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트란 안 훙 감독의 '나는 비와 함께 간다(I come with the rain)'을 보고 왔습니다. 캐스팅 소식을 듣고 제목은 저런데 왜 비는 안 나오고 이병헌이 나오느냐는 농담을 한 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국내에 공개되다니, 세월 참 빠릅니다.

트란 감독은 잘 알려진대로 90년대 '시클로'와 '그린 파파야 향기'로 국제적인 주목을 끈 감독입니다. 그리고 2000년 이후 8년만에 이번 작품,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내놨고, 2010년 개봉 예정으로 현재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90년대의 트란 안 훙이 눈길을 끈 것은 베트남이라는 아열대 공간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끈끈함이 감도는 화면 안을 꽉 채우던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영상과, 순수와 현실의 대립이라는 소재가 잘 어우러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1990년대에 머물러 있다면 과연 지금도 그게 통할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영화, '나는 비와...'는 액션 느와르의 외피를 쓰고 있습니다. 당연히 총도 몇발 발사되죠. 일단 줄거리입니다.

경찰 출신인 탐정 클라인(조시 하트넷)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세계적인 갑부('세계 최대 제약회사의 주인'이란 설명이 붙여집니다)로부터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실종된 아들 시타오(기무라 타쿠야)를 찾아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시타오의 행적을 쫓아 홍콩까지 온 클라인은 홍콩 경찰인 친구 멩지(여문락)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데 이 과정에서 악질인 갱단 보스 수동포(이병헌)를 알게 됩니다. 어떤 것도 무참하게 살해해 버리는 잔학한 범죄자인 수동포에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인인 릴리(트란 누 엔 케)가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분들은 여기까지만 보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제목과 관련된 얘기는 영화 내용을 건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꼭 보시겠다는 분들은, 나머지 이야기도 영화를 본 뒤에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볼까 말까 하시는 분들에게 이 영화를 권할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트란 감독은 '시클로'를 만들고 나서 13년 이상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걸작들은 시대를 넘어 서는 힘을 갖지만, 어떤 작품들은 그 시대가 지나면 용도폐기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 '나는 비와...'는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직 형사인 탐정과 현직 강력계 형사, 그리고 악당 보스와 미녀가 나오는 이 작품은 전형적인 느와르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트란 안 훙인 이상, 관객의 위장을 쥐어 짜는 긴장감을 이 영화에서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졸음을 이길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이 영화를 특이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이른바 구세주 캐릭터입니다. 영화 속에서 기무라 타쿠야가 연기하는 시타오는 사람의 상처나 병을 치유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대신 치료의 방법은 좀 독특합니다. 이미 알려진 치료사들과는 달리 시타오는 타인의 병이나 상처를 자신에게로 흡수해 그 사람을 낫게 합니다. 자연히 그 사람이 겪고 있던 고통은 그대로 시타오의 차지가 되죠. 시타오는 불사신의 몸이라 죽지는 않지만, 대신 상처가 나을 때까지 끔찍한 고통을 대신 겪어야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통을 대신 겪는다는 것은 '타인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는 것을 곧바로 연상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시타오는 누가 보기에도 예수의 재림이었던 겁니다. 이 비유는 대단히 노골적입니다. 아름다운 창녀에서 그의 추종자로 변신하는 릴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면 누구일까 싶습니다. 시타오는 자신을 죽이러 온 수동포를 살인자 바라바를 대하듯 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비와...'는 이 추악한 욕망과 범죄의 시대에 잘못 찾아온 재림 예수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기에 곁다리로 붙은 것은 클라인의 기억 속에서 계속 클라인을 괴롭히는 과거의 연쇄 살인마 이야기입니다. 이 연쇄살인범에 대한 기억은 클라인의 뇌리에 박혀서 그로 하여금 선과 악의 실체를 혼동하게 만듭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제는 이 설정이 이제는 너무나도 흔해빠진 것이란 점입니다. 일찌기 니체가 말한(어느 책인지는 모릅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 본다(Whoever fights monsters should see to it that in the process he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look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looks into you)'는 경구를 연상시키는 스토리는 더 이상 울궈먹을 게 없을 정도로 진부한 얘기가 돼 버렸습니다. 심지어 드라마 '아이리스'에도 나옵니다.

트란 안 훙 감독이 이 영화를 약 10년 전쯤 내놨더라면 아마도 이보다는 훨씬 우호적인 평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트란 감독이 '시클로'의 세계에 만족하고 있는 사이 세계는 2009년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명 배우들을 끌어들이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런 진부한 영화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성찰에 관객들이 탄복하기를 바라는 건 무리일 듯 합니다. 차기작인 '노르웨이의 숲'은 오히려 통째로 회고적인 작품이니 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울러 이 영화에서 기무라 타쿠야는 - 나름대로 열연하긴 했지만 - 이 영화에서 '2046'에 이어 또 한번 굴욕을 겪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사라곤 서너마디 뿐인, 그리고 나머지 장면에서는 모두 괴성을 지르며 굴러다니는 연기로 일관해야 하는 이런 캐릭터를 과연 일본 최고의 톱스타가 해야 하는지는 정말 의문입니다.

도대체 왜 기무라가 이런 역할을 수락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서 한 영화라고는 '무사의 체통'과 '히어로' 정도가 전부인 기무라가 뭔가 좀 배우로서의 새로운 돌파구나 해외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이 영화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납득할 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캐릭터로 대체 뭘 얻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엑스트라로 전락했던 '2046'의 경험에서 별로 배운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병헌이 첫 할리우드 진출작인 '지아이조'에서 주목을 끌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이나 감독보다 캐릭터의 힘이 컸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감독이 뭘 보고 그런 캐릭터를 맡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이병헌은 기무라 다쿠야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장점을 갖고 있죠. 영어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영어 대사를 들어 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영어 실력이 배우로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자국어로 연기하는 배우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도 당연히 아닙니다(꼭 이런 헛소리를 하실 분이 있을 것 같아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굳이 '해외 진출'이라는 걸 원한다면, 아무래도 영어 실력은 필수일 듯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괴성을 지르는 벙어리 연기 외에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교훈 중 하나라고나 할까요. 해외 진출을 꿈꾸고 있는 연예인이라면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제목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성경 구절이 아닐까 했는데 딱 맞는 구절이 없더군요. 이사야 55장이나 에제키엘(에스겔) 13장에 뭔가 끌어다 붙일 수 있는 구절이 있긴 합니다만... 딱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역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As the rain and the snow come down from heaven, and do not return to it without watering the earth and making it bud and flourish, so that it yields seed for the sower and bread for the eater, so is my word that goes out from my mouth: It will not return to me empty, but will accomplish what I desire and achieve the purpose for which I sent it (이사야 55:10,11 - 해석은 공동번역)


블로그 방문의 완성은 한방의 추천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