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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뉴스 사진입니다.)

올해들어 부진을 면치 못하던 양준혁이 요즘 살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프로야구 최고참 자리를 다투고 있는 이 노장의 분전을 보니 문득 생각나는 옛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1995년 여름의 어느 날입니다. 당시 삼성은 어정쩡한 중위권 팀이었습니다.

방망이는 괜찮았습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 진출 주역이던 방망이는 비록 김성래가 급격한 쇠퇴의 기미를 보였지만 양준혁을 중심으로 신인 이승엽, 무명 중고신인 이동수(결국 95년 신인왕이 됩니다), 그리고 백인천 타격 인스트럭터의 후광을 받은 신동주와 최익성 등이 수혈되면서 만만찮은 기세를 보였습니다.

문제는 투수력. 김태한과 박충식을 제외하곤 믿을 선수가 없었습니다. 오봉옥이 잠시 구원투수로 반짝했지만 불펜의 양과 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죠. 롯데전 전담요원 성준이 아직 건재했지만 일단 선발이 무너지면 대책이 없는 게 당시 삼성의 팀 사정이었습니다.

아무튼 팀 성적이 썩 좋진 않았지만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대구구장에 인조잔디를 깔고 관중석을 정비한 이후 대구구장은 연일 매진 행진을 벌입니다. 뭣보다 양준혁-이동수-이승엽의 클린업이 인기의 중심 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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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년차에 팀의 중심이 된(물론 데뷔 시즌에도 중심이었지만) 양준혁은 영 삐딱한 성격이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친해지고 나면 의리도 두터운 친구였지만 아무튼 대구인 특유의 뻣뻣함이 돋보이는 인물이라 기자들에게는 기피인물이었습니다. 그래도 스타플레이어이니 멀리 할 수는 없었죠.

그리고 김성근 백인천 같은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에게도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습니다. "3할을 치잖습니까"라면 "양준혁 정도면 3할3푼에 홈런 30개 정도는 기본으로 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더군요. '스윙이 나빠 체격에 비해 홈런이 적게 나온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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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코치'가 1루에 나가 있을 때도 있었군요. 뒤는 더구나 신경식...^^
참, 대부분의 사진은 http://www.yangjunhyuk.com 에서 퍼 온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당시 1994년에 이어 95년에도 삼성을 맡았고, 동봉철 김태한 양준혁 등 88학번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준이나 류중일 같은 선수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고참 선수들은 대개 기자들에게도 '틱틱거리는' 걸로 유명했죠.

강기웅 김용국 이종두 같은 선수들은 팀 성적에 비해 스타의식이 지나친 선수들로 불렸습니다. 그걸 보고 기자들은 "아직도 삼성이 최강팀인줄 안다"고 말하곤 했죠. 결국 이들 선수들은 96년 백인천 감독에 의해 대거 정리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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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이 길었는데, 양준혁은 그 불같은 성격 때문에 사고를 한번 칩니다. 95년의 어느 여름날, 삼성과 LG가 대구에서 맞붙었습니다. 경기 중반, 양준혁이 친 잘 맞은 타구가 중견수 앞으로 쭉 뻗어나갔는데, 어기적 어기적 하던 LG 중견수 최훈재의 글러브에 맞고 공이 튀어나가 버립니다. 이때 전광판에는 E자 아래 불이 들어왔습니다. 안타가 아니라 최훈재의 실책이란 판정이 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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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외야로 공이 나간 경우, 에러보다는 안타 판정이 나는 게 대부분이긴 했기에 약간 의외다 싶기도 했지만, 아무튼 에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기자실과 같은 층에 있는 기록실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에러 판정에 격분한 양준혁이 기록실로 뛰어올라와 문을 발로 걷어 차며 항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분명 어느 쪽으로도 판정이 날 수 있었습니다. 에러로 판정을 해도 별로 할 말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경기후 이 소식을 들은 최훈재는 "아니 그건 내가 실수한게 맞는데 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공식 기록원의 판정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선수가 그것도 경기중에 기록실 문을 발로 차면서 안타-실책 판정에 항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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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다음날 아침에는 양준혁의 잘못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우루루 떴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양준혁은 무척 분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욕할 수가 있느냐는 항의를 해왔습니다.

다음날 낮, 경기장에서 양준혁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욕을 먹을 상황이다. 어떻게 선수가, 그것도 모범을 보여야 할 스타플레이어가 기록원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할 수가 있느냐'고 말했죠. 그는 이런 부분을 일면 수긍하면서도 '관례상 외야수가 포구를 못 했을 때 실책으로 판정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그럼 선수는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느냐'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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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의 말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말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프로 선수는 안타 하나를 치는데 정말 목숨을 건다. 선수에게서 안타 하나를 빼앗는 것은 선수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죠. 그럼 저도 "기자도 기사 하나 쓰는데 목숨을 건다"고 맞섰어야 하는데, 왠지 그렇게 말할 수가 없더군요. (제가 '기자계의 양준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훌륭한 기자 중에는아마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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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세월이 흘러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2000개의 안타를 친 타자가 됐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날 그의 행동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 한개 한개의 안타에 대한 '목숨을 걸고 친다'는 열정이 없었다면 이런 영광도 없었겠죠.

일본과 미국에서는 대 선수의 기준이 3000안타입니다. 경기 수도 많고, 병역 의무도 없는 나라와 비교하자니 한국에서의 기준은 낮춰질 수밖에 없죠. 양준혁이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서 활약했다면 지금쯤 3000안타를 넘어섰거나 넘보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앞으로 누가 나오건 당분간 2000안타를 넘볼 선수도 쉽지 않습니다. 과연 양준혁이 스스로 목표라고 밝힌 3000안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얘기 하나.

지금은 오히려 그런 얘기를 덜 듣지만, 신인 시절 그는 '머리가 크다'는 말 때문에 많이 놀림을 받았습니다. 삼성의 김상엽, 롯데의 주형광 임수혁과 함께 4대 거두로 불리기도 했죠. 94년인가 95년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야구장에 나가 그에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나: 어이 양군, 머리가 크면 정말 야구를 잘 하나?

늘 그냥 씩 웃고 말던 그가 한마디 하더군요.

양: 내가 요즘 눈여겨 봤는데 형님도 만만치 않아요.
나: 에이, 설마 자네랑 비교가 될까?
양: 아니, 말로 할 거 없이 내 모자 한번 써 봐요.

설마 하는 생각에 그가 벗어서 내미는 헬멧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쓰려는 순간, 이.럴.수.가.... 헬멧이 안 들어가는 겁니다. 허걱.;

그 다음부터 선수들이나 구단 관계자들이 저를 잘 알아보더군요. 대신 닉네임은 좀 길었습니다. '준혁이 모자도 안 들어가는 기자'라구요. 정말 생각해 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이군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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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와 LG 시절의 모습. 역시 삼성 유니폼을 입지 않은 양준혁은 왠지 가짜같습니다.

마지막으로 2006 까지의 통산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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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꿈의 성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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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모두 고개를 흔들던 이 타법으로 말입니다. 바로 그 만세! 타법.^^

아무튼 부상 없이 무사히 선수생활을 마치고, 이미 대구상고 재학시절부터 꿈이었다는 '삼성라이온스 감독'이 되어 무궁무진 활약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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