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MBC TV '일밤'의 '퀴즈 프린스'부터 KBS의 '퀴즈 대한민국'까지, 요즘 방송가에 퀴즈 프로그램으로 분류되는 프로그램들은 널렸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KBS의 '도전 골든벨'에서 SBS의 '퀴즈 육감대결'까지 역시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퀴즈 프로그램이 있지만, 제대로 된 퀴즈는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20년 전, 그리 머지 않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정말 끔찍한 퀴즈 후진국입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돼 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의 출제 수준은 들쭉날쭉이고, 퀴즈 프로그램이 끝날 때만 되면 대체 왜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을 들먹이면서 강제로 감동적인 분위기를 끌어내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재미도 없고, 감동은 더더욱 없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흐름을 끊어 먹는 사회자들도 짜증을 유발합니다. 재치있는 토크를 보려면 대체 왜 퀴즈 프로그램을 봅니까.

한국 퀴즈 프로그램들이 왜 날로 재미없어지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목: 한국, 퀴즈인을 무시하는 나라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신 분들은 당연히 그 퀴즈가 어디서 보던 거다, 했을 거다. 맞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까지 그렇게 생긴 퀴즈를 했다. MBC <퀴즈가 좋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왕년에 퀴즈 좀 해본 사람으로서 얘긴데(나중에 혹시 시비 거실 분이 있을까봐 써두자면, 지상파 퀴즈 프로그램에 한 열다섯 번 정도 나가봤다), 한 명의 출연자가 열 문제를 연속으로 모두 맞혀야 한다는 건 사기다. 정상적 포맷이 아니다.

퀴즈 프로그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출연자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것과 운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이 <퀴즈가 좋다>는 후자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생각해 보자. 아무리 박식한 사람이라도 정통한 분야는 서너 개를 넘기 힘들다. 그런데 열 개의 문제를 하나도 틀리지 말고 모두 맞혀야 한다니. 문제 난이도가 중간만 넘겨도 절대 불가능한 과제다.

이 프로그램의 원조는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누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하나>(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다. 이 프로그램이 히트하면서 세계 각국이 그 포맷을 사다가 자기 나라 실정에 맞는 퀴즈를 만든 거다. 위에서 거듭 말한 것처럼 이 포맷이 원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외국 제작자들은 상식적인 선에서 타협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첫째, 열 개의 문제를 내되 모두 객관식으로 낸다. 둘째, '장난하냐'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쉬운 문제로 열 개를 채운다. 셋째, 도전자가 다음 문제에 도전할지 말지를 정할 때, 다음 문제와 보기를 먼저 본 다음 결정할 수 있게 한다. 이 정도는 해줘야 도전자에 대한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퀴즈가 좋다>는 어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뒷부분의 어려운 문제는 모두 주관식이었다. 난이도? 아마도 이 프로그램 포맷을 사간 나라들 중 최고 수준이었다. 세 번째의 '문제 미리 듣기' 배려 같은 건 언감생심.

이런 국제 기준 미달의 불리한 조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했고, 극소수의 운과 실력을 겸비한 사람들이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뭐 1,000만 원이라는 최종 상금이 그 자체로 그리 적은 돈은 아니다(형식상 2,000만 원이지만 1,000만 원은 어디엔가 기부하고 도전자는 절반만 갖는다는 설정. 물론 세금을 떼면 800만원 정도다). 하지만 해외 도전자들의 상금 액수를 알고 나면 아마 그 분들도 속았다는 느낌이 들 거다.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은 '밀리어네어'라는 제목에 맞게 '백만 단위'의 상금을 줬다. 영국의 100만 파운드, 미국은 100만 달러,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은 100만 유로를 줬다. 환율에 따라 오락가락하지만 대략 10억 원에서 20억 원 사이의 상금이다. 소위 선진국 가운데서는 1,000만 엔이 걸렸던 일본이 가장 적은 편이었다. 어쨌든 최소 1억 원은 넘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너무 잘사는 나라만 보지 말라고? 영화로 보신 대로 인도의 우승 상금은 2,000만 루피. 약 6억 원 정도다. 말레이시아도 100만 링깃(약 3억 8,000만 원), 필리핀도 잘나갈 때는 200만 페소(약 6,000만 원)를 줬다. 최근 필리핀의 상금인 100만 페소가 세계 최저 수준이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상금을 주는 나라는 억지로 하나 찾았다. 베트남의 우승 상금 1억 2,000만 동이 한국 돈으로 1,000만 원 정도 되는 모양이다. 이것이 한국 퀴즈계의 현실이다.

그렇다. 하자는 얘기가 바로 이거다. 하다못해 인도에서도 퀴즈만 잘하면 한 살림 차릴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어림없다. 왕년엔 장학퀴즈 기장원만 해도 대학은 공짜로 다녔는데, 이젠 어림없다. EBS 장학퀴즈 7연승을 해도 상금은 3,000만 원.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500만 원꼴이니 1년은 자기 돈으로 다녀야 한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퀴즈계의 김연아가 나오길 기대한단 말인가. 정말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없다. (끝)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윗글에서는 퀴즈 상금이 형편없이 싸다는 지적을 했지만, 상금만 싼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 싼 상금조차도 시청자들에게 내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방송사들의 꼼수가 더욱 쇼를 저질로 만듭니다.

'1대100' 같은 프로그램의 연출진은 아예 솔직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매일 우승자가 나오면 저희 프로그램 당장 폐지됩니다. 어떻게든 우승자가 나오지 못하게 해야죠." 이런 자세로 하다 보니, 시청자나 참가 희망자가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군가 상금을 타면 대대적으로 홍보합니다. 얼마 전에는 한 블로거가 박지선이 5000만원 상금 탄 걸 언론이 먼저 기사화하는 바람에 보는 재미가 없었다고 분개했던데, 이런 속사정을 모르니까 하는 얘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퀴즈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난이도 조정도 안 되는 한심한 문제로 일관하면서 출연자가 수준이 높네, 실력이 대단하네 부추겨 놓고 정작 고액 상금이 걸린 마지막 단계에서는 도저히 '상식'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문제를 내 도전자를 좌절시키는 것이 정해진 패턴입니다. 물론 '퀴즈 영웅'이 너무 안 나오면 영업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적절할 때 한두번씩 서비스 문제로 영웅이 나오는 길을 열어 둡니다.

상금 자체도 적은데다 그 상금마저 주지 않으려는 짠돌이 방송사. 이런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겠다고 줄을 선 시청자들이 참 안됐다는 생각 뿐입니다.

물론 정상적인 퀴즈 프로그램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유치한 짝퉁 퀴즈 프로그램의 범람 또한 문제입니다. MBC에서 EBS로 가면서 완전히 망가져 버린 '장학퀴즈'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1년이 멀다 하고 프로그램 포맷만 바꾸지 말고, 제발 출제되는 문제의 질에나 신경을 썼으면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문제 잘 맞추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입니다. 연예인 흉내내는 얼치기 고교생 스타를 만드는 프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귀신도 하기 힘들, 50문제 연속 맞추기 라는 어처구니없는 포맷의 '도전 골든벨' 또한 큰소리 칠 처지는 아닙니다. 과연 현장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별별 얘기가 다 있습니다만, 애당초 사실상 불가능한 포맷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출연자들을 끼워 맞추다 보니 생기는 일들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럼 좋은 퀴즈 프로그램이란 어떤 것일까요. 일단 정통 퀴즈란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첫째, 경쟁이 일어나는 동안 출연자가 같은 문제를 갖고 같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둘째, 높은 점수를 획득한 사람이 승자가 될 것. 미국 퀴즈 쇼 '제퍼디'의 장수 비결은 이 두 개의 원칙을 충실히 지킨 데서 비롯됩니다.

퀴즈 마니아인 영국인들은 여기서 출발해 잇달아 세계적인 인기 포맷을 개발해냅니다. '후 원츠 투 비 어 밀리어네어'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걸어 두고 문제의 난이도를 통해 여유있는 운영을 합니다. 물론 '100만 파운드'의 상품은 그저 시청자를 유혹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줄 수 있는 상금입니다.

BBC의 '위키스트 링크' 또한 퀴즈 풀이와 동시에 사람들의 편견과 착각을 관찰할 수 있는 고급 심리 게임입니다. 하지만 이 포맷에서 흥미로운 점은 모두 버리고, 한심한 부분만을 가져 온 것이 오늘날 KBS에서 방송하고 있는 '퀴즈 대한민국'의 포맷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지막으로 억지 감동에 대한 부분. 특히 KBS 계열이 이런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항상 퀴즈를 풀다가 막판에 가면 꼭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을 들먹이면서 출연자를 울먹이게 하려고 합니다. 퀴즈를 잘 푸는 것만으론 불만인가요? '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모두 효자, 효녀, 효부입니다'를 그렇게 강조해야 하는 걸까요.

프로야구가 열리고 있는 잠실구장에 가서, 9회말 2사 만루에 등판한 구원투수를 붙잡고 "대체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떨립니까? 이 고비만 넘기면 오늘 승리의 수훈이 되는데 부모님께 하시고 싶은 말씀 없나요?"한다고 해 보십쇼. 얼마나 코미디인지.

퀴즈는 스포츠입니다. 잘 풀면 이기는 거고, 잘 푸는 사람이 영웅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 퀴즈 프로그램은 계속 퇴보하고 말 것 같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