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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의 기행에 대해 두번째 이야기를 풀어가려 합니다. 앞에서 말한 유희서 청부살인 사건은 사실 빙산의 일각. 유희서가 명문가 출신의 공신이었기 때문에 유난히 부각된 것 뿐이고, 임해군의 세도에 희생된 사람들은 부지기수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오히려 나름 잘 나가던 유희서 같은 사람도 서슴없이 해치울 정도로 임해군의 행동은 안하무인이었다는.

 

임해군의 비행에 대한 첫번째 글은 이쪽입니다.

임해군, 소시오패스에 가까웠던 왕자 http://fivecard.joins.com/1155

 

그리고 임해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다 보면 '오죽하면...'이란 생각이 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임해군에 대한 정사의 기록에 대한 부분입니다.

 

 

 

 

임해군 (1574-1609) 2

 

임해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다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보다 인조 때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 더 임해군의 비리에 대한 내용이 많다는 점이다.

 

수정실록이 편찬된 이유가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것임을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다. 이 목적에 충실하려면 수정실록 편찬자들은 임해군을 광해군에 의해 밀려난 피해자로 묘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반정의 주역들로서도 차마 임해군을 옹호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긴 왜란이 끝난 뒤에도 광해군은 정국 안정을 위해 안간힘을 썼고, 명나라도 세자 책봉을 정식으로 진행하자는 전갈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엔 선조가 주저했다. 조정 대신들이 마치 광해군이 이미 왕이라도 된 양 대하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뛸 듯 기뻐했지만 시간은 광해군의 편이었다. 1607 10, 선조가 병으로 드러누웠다.

 

선조는 죽기 한달 전까지도 광해군에게 양위하라는 정인홍의 상소에 어찌 신하가 할 말이냐고 격분하는 등 의욕을 과시했으나 1608 21일 돌연 사망했다. 이이첨의 계략에 의해 동궁전에서 들여간 약밥을 먹고 숨이 끊어졌다는 독살설이 돌았으나 이미 광해군의 등극이 대세였다.

 

 

선조의 마지막 나날은 광해군에겐 상당히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 선조가 왕위를 물려줄 뜻이 없는 듯한 느낌. 영창대군의 출생. 그런데 그 선조가 병으로 쓰러진 뒤 마음이 약해졌는지 1607년 10월11일, 이런 전교를 내립니다.

 

“나는 본디 질병이 많아서 평일에도 만기(萬機)의 정무는 절대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지금은 병에 걸린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조금도 차도가 없어 정신이 혼암하고 심병이 더욱 침중하다. 이러한데도 왕위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세자 나이가 장성하였으니 고사에 의해 전위(傳位)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하는 것도 가하다. 군국(軍國)의 중대사는 이처럼 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속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왕위를 물려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섭정으로라도 임명해 정사를 돌보게 하겠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미 영창대군에게 정치적으로 기울어 있던 유영경 등이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냐는 것이죠.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 회계하기를,
“신들이 삼가 비망기를 보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황공하여 품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께서 여러 달 동안 조섭하시어 즉시 쾌복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점차 수라를 드시어 원기가 회복되어 가니 온 나라 신민이 평복될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만 의외에 이번에 갑자기 이런 명을 내리시니 신들은 몹시 걱정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는 조섭중에 계시더라도 적체된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이런 점은 염려하지 마시고 심기를 화평하게 하여 조섭에 전념하시면 종묘와 사직이 은밀히 도와서 성후(聖候)가 저절로 강녕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들의 소원일 뿐만 아니라 군신(群臣)의 뜻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이런 말이 몇번 오가더니 선조는 슬그머니 전위나 섭정 이야기를 거둬 들입니다. 어쩌면 애당초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이 신하들을 떠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도마 위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온 광해군은 아슬아슬한 마음이었을텐데 이듬해 1월18일 정인홍이 상소를 올립니다. 

 

 

 

"신이 삼가 도로에서 듣건대 지난 10월 13일에 상께서 전섭(傳攝)한다는 전교를 내리자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마음 속으로 원임 대신을 꺼려 다 내어 쫓아서 원임 대신들로 하여금 참여하여 보지 못하게 하였고 여러번 방계(防啓)를 올리고 유독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공모하였으며 중전(中殿)께서 언서(諺書)의 전지를 내리자 ‘금일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 밖에 나온 거사이니 명령을 받지 못하겠다.’고 즉시 회계(回啓)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정원과 사관(史館)으로 하여금 성지(聖旨)를 극비로 하여 전출(傳出)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니, 영경은 무슨 음모와 흉계가 있어서 이토록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

 

이 말에 선조는 대노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유영경을 규탄하는 상소지만 내용은 왕 자신이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는 지탄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만 있으면 왕위를 넘본 역적 대접을 받게 된 광해군은 당장 진땀을 흘리며 죄를 청합니다.

 

"신이 못난 자질로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있으므로 밤낮으로 근심하며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상후(上候) 미령함으로 인하여 갑자기 전섭(傳攝)한다는 명을 내리시니 신은 죽으려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의 회계는 어찌 신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뜻밖에 정인홍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만들어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혔습니다. 성상의 하교에 ‘지친간에 부득불 이로 인해 의심하여 틈이 생기겠다.’고 하셨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신은 만 번 죽는 것 이외에는 다시 상달할 바가 없으니 땅에 엎드려 황공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당장 정인홍을 잡아다 목을 베라는 명을 내리지 않은 것이 좀 신기할 뿐입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정인홍에 대한 선조의 신뢰가 워낙 두터웠다는 점(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정인홍을 도성에서 50리나 떠난 뒤 다시 불러들일 정도. 그리고 '정인홍이 여러 사람과 불편하게 지냈다'는 대신들의 말에도 그를 옹호할 정도), 그리고 정인홍이 이때 이미 73세의 고령이었다는 점 등이 있긴 합니다. 어쨌든 죽기 이틀 전, 1월29일 선조는 "정인홍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심정을 내비칩니다.

 

"소인의 성품은 남 해치기를 즐겨 하고 일 저지르기를 좋아하여 자신이 죽지 않으면 그치지 않으니 그러므로 악한 자 다스리는 법을 부득불 엄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만약 구차스럽게 임시 방편으로 처리하면 후일 다시 이보다 큰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만약 저들이 일시의 명사(名士)를 모두 모함한다면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예로부터 신하가 임금을 이간시키고도 천벌을 면할 수 있었는가. 나는 진실로 가슴이 아프다. 이는 참으로 신하가 목욕하고 토죄(討罪)를 청할 일이다"

 

아무튼 정인홍이 옳다, 유영경이 옳다는 주장으로 조정이 들썩들썩하던 도중, 2월1일 선조가 갑작스레 승하합니다. 정인홍이 상소를 올리고 보름도 안 되었으니 잡아 죽일 새도 없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모면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샛길로 빠졌지만 다시 임해군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제 임해군을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해군이 등극한지 채 보름도 안 된 214, 이미 임해군이 몰래 장사를 모으고 병장기를 들이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광해군은 형이 그럴 리 없다며 신하들을 꾸짖었지만, 그 사이 임해군이 여자 옷을 입고 하인의 등에 업혀 동네를 빠져나가다 잡혀 들어왔다. 역모를 자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임해군에겐 마지막 살 길이 남아 있었다. 1608년 6월, ‘공인되지 않은 세자광해군이 장남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이유를 조사하겠다며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두 형제를 대질시켜야 하니 교동도(강화도 서쪽의 작은 섬)에 유배되어 있던 임해군을 데려오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정인홍은 대로하여 임해군의 목을 베어 사신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고함을 질렀지만, 조정의 중론은 사신을 잘 설득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는 쪽이었다. 국토의 2/3를 왜군에게 빼앗겼다가 명의 원군 덕분에 나라를 되찾은지 겨우 11. 명의 위세는 당당했다.

 

결국 이덕형이 나서 광해군은 사신들을 위무차 방문하는 정도로, 임해군은 서강(지금의 마포 근처)까지 나와 사신들과 면담하게 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임해군이 일부러 미친 사람 시늉을 했다일월록의 내용이다. 어째서 명나라 사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대로만 해 주면 광해군이 최소한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신들의 입을 막기 위해 막대한 뇌물이 동원됐다. 역관 홍순언은 왜란 때 원군을 요청하면서도 명나라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거늘, 이제 버릇을 들였으니 대국 사신이 올 때마다 백성들이 더욱 괴로워 질 것이라며 탄식했다. 결국 이 예측은 그대로 실현됐다.

 

1년 뒤 교동도에서 임해군이 급사했다. 1609 429일자 실록에는, ‘유배된 임해군을 지키던 무관 이정표가 독을 먹이려다 반항하자 목을 졸라 죽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되어 있다. 물론 광해군 당대에는 그저 소문으로만 돌던 이야기였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이이첨이 교동 현감인 이현영을 설득해 임해군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후임인 이직을 시켜 흉수를 쓴 것이라는 주장을 전하고 있다. 자손은 없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장남은 여럿 있었지만 임해군 만큼 악평에 시달리던 사람도 드물다. 그 본인도 문제였지만 너무 잘난 동생 광해를 둔 탓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선조의 아들들 가운데 임해군만 평판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순화군은 이유 없이 죽인 사람이 1년에 10명이 넘는다’, 정원군은 임해군보다 악하면 악했지 나을 것이 없다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다만 정원군은 죽고 난 뒤 아들 능양군이 공신들에 의해 인조로 추대되면서, 비록 이름만 왕이지만 원종으로 추존됐고 생전의 악행은 조용히 묻혔다. 만약 임해군도 아들이 있어 왕위에 올랐다면 이런 오명을 후세에 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

 

 

순화군 이보의 졸기에는 "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悖妄)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무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이나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논계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안치시켰는데, 이 때에 이르러 죽었다.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직을 회복시켜 순화군이라 하고, 익성군 이향령(益城君李享齡)의 아들 이봉경(李奉慶)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밖의 사료에는 대부분 정원군에 대해선 좋은 이야기만 있습니다. 효성이 두터웠다,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임금 감(?)으로 꼽혔던 아들 능창군이 역모에 휘말려 일찍 죽은 이후 속병을 앓아 폐인이 됐다... 이유는 장남인 능양군이 왕위에 올라 인조가 되었기 때문이죠. 임해군도 아들이 있었다면... 글쎄요.

 

 

P.S. 잊고 있는 사이 '불의 여신 정이'가 끝나 버렸네요. 아무튼 임해군에 대한 정리는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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