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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시청률 선두를 달리고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일러주는 현상이라고 할만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부'와 '공부법' 혹은 '명문대 입학'에 관심이 많은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일각에서는 이 드라마를 사회악의 근원처럼 규정하곤 합니다. 혹자는 김수로가 연기하는 강석호 변호사의 말이 독설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이라고 말하곤 하죠.

반대 논리는 말 자체로는 그럴듯합니다. 지금도 입시 지옥에다 과잉 경쟁으로 자살까지 하는 학생들도 나오는 판에 더 시험 시험 하는게 말이 되는 얘기냐, 그리고 결국 구조적으로 잘사는 집 애들이 좋은 대학 가는게 훨씬 유리한 상황에서, 공부 공부 하는 드립으로 '네가 좋은 대학 못 가는 건 네가 노력 안 해서 그런거야'라는 식으로 호도한다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들이 모두 맞는다고 일단 인정해 봅시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현실이 그러니 그냥 손 놓고 공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게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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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써 놨던 얘기부터 한번 리뷰해 보겠습니다. 그냥 고리타분한 얘기만은 아닙니다.

제목: 공부의 신

공부에는 왕도가 있을까. 이 답은 공부를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시험 공부’로만 한정한다면 답은 ‘있다’로 바뀐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으로는 17세기 시인 김득신이 첫손에 꼽힌다. 베스트셀러였던 『미쳐야 미친다』에 따르면 김득신은 ‘백이전’을 11만3000번 읽은 것을 비롯해 유가의 주요 경서들을 거의 수만 번씩 읽었다고 전해진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을 지나치게 충실히 이행한 셈이다.

하지만 다산 정약용은 이런 공부 방법에 고개를 저었다. ‘하루에 100번씩 3년 꼬박 읽어야 10만 번인데 그 많은 책을 모두 만 번 이상 읽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는 이유다. 다산은 또 증언(贈言)을 통해 제자들에게 과거 볼 것을 적극 권유하면서 시험용 공부법을 일러 주기도 한다. 고문(古文·고전)에서 시작해 그 다음엔 이문(吏文), 그 다음엔 과문(科文)으로 나아가야 빠르다는 것이다. 이문은 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쓰이는 중국식 문장, 과문은 과거 시험용 문장을 말한다.

심지어 다산은 ‘(공부에 있어)너희들은 쉬운 지름길을 택할 것이요, 울퉁불퉁하거나 덩굴로 뒤덮인 길로는 가지 말라(諸生須求捷徑去 勿向犖确藤蔓中去)’는 말까지 했다. 좋은 성적을 내는 요령이 있다면 따르기를 피하지 말란 얘기다.

요즘 KBS 2TV 드라마 ‘공부의 신’이 화제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교사도 아닌 변호사 강석호(김수로)가 다섯 명의 열등생을 조련해 1년 안에 국립 명문대인 천하대(말하자면 서울대)에 합격시키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작된다. 일각에선 학력만능주의와 사교육 열풍을 부추긴다며 비판하지만 학부모들은 ‘룰에 불만이 있으면 룰을 만드는 사람이 돼라’는 강석호의 독설에 ‘부모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준다’며 성원을 보내고 있다.

물론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천하대에 간다 해서 그다음의 인생이 공짜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지도할 것이 성적 향상뿐일 리는 없다. 하지만 별 희망 없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라’고 가르치는 드라마를 놓고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고 지적하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정작 고쳐야 할 것은 명문대를 나와서도 다시 로스쿨이나 치의학전문대학원에 줄을 서게 하는 진짜 세상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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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이기 때문에 못 다 들어간 설명을 덧붙입니다. 증언(贈言)이라는 것은 여유당전서의 다산시문집에 전하는 다산 정약용의 문건 중 '제자들에게 주는 글'이라는 부분을 말합니다.

유배를 간 다산이 현실 정치에 대한 염증을 드러냈을 것도 당연지사. 다산이 이렇게 되는 걸 본 후학들에게도 현실은 멀리 하고 싶은 대상이었을 것 역시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산은 학문에만 틀어박혀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는 길을 택하라고 후학들에게 권유합니다.

魯之?鄒之翁。當危亂之世。猶復轍環四方。汲汲欲仕。誠以立身揚名。孝道之極致。而鳥獸不可與同?也。今世仕進之路。唯有科擧一蹊。故靜菴退溪諸先生。皆以科目拔身。誠知不由是。卒無以事君也。

노(魯) 나라의 공자와 추(鄒) 나라의 맹자께서는 위란(危亂)의 세상을 당하여서도 오히려 사방(四方)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벼슬하려고 급급하였으니, 진실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이 효도의 극치이고, 새나 짐승과는 함께 무리 지어 살 수 없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란 과거(科擧) 한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ㆍ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 등 여러 선생들께서도 모두 과거를 통하여 발신(拔身)했으니 그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끝내 임금을 섬길 방도가 없음을 알겠다.

즉 배운 사람으로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불만이 있으면 직접 조정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희가 룰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강석호 아저씨의 말과 본질적으로 같은 얘깁니다.

심지어 한발 더 나아가 다산은 '과거를 보는 데 가장 효율적인 공부법'까지도 소개하고, 위에서 보듯 시험 준비를 하는데 있어 지름길이 있으면 지름길로 가라고 권유하기도 합니다. 흔히 '첩경'이라는 말을 무슨 반칙처럼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조언을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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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다산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했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실 분들에게 질문합니다. 강석호가 강당 가득 모인 병문고 학생들에게 외치는 '너희같이 모자란 놈들일수록 명문대를 가야 한다' '평생 똑똑한 놈들에게 이용만 당하지 않으려면 너희도 공부해라' '이 세상의 룰이 마음이 들지 않으면 너희가 직접 룰을 만드는 편이 되어라'라는 말이 기득권의 메시지를 그대로 설파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럼 '그것이 기득권의 논리이기 때문에' 버려야 하는 주장이라면, 대체 학교에서 학생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 외에 뭘 할까요. '공부의 신'이 전교생 모두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드라마일까요? 그리고 만약 공부 외에 다른 무엇을 선택하는 학생이라면, 입시 준비를 하는 만큼의 노력 없이 성공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요?

지금까지 나온 정부의 교육 정책 중에는 솔직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많았습니다. 시험이 어려워서 공부하느라 자살하는 학생이 나온다고
입시 문제를 쉽게 냈습니다. 평균 점수는 올라갔지만, 변별력이 없어지고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 오히려 손해를 봤습니다.

대학 가기 어려워서 좌절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대학 수를 대폭 늘렸습니다. 방방곡곡에 대학이 생겼고, 대학에 가고 싶은데도 경쟁에서 뒤처져 못 가는 학생은 대폭 줄었습니다. 심지어 몇몇 대학은 입학생이 모자라 문을 닫을 지경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대졸자가 다 취업할 곳은 없었습니다. 우편 집배원이나 환경미화원에도 대졸자가 지원하는 나라가 정상일까요?

공부 공부 하는 사람들이 학교를 입시학원으로 만든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경쟁은 좋은 대학 가려는 학생들만 하는게 아닙니다. 적성에 안 맞는 공부보다 즐겁고 좋은 노래와 춤을 연습한다 해서 모두 소녀시대나 2PM 멤버가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일이든, 어떤 직업이든 남들보다 더 잘 하려는 의지는 반드시 경쟁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든 남들보다 더 잘 하는 사람은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뭐든 좀 더 잘 해보려는 의지가 없다면, 남보다 못한 대우도 감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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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원하는 대로 여론에 따르면 곤란하다? 10대들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자? 10대들에게 국민투표를 시키면 '모든 대학을 평준화하고 입시 없이 대학가게 해 달라'는 것이 아마 9대1 정도로 통과될 겁니다. 과연 그런 나라가 좋은 나라일지는 정말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노벨상을 받을 만한 석학도, 어떻게 교수가 됐는지 의심스러운 사람도 모두 고등학교 한 반처럼 1등부터 꼴찌까지 천지 차이가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이 좋은 대학일까요.

저는 좀 의심스럽습니다. '부잣집 아이들만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교육 열풍'도 잡아야 하고, 그렇다고 '학교를 입시학원으로 만들어서도' 안 되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너의 인생에 좀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얘기해서도 안 되고, 그래도 '국가 경쟁력을 위해 인재는 양성해야' 한다면(네. 낱개로 흩어 놓으면 모두 '지당하신 말씀'들입니다), 대체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정말 궁금합니다.

정작 먼저 고쳐야 할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내놔야 할 인재들이 엔지니어로는 미래가 없다고 한의대나 의대, 치의학 대학원에 다시 줄을 서거나 외국 회사로 빠져나가 버리는 세상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의대 커트라인이 다 끝난 다음에 서울대 공대 커트라인이 시작되는 세상이죠. 인문계 학생의 대다수가 '고시에 붙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거나, 고시 합격을 하지 않으면 공무원이라도 되어야 한다고 목을 매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바꾸지 않고 아이들에게 '공부가 전부가 아니다'라고 백날 얘기해 봐야, 지레 포기하거나 너무 어린 나이에 스스로를 루저로 규정하는 사람들만 늘어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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