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소현세자]

 

사극 드라마나 영화, 역사 소설을 보다 보면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거나 인기가 오르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인물을 평가할 때에는 그 시대가 어떤 가치를 강조하는 시대였느냐가 큰 영향을 미치죠.

 

소현세자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소현세자에 대한 내용은 매우 짧고 섬소합니다. 그런데 그 짧은 생애를 보면 유명한 사도세자에 비해 더 큰 비극을 안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왕위를 이어받아야 할 세자의 몸에서 (아버지에 의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것까지는 같지만,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라 어느 정도 한풀이를 할 수 있었던 반면 소현세자는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참혹한 비극의 주역이 됐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대체 소현세자는 왜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드라마 '꽃들의 전쟁' 보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어땠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소현세자(1612~1645) 1

 

2010년 화제의 드라마 추노는 조선 인조 시대를 배경으로 추노꾼 대길(장혁)과 노비 태하(오지호)의 쫓고 쫓기는 대결을 그렸다. 본래 무관이었던 태하는 소현세자의 마지막 혈육인 왕손 석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피난길을 떠나고, 대길은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뒤를 쫓는다. 태하는 본래 소현세자의 측근인 무관이었으나 세자 사후 정변에 휘말려 노비로 강등됐다는 설정이다.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 추노를 보면 의문이 들었을 법 하다. 대체 소현세자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본인이 급사한 뒤 부인인 세자빈 강씨도 사약을 받고, 어린 세 아들까지 목숨을 위협받게 된 것일까. 답은 권력의 비정함에 있다.

 

 

(이 아기가 바로 당시 인기 높았던 그 석견이죠.)

 

 

병자호란이 끝난 1637, 청은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요구했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뒷날의 효종)이 수많은 포로들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가고, 청은 명을 완전히 멸망시킨 1645년에야 이들의 귀국을 허락한다 

 

하지만 돌아온 소현세자를 바라보는 궁 안팎의 시선은 싸늘했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껏 전해내려오는 야담에서 읽을 수 있다. 두 아들이 귀환하자 인조는 무엇을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소현세자는 용 모양의 벼루를 꺼내며 이것이 천하의 귀물이라는 용연석(龍硯石)으로 만든 벼루입니다. 아버님께 드리려고 천금을 들여 샀습니다라고 했다. 반면 봉림대군은 청 황제에게 간청하여 포로로 끌려간 우리 백성들을 힘 닿는대로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인조는 세자를 향해 너 따위가 무슨 세자냐고 호통을 치며 그 벼루로 머리를 내리쳤다. 세자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곧 병들어 죽었다는 전설이다.

 

실체가 있는 기록 역시 소현세자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세자가 숨을 거둔 1645 426 실록에 실린 졸기(卒記)를 보면,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는 말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학문에는 관심이 없고 무인들과 어울리는데 시간을 쏟았다. 오직 화리(貨利:사고 팔아 이익을 남김)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를 즐기고 개와 말 따위를 기르는데 열중했으므로 크게 인망을 잃었다는 내용도 있다. 한마디로 소현세자가 일찍 죽고 효종이 왕위에 오른 것이 나라를 위해 큰 다행이었다는 주장. 이것이 일제시대까지의 전통적인 해석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평가는 수정되기 시작했다.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끌려가 있을 때 독일 출신 선교사 탕약망(湯若望),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과의 친교를 통해 많은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했다는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렸다.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개혁군주가 되어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을 것이라는 아쉬움 섞인 주장이다.

 

 

 

 

사실 동시대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던 소현세자의 모습도 오늘날의 시각에선 그리 흠으로 보이지 않는다. 글이나 읽는 샌님보다는 건축과 이재에도 밝은 무인 풍의 세자가 훨씬 미래지향적인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종영한 마의의 정겨운 이나 현재 방송중인 꽃들의 전쟁의 정성운 모두 이런 시각의 소현세자를 연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는 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가 인질로 나날을 보냈던 심양은 지정학적으로한반도를 관리하는 대륙의 창구 역할을 했던 도시다. 고려말 원나라도 만주에 심양왕이라는 직책을 마련해 두고 고려 왕을 견제했다. 고려 25대 충렬왕이 마음에 들지 않자 심양왕으로 있던 아들 충선왕을 개경으로 보내 부자간에 왕권 다툼을 벌이게 한 적도 있다..

 

소현세자는 이 심양에서 예친왕 도르곤을 비롯한 청의 고위 인사들과 막역한 사이가 되어 갔다. 중원이 이미 청에게 넘어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판단이다. 자연스럽게 병자호란으로 권위가 실추된 인조보다 청 황실과 가까운 젊은 소현세자가 실세로 판단하는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미래 권력인 세자에게 투자하자는 계산이 서기 시작한 것이다.

 

인조와 정치적 생명을 함께 하는 김자점 등 반정 공신 세력들에겐 이보다 께름칙한 일이 없을 터. 이들은 날이 새면 인조에게 달려가 소현세자가 이미 왕이 된 듯 처신하고 있다며 속닥질을 했다.

 

언젠가 물려줄 왕위라 해도 당장 내놓으라면 불쾌한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게다가 충렬왕과 충선왕의 전례를 생각해 보면 어느날 갑자기 청이 양위를 요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한양과 심양의 거리 속에서 부자간의 관계는 날로 소원해져 갔다. (2부에 계속)

 

2부 소현세자, 죽은뒤에도 눈을감지 못했다. http://fivecard.joins.com/1141

 

 

 

 

그러니까 소현세자가 귀국하자마자 죽어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를 불안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인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에 대해 "심양에 있으면서 거의 왕과 왕비 행세를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이게 소현세자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들 듯 합니다.

 

당시까지 청의 수도인 심양에 세자가 있고, 포로 송환을 비롯해 수많은 외교 사안이 있었던 상황이고 보면, 세자와 수행원들은 오늘날의 대사관 역할을 넘어 아예 조선의 작은 정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세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성격이었다면 모를까, 말을 달리는 매 사냥을 즐기고 청 순치제의 숙부인 예친왕(도르곤)과 친분을 쌓는 호방한 성격이었으므로 그 존재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런 세자가 있었으니, 조선 내에도 세자야말로 조선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특히나 인조는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정치적인 권위가 내려앉은데다 그를 둘러싼 인조반정 공신들, 그 중에서도 김자점의 세도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방송중인 사극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을 보시면 이 시기의 정국이 적나라하게 그려집니다. 김자점(정성모)이 수양딸로 삼아 궁에 들여보낸 궁인 조씨(김현주)는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두 아들을 낳고 내명부로서 소용을 거쳐 귀인에까지 이릅니다. 김자점은 한편으로 조씨가 낳은 공주를 손자며느리로 맞아들이는 등 인조를 둘러싼 김자점과 소용 조씨의 '인의 장벽'은 날로 두터워졌죠.

 

이들에게 최선의 결과는 인조가 인열왕후(이때는 이미 죽은 뒤)와의 사이에 낳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을 제치고 조씨가 낳은 숭선군이 인조의 후사를 잇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김자점을 경원하는 세력이 세자 곁으로 모였으니 이들이 갈 길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세자와 인조의 사이를 갈라 놓아야 했던 것이죠.

 

 

 

게다가 소현세자는 천주교에 귀의했을 가능성까지 높게 점쳐지고 있습니다. 2005년 막을 올린 연극 '흔적'은 한국 기독교의 첫 순교자로 소현세자를 꼽고 있습니다. 조선이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에 나서기보다도 훨씬 전의 일인데, 어쨌든 당시 조선의 분위기로 보아 천주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교(邪敎)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P.S. 마지막으로 인조와 소현세자-봉림대군 사이의 벼루 이야기는 당시로선 꽤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진 이야기인 듯 합니다. 실제로 소현세자가 귀환할 때 많은 문물과 함께 꽤 많은 재물을 가져왔다고 하니 그 이야기가 저렇게 윤색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죠.

 

아울러 일설에 따르면 인조가 소현세자를 내리친 '용연석'이 요즘도 쓰이는 '요녀석'이라는 말의 어원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얼마나 공인된 학설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주장을 읽어 보시면 웃어 넘길 정도로 근거 없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http://www.unn.net/ColumnIssue/detail.asp?nsCode=21437

 

 

너무 길어졌습니다. 소현세자 사후에도 3대에 걸쳐 이어진 비극에 대해선 다음 또 한편의 글을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fivecard5를 팔로하시면 새글 소식을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이거 꽤 중요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