영화는 분명히 아닙니다.

 

맥스 브룩스의 소설 '세계대전Z'와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는 처음부터 좀비의 특성과 그 공략법, 현대 사회의 취약성 등에 대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설정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작의 완벽한 설정을 영화가 상당 부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원작 팬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를테면 소설 원작의 좀비들은 '느리고, 기본적으로 1대1에서는 인간보다 체력이 약하고, 사다리가 있어도 그걸 타고 위로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지능과 균형 잡힌 운동 능력이 0에 가까운'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영화 '월드워Z'의 좀비들은 거의 표범 수준으로 날렵하더군요.

 

'뇌를 파괴하지 않으면 그 무엇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소설과 영화가 일치하지만, 영화에서는 뇌가 아닌 다른 부위에 총을 맞아도 좀비들은 일단 동작을 멈추고, 거의 전투불능상태에 빠집니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목 윗부분만 남아도 쉴새없이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무엇이든 물어뜯으려 드는 원작 소설 속의 좀비들보다는 어찌 보면 공포감이 덜하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영화도 원작 속의 설정을 100% 재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상화를 위해선 적절한 변화를 두는 것이 훨씬 성공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영화 '월드워Z'의 경우에는 역대 어느 영화에서보다 '빠르고 전투력 강한' 좀비상을 설정하는 바람에(아무래도 '28일 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영화의 진행에 다소 무리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굳이 원작과 다른 길을 갔는지 상당 부분 아쉽습니다.

 

원작에 나오는 생생한 인간과 좀비군단의 전투, 왜 현대의 첨단 무기가 좀비 군단을 막는데 역부족이었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 단순한 전투력 뿐만 아니라 공포심과 무기의 본질에 대한 탁월한 성찰 등이 영화에 전혀 반영되지 못한 부분이 아쉬워서 이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늟어놓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이라도, 이 장르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소설 '세계대전Z'를 꼭 읽어 보시기 권합니다.

 

 

 

 

안 좋은 이야기로 시작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원작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영화만으로 판단했을 때, '월드워Z'는 훌륭한 오락 영화입니다. 특히 좀비와 액션을 앞세운 블록버스터적인 특성보다는 온 가족용 코미디로서 탁월합니다. 예를 들어 슈퍼히어로 장르라고 가정한다면, 겉으로 보기엔 '아이언맨'이나 '다크나이트'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크레더블'이나 '슈퍼배드', 혹은 '스카이 하이'에 가까운 영화였던 겁니다.

 

(전형적인 좀비 마니아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얘기지만, 잔혹한 장면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 보다도 덜 잔인합니다. 좀비 영화의 기본인 좀비의 산 사람 먹방, 사지 절단 등의 장면은 그냥 상상력으로 커버해야 할 수준입니다. 상상 이상으로 다릅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영화 '월드워Z'를 지배하는 건 다소 시니컬하고 허무주의적인 유머감각입니다. 사소한 좀비 패러디도 아니고, 대사 하나 하나마다 지적인 유머가 감춰져 있다고 할까요. 

 

피트가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고 난 뒤 아내와 나누는 전화 대화("여보. 내가 아까 전화했는데..." "응. 알아." <-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지만, 보신 분이라면 이 장면이 얼마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장면인지 아실 수 있습니다^^) 처럼 아주 노골적으로 웃기는 장면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건 냉소적인 허무개그의 정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전반부에 '인류의 희망'이라며 강조하던 패스바크 교수의 운명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죠. 그래서 영화 보는 내내 진심으로 유쾌했습니다.

 

 

 

 

아울러 이 영화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애가 철철 넘쳐 흐릅니다. 어떻게 해서든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영웅 브래드 피트의 파란만장 일대기 - 이를테면 '오딧세이' - 인 것이죠.

 

이렇게 가족영화적 요소와 코미디적 요소를 강조한 작품이다 보니 이 영화는 어마어마한 물량을 투입한 제작비 2억 달러짜리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큰 작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유명 배우라고는 브래드 피트 혼자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제작비가 2억 달러일 정도로 비주얼에 공을 들인 영화인데, 이렇게 비주얼이 인상적이지 않다는 건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나마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데이빗 모스나 매튜 폭스는 우정 출연 수준. 물론 데이빗 모스는 그 짧은 출연 시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죠^. 사실 이렇게 쓰면 영화에 대한 비판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재미있게' 할 거라면 돈은 훨씬 덜 써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얘깁니다.^^)

 

 

 

 

이건 아무래도, 비록 '퀀텀 오브 솔러스'를 만들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의 감독이 아닌 마크 포스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데 장점을 가진 그의 특기가 잘 살아난, 성공적인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영화 '월드워Z'가 이런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된 데에는 매튜 마이클 카너핸(Matthew Michael Carnahan)이라는 각본가의 공로를 빼놓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작들인 'Lions for Lambs'나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그리고 '킹덤'에서 보듯 카너핸은 저널리스트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세계관과 다소 염세적인 부분도 있지만 아무튼 현실 세계의 국제 정세를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줬던 작가입니다. (물론 완성도 높은 유머는 누구의 기여일 지 매우 궁금합니다.)

 

어쨌든 결론은 강추. 요약하면

 

1. 원작과는 너무나 딴판이다.

2. 좀비 블록버스터 액션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큰 실망.

3. 반면 가족 코미디로서는 대단한 수작. 장르 선입견 없는 사람이라면 대만족일듯.

 

개인적으론 언젠가 용자가 나서서 '월드워Z, 더 리얼 무비' 정도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주길 기대합니다. 제임스 카메론이나 잭 스나이더면 진짜 인간과 좀비의 세계대전을 실감 넘치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P.S. 원작에서 인상적이었던 인물이 영화 속에서 구현된 경우는 위르겐 바름브룬 외에는 모르겠습니다. 주인공 제리 레인이 소설에도 나오는 인물인지는 찾아 보려다 포기했습니다. 혹시 기억나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P.S.2. 이 도표를 봐도 영화 '월드워Z'의 좀비들은 역사상 '가장 날쌘 좀비들'로 보이는군요.^^ (표는 클릭하면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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