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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영화가 끝나 갈 무렵, 이 영화, '쓰리 빌보드' 의 악영향에 대해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꽤 적지 않은 수의 시나리오 작가 혹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키보드를 던져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플롯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건 진정 신의 축복이기란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 정도로 '쓰리 빌보드'는 대략 근 5년간 본 영화들 가운데 최소한 대본에서만큼은 최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 시작. 

 

살인사건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미국 남부의 어느 조용한 읍내. 한 여자가 그 시골에서도 외진 길 쪽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광고판 세 개를 사서 광고를 냅니다. 광고의 내용은,

 

RAPED WHILE DYING

내 딸이 강간당해 죽었어.

 

AND STILL NO ARRESTS?

그런데 아직 아무도 체포하지 못했다고?

 

HOW COME, CHIEF WILLOUGHBY?

윌로비 서장,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가출한 10대 딸이 강간당해 죽고, 불에 타다 만 시신이 발견되고, 그 뒤로 7개월이 지났는데 아무도 체포하지 못하고 있는 경찰의 무능에 대한 어머니의 분노가 이렇게 표현됩니다.

 

이 부분까지 보고 나면 관객의 90%는 영화의 방향을 짐작합니다. 이것은 딸을 잃고 분노에 가득 찬 백인 하층민 엄마의 외로운 싸움을 그린 사회성 영화로구나. 이 엄마는 결국 무능하고 나태한 시골 경찰을 질타하고, 어디선가 론 레인저 한 사람이 나타나고, 이 영웅(혹은 반영웅)은 대다수 사람들의 외면 속에 엄마를 도와 딸의 원혼을 달래 줄 수 있....

 

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정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우수한 관객입니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를 계속해서 본다면 당신의 그 모든 예측이 이렇게 벗어날 수 있다는 데 진정 놀라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 바로 키보드 앞에 앉아서 샘솟는 아이디어로 바로 대본을 쓰시기 바랍니다. 정말입니다. 한국의 영화계/드라마 업계는 바로 당신 같은 분을 찾고 있습니다.)

 

사실 글 첫머리에서는 이 작품으로 인해 좌절할 작가 지망생들에 대해서만 썼지만, 반대로 한 두 작품 해 보고 아 난 안 되는구나 하신 분들에게도 이 영화는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각본/감독을 겸한 마틴 맥도나의 이전 작품들을 보면 이런 수준의 작품을 써 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작 중 제가 본 작품은 '킬러들의 도시(In Bruge)' 하나 뿐인데, 일부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본상으로 별로 뛰어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맥도나 감독의 세번째 장편영화 시나리오입니다. 최소한 세 번은 써 봐야 하실 이유가 또 생긴 셈입니다.  

 

자꾸 다른 얘기로 빠지지만, 이 영화의 리뷰를 쓰면서 줄거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건 별 의미가 없을 듯 합니다. 이 대목에서 할 말은 딱 한마디. 지금 바로 극장으로 달려가세요. 언제 상영관이 없어질지 모릅니다. 다음주까지... 물론 국산이든 외산이든 흥행용 대작 영화가 없는 3월이긴 하지만, 한국의 극장 상황에선 낙관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지금부터는 스포일러 작렬입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여기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 인물은 세 사람. 간판에도 언급된 시골 읍내 경찰서장인 윌로비(우디 해럴슨), 문제의 엄마인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 그리고 윌로비의 부하인 꼴통 경찰관 딕슨(샘 록웰)입니다.

 

 

 

세 사람 중 아마도 전통적인 주인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윌로비 서장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꽤 자주 등장하는 미국 소규모 지역사회의 영웅이죠. 굳이 고전 영화로 비교하자면 '앵무새 죽이기'의 아티커스 핀치 변호사(그레고리 펙이 연기하는)같은 인물입니다. 정의감이 투철한데다 두뇌가 명석하고, 딕슨 같은 개망나니도 따르게 하는 이상적인 인간에 가깝습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그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로서도 밀드레드 딸의 강간 살인 사건은 난제입니다. 수사를 하려 해도 증거도 증인도 없습니다. 시체에서 남자의 DNA가 검출되긴 했지만 비교할 용의자가 없는 실정입니다. 

 

반면 밀드레드에겐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증거가 없다는 윌로비의 말에 왜 이 동네의 모든 남자, 나아가 전 미국의 모든 남자로부터 DNA를 추출하지 않느냐고 우겨댑니다. 자신이 중시하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선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이를테면 국가 권력이 닥치는대로 민간인의 DNA를 추출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인권 침해 같은)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매우 극단적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이익이 주어질 때 내놓아야 할,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편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법입니다.

 

밀드레드의 일방통행적인 생각은, 딸을 잃은 엄마라는 당위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사지 못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밀드레드가 공격하는 윌로비 서장이 평판 좋은 인물인데다 암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밀드레드는 자신이 암에 걸려 있다는 윌로비의 말에도 "그럼 시간이 없을테니 더 서둘러 수사하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진정 비호감 캐릭터죠. 이런 밀드레드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선두에 딕슨이 있습니다.

 

 

 

물론 딕슨에겐 밀드레드에 대한 구체적인 미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애당초 딕슨은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일찍 죽은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그의 성장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고, 인종주의를 비롯한 갖가지 편견도 다 어머니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그 결과 딕슨은 엄청난 효자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어머니 외에 그가 믿고 따르는 것은 윌로비 서장 뿐이고, 그 윌로비 서장에게 맞서다 결국 윌로비 서장을 죽게 하는(이건 좀 다시 얘기할 필요가 있죠) 밀드레드는 진정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윌로비 스스로 밝히고 있듯, 그의 죽음은 더 지속해 봐야 고통만 더할 뿐인 암 치료의 연장을 피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광고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 때문에 밀드레드를 더욱 비난할 것임을 짐작하고 있고, 그 때문에 밀드레드에게 광고판 임대료를 자신이 지불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당연히 그의 예견대로 밀드레드는 더욱 고립되지만 밀드레드는 서장의 마지막 편지를 공개하지 못합니다. 죽을 사람을, 그리고 이렇게 솔직하고 선량한 사람을 괴롭혔다는 죄책감 때문이죠.

 

이 영화는 '인간의 용서와 화해', '다른 인간의 입장에 대한 역지사지', '더불어 살기의 미묘함' 처럼 너무나 기본적인, 심지어 너무 자주 다뤄져서 하품이 날 지경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제껏 관객들이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으로 관객들을 몰아넣고 절묘한 공감의 체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아울러 그 가운데서도 코미디, 특히 블랙코미디로서의 위치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강점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 내면을 성찰하는 이야기'와 '유머 감각'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쉽게 단정해 버리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과 송강호의 개그가 절대 따로 놀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쓰리 빌보드'에서는 딕슨이 주로 이 역할을 맡습니다. "아니에요! 열두시까지 들어간다고 했다구요!" "왜? 소금은 원래 상처에 좋은 것 아닌가?" 같은 대사는 너무나 유쾌합니다. (개인적 취향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겠죠.^^)

 

 

 

이 세 사람을 둘러 싼 여러 마을 사람들은 각각 이 세 사람 중 한쪽 편에 서서 갈등과 웃음을 조율합니다. 특히 '왕좌의 게임'으로 월드스타가 된 난장이 배우 피터 딘클리지가 연기하는 제임스는 몇 신 나오지 않지만 이 영화의 색깔을 대변하는 중요한 기능을 갖습니다. 그가 맡은 역할을 '낙관'이죠. 희망이라곤 없는 밀드레드에게 잠시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인물입니다. 역시 같은 역할을 하는 페넬로페(사마라 위빙) 역시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빙 Weaving 이란 이름에서 '혹시?' 하셨다면: 네. 스미스 요원님의 조카딸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대단한 이야기를 봤어!'라는 생각이 들지만 누군가로부터 '대체 그 영화는 뭐에 대한 영환데?'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 두 마디로 이 영화가 어떤 영화라는 점일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어떻게 변해 가는가를 다룬 다른 위대한 영화들, 예를 들어 '타인의 삶' 같은 영화를 설명한다면 '도청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엿보다, 그 사람의 인생에 감화되어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이야기' 처럼 얘기할 수 있겠지만 '쓰리 빌보드'를 이런 식으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 어머니가 딸이 죽은 사건을 추적하다가 인생에 눈뜨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던 사람들이 인간은 어떤 경우에서든 화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이야기'라고 하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특별한 사건이랄 게 딱히 등장하지 않는데도, 놀랍도록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이 영화의 신비로운 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라스트 시퀀스.

 

차 안에서 딕슨과 밀드레드는 발견된 악을 스스로 징벌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건 오히려 덜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두 사람 사이에 정의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그 둘은 이제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서로를 지지해 주는 힘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거죠.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끝까지 인간성에 대한 낙관을 잃지 않습니다. 이 낙관이 너무 나이브하게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을 좋아했던 분들이라면 이런 마무리를 충분히 싫어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아, 물론 저 이 영화 굉장히 좋아합니다.)

 

맥도먼드와 록웰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논하는 것은 시간낭비. 그 밖의 배우들도 눈부십니다. 이 화려한 연기가 맥도나 감독의 대본과 디렉션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작품상, 최소한 각본상은 주어졌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물론 상은 운이죠. 어쩌면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받은게 불운의 시작...

 

 

 

 

 

P.S. 물론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는 라스트 신 직전에 나오는 밀드레드와 딕슨의 대화 = "이봐, 사실 그때 경찰서에 불 지른 건 나였어." "...그럼 당신 아니면 대체 누구겠어?" - 입니다. 아마도 오래 전,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어"('키즈 리턴') 이후 가장 훈훈한 대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P.S. 2 이 영화의 여운을 느끼며 들을 만한 노래는 아마도 이 곡?

 

 

 

 

댓글
  • 프로필사진 박준민 오랜만에 포스팅 읽고... 공감 팍 음악에 글올립니다. "그래 그렇게 변해들 가는 건 자기만 아는 이유...." 사회 나와서 86형님들과 그렇게 많은 교류를 하거나 뵙지 못해도 가끔 뵈어도 별로 오래된 것 같지 않은 느낌은 그시절 그 마음과 달라진 바 없는 변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들 변하네요... 어리기 때문이 아니라.... 우울한 마음에 이 음악이 더욱 센치해져서 글 남깁니다. 2018.03.19 15:5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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