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하녀'가 관객 동원 1위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이지 '하녀'가 '로빈 후드'와 '아이언맨2'를 제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요. 칸 영화제와 관련된 마케팅의 힘은 무섭더군요. 물론 1960년작 '하녀' 때문은 아닐 것이고, 아무튼 막강한 부를 지닌 남자와 그 집 하녀 사이의 불륜이라는 소재는 상당히 관객을 끌어들일만한 요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2010년작 '하녀'에 대해서는 다양한 호평과 혹평이 흘러다니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평은 '배우들은 잘 했는데 영화가 갸우뚱'이라는 식이더군요. 개인적으로 임상수 감독의 2010년작 '하녀'를 본 느낌의 요약은 '참 잘 만들어진 블랙코미디'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어떤 극적 긴장감이나 스릴러의 느낌을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실망했겠지만, 그것이 실소든 폭소든 보고 있으면 꽤 많이 웃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강 다 아시겠지만 줄거리 요약부터 하자면-

식당 보조로 일하던 은이(전도연)는 어느날 대단한 집안의 수석 가정부인 조여사(윤여정)에 의해 입주 가정부로 채용됩니다. 들어간 집안에는 훈(이정재)과 만삭의 혜라(서우) 부부, 그리고 이들의 딸인 나미가 살고 있습니다. 은이의 역할은 주로 나미의 육아 부분에 집중되고, 은이는 나미와 급격히 친해지면서 입주 가정부의 나날에 만족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조여사를 뺀 나머지 네 사람이 겨울 휴양차 온천장을 찾은 밤, 거의 나신으로 잠을 자던 은이 앞에 훈이 나타납니다.

영화가 개봉된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그냥 영화를 소개하는 걸로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에 대한 의견은, '블랙코미디로 소비하실 분은 보셔도 무방하다' 정도입니다. 뭔가 더 대단한 상징이나 보물을 찾는 분들이라면 다소간 실망하실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특히 신기하게도 남성 관객들보다는 여성 관객들의 만족감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포일러가 싫으신 분들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이나, 절대 이 영화를 안 보실 분들은 계속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은 지금 떠나시기 바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는 은이가 일하던 식당의 먹자골목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아줌마'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같은 여자들이지만 '아줌마'들은 일하고, '아가씨'들은 다양한 형태로 젊음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아가씨' 들중 많은 수가 저 일하는 '아줌마'들이 될 것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사실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아줌마'들은 '아가씨'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젊은날을 돌이켜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가씨들에게 있어 아줌마들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문득 패륜녀 사건이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은이는 식당에서 일한 마지막 날 밤 한 여자가 투신자살하는 사건을 접합니다. 이 사건을 접한 은이의 반응은 "우리도 구경갈까?"입니다. 그 여자가 왜 뛰어내렸는지, 죽어서 안타깝다든지 하는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거듭 거듭 강조되듯, 은이는 '둔한 여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의 살의 아픔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은이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그런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녀'는 은이에 대한 단죄의 드라마입니다. 인생을 민감하게 살지 못한 죄, 자신에게 닥쳐온 중대사들의 의미를 너무 쉽게 판단한 죄,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생각해보지 않은 죄, 도덕적이지 않은 유혹에 그냥 쉽게 대처하고 즐긴 죄(다시 말해 '제때 반항하고 항의하지 않은 죄'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 영화의 이런 요소들이 남자들보다는 여성 관객들을 더욱 불편하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은이가 하층민의 상징이라면,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의식화되지 않은 기층 계급에게 대단히 냉혹한 시선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시선은 1차적으로 '부자들이란, 혹은 상류층이란 더럽고 냉혹하고 아더매치한 것들'이란 것이지만, 2차적으로는 '상황이 이 꼴이 되게 만든 건 너희들의 방관과 무관심, 비겁함과 안이함'이라고 비웃고 질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은이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잘생기고 매너 좋고 피아노도 잘 치는 멋진 젊은 주인장에게 아침 식사를 날라도 주고는 저도 모르게 주인장이 치는 피아노 소리에 발장단을 맞춰 보기도 할 정도로 즐겁습니다. 나미는 귀엽고 똘똘한데다 착하기까지 합니다. 맛난 음식도 좋고, 아마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대우도 부족하진 않았을테죠.

다만 감수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하녀'라는 것을 상기시키듯 혜라는 은이에게 손발톱 관리와 속옷 빨래까지 시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이는 처지를 비관하지 않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은이는 훈의 '웁스'를 들은 날 이후 줄곧 그가 자기를 덮쳐올 날을 기다렸던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은이에게 '빨아!'라고 명령한 뒤, 양 팔을 벌리고 자아도취의 끝을 연기하는 이정재의 표정입니다. 훈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있어 스무마디의 대사보다 효과적인 장면이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은이는 훈과 몇차례 정사를 벌이는 동안 한번도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몸짓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훈이 수표를 줬을 때 급격히 실망하는 표정을 지을 정도입니다. 대체 은이는 훈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요. 그렇게 잘난 남자가 나에게 매혹됐다는 판타지가 끝까지 지속되기만을 바란 것일까요. 아무튼 이 영화 속의 은이는 확실히 '즐기고' 있습니다.

남의 남편과 정을 통해 아이까지 배고도 은이의 태도는 맹하기 짝이 없습니다. 잘못했다며 맞고 반항도 않고, 무릎까지 꿇으면서도 아이를 포기하란 말에는 '모르겠어요...'라는 식으로 대응합니다. (역시 이 대목에서 "아니 다들 그걸 어떻게 아시고..."라는 은이의 맹한 대사 한마디는 폭소를 자아냅니다.)

그러니까 은이에게는 그냥 사랑스러운 자식일 뱃속의 아이가 '그들'에게는 장차 수백억의 재산이 왔다갔다하는 큰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은이는 전혀 짐작하지 못합니다. 관객들이 이렇게 꽉 막힌 은이를 답답해 하는 동안 제 귀에는 '내가 보기엔 당신들이 더 답답해(혹은 당신들이 딱 저래)'라는 임상수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기본 설정을 빼면 임감독이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에서 가져온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굳이 리메이크라고 할 것까지도 없고, 그냥 based on 정도라면 딱 적절할 겁니다. 1960년의 하녀가 너무 바보같으면서도 때론 영악하고 과격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캐릭터였다면, 2010년의 하녀는 너무나 어리숙하고 맹해서 사리분간을 못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인공인 '하녀(혹은 가정부)'가 더욱 멍청하게 보이는 건 '주인집 가족'들이 그만큼 더 진화했기 때문일 겁니다. 대단히 머리 회전이 빠른 조여사가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주인집 가족들의 일처리와 판단은 눈부십니다.

딸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위의 씨앗을 초전에 제압하려는 혜라 엄마(박지영 - 아직 미모가 싱싱한 40대 여배우가 '나미 할머니'로 등장하는 건 정말 클린 히트입니다)의 전략이나, "그 여자 절대 애 포기 안 해"라는 혜라의 판단에는 한치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모녀도 훈의 상대는 되지 못합니다. 하룻밤 불장난을 빌미로 사위의 기를 죽이려던 혜라 엄마의 시도는 "당신 딸이 낳아야 내 자식인 줄 알아?"라는 훈의 반격 앞에 산산히 부서지고, 오히려 혜라와 혜라 엄마가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한마디로, 정말 대단한 고수들인 거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고도로 진화한 '있는 자들'을 상대하는 건 애당초 은이에겐 절대로 무리. 결국 뒤늦게 '찍 소리라도 내고 싶다'며 반항에 나선 은이에겐 카드가 별로 없습니다. 어차피 목숨은 포기할 참이었지만, 불까지 붙는 건 정말이지 계산 밖의 일이었던 것이죠. (이 대목에서 용산 참사가 생각난다는 분도 있었습니다만, 만약 그렇다면 좀 너무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코미디 영화라니까요.) 물론 대 저택에는 스프링클러가 있고, 은이의 죽음이 바꿔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왜 마릴린 먼로가 조명을 받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로버트 인디애나의 그림이나, 서우가 패러디하는 마릴린 먼로의 해피 버스데이 송은 대체 왜 삽입된 것일까요. 그저 마릴린 먼로의 비극적인 운명도 권력의 속성에 대한 무지와 철없는 방종으로 인한 자업자득이었다는 정도의 비유라면 좀 싱겁습니다만, 그 밖의 어떤 의미가 숨어있다면 그 또한 생뚱맞을밖에요. 혹시 허공에 뭐라도 있는 듯 화면 바깥쪽의 왼쪽 하늘을 바라보는 나미의 눈동자는 무엇을 향해 있는 것일까요. 은이의 망령이라도 거기 있는 걸까요?

요약하자면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굳이 '사회 비판'이라는 흔한 말 보다는 임 감독이 대략 뚱그려서 진보 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에게 보내는, '농담과 자조 섞인 조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뭔가에 대한 분노와 극복의 의지보다는 '허허'하는 웃음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쩔 것이냐. 상대는 저렇게 날로 똑똑하고, 강해지고 있는데 당신들은 대체 어쩔 것이냐'는 식의....

그래서 이 블랙코미디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다만 그 이상의 기대는 금물.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다들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건 이정재라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이 영화가 원하는 나르시즘을 몸에 밴 듯 표현해 낸 솜씨는 최고였다고나... 혹은 적절한 캐스팅의 힘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S.2. 개인적으로는 임상수 감독이 여기 저기 심어 둔 암호들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베토벤의 '템페스트',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 'La Mamma Morta', 안데르센의 동화 '어느 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위에서 얘기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마릴린 마릴린'과 서우의 패러디 등은 모두 줄거리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들을 여기서 다 하기엔 너무 길듯하고, 다른 포스팅으로 만들겠습니다.

P.S.3. 그런데 어쨌든, 이 영화가 이렇게 관객몰이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다른 분들은 과연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셨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흥미로우셨으면 왼쪽 아래 손가락 표시를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아실수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