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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1986년, 사실상 처음으로 '제대로' 예선을 통과해 한국이 월드컵 무대를 밟았을 때만 해도 모든 여론과 언론은 '16강 가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가공할 대진운과 한국의 실력으로 볼 때 그건 정말 무리하고 무모한 목표였습니다.

그로부터 24년이 흘렀고, 한국 축구는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 사이 한번도 빼놓지 않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2002년에는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해에 4강에 가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할 때 과연 한국이 세계 4강권의 실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하려는 얘기는 이겁니다. 이제 4강도 가 봤고, 4강이 진짜 실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번에 원정 경기에서 16강에 올랐으니 할 말이 있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국제적으로 '축구 좀 하는 나라'라고 주장할 근거가 생긴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월드컵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축구 팬'들도 좀 달라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대체 16강이란게 뭐길래 이렇게 들썩들썩 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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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체 왜 본선 진출도 16강에 이렇게들 흥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신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16강이라는게 뭐가 어떻게 의미가 있는 건지도 별로 고민 안 해보셨을 겁니다.

한번 궁금해서 예전에 16강에 가 본 나라들이 얼마나 되는지 세 본 적이 있습니다. 산술적으로 하자면, 지난 1986년부터 2006년까지 6개 대회에서 16강에 오른 나라들은 모두 96개국입니다. 그런데 아주 당연히, 중복 출전한 나라들이 있기 때문에 그 수는 꽤 적습니다. 모두 40개입니다.

독일, 스웨덴, 스위스,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잉글랜드,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덴마크, 벨기에, 터키, 아일랜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소련, 노르웨이, (이상 유럽),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칠레, 에쿠아도르, 콜롬비아(이상 남미), 멕시코, 미국, 코스타리카(이상 북중미), 카메룬, 가나, 나이지리아, 모로코(이상 아프리카), 한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호주(이상 아시아).

이중 13개국은 단 한번밖에 기록에 남지 않았습니다. 2번 이상 16강에 들어 본 나라가 27개국입니다. 즉 이 27개국은 어디 가도 국가대표 대항전에서 세계 16강에 올랐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죠. 27개면 250개에 달한다는 피파 회원국 중에서 대략 상위 10%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충분히 자랑할 일인 겁니다.

그러니 16강에 한번도 못 가본 나라들은 지금 열거한 40개 정도의 나라들 사이에 끼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저 40개의 나라들은 더 나아가서 '웬만하면 8강 안에 드는 나라'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당장이라도 꼽을 수 있는 축구 TOP 10의 나라들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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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16강에 오름에 따라 한국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16강에 두번 이상 오른 나라'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게 두번, 세번이 되면서 '8강에도 수시로 오를 수 있는 나라'가 되겠죠.

이 정도가 축구를 하는 나라로서는 최고의 영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축구의 세계에서 강국으로서의 인정은 한 대회에서 얼마나 반짝 잘 했느냐보다는 얼마나 자주 16강이나 8강에 올랐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 그런 일이 있다는 건 그 나라 축구가 한두명의 기린아에 의해 좌우되는게 아니라, 혹은 어쩌다 대진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강하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가능하면 개최국이 아닐 때의 성적이 좋겠죠.^^)

한국인은, 혹은 동양인은 다리가 짧아서, 키가 작아서, 체력이 약해서, 유연성이 없어서 안된다고 하셨던 분들도 많았지만 그런 분들은 아마 한국이 월드컵 16강에 오른다는 것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AS 모나코에서 한국 선수가 뛴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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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선수 저변입니다. 아르헨티나와 상대할 때 많은 사람들이 '저쪽은 박지성이 11명'이라고 했습니다. 틀린 얘깁니다. 저는 "19명의 박지성과, 3명의 골키퍼와, 1명의 메시가 있는 팀"이라고 봐야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리스전에 아르헨티나가 1.5군을 내보낸다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같은 팀에서의 1.5군과, 다른 나라의 1.5군을 비교한다는 건 넌센스죠. 예전에 '브라질이 영국처럼 네 팀을 내보내면 어떻게 될까'라는 우스개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답은 '월드컵 결승에서 브라질 1진과 2진이 붙는다'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단 1명의 박지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뛰어난 선수 뒤에, 탈 아시아 수준의 선수들도 있고 국제 무대에 내놓기에는 좀 민망하지만 어쨌든 국내에는 그보다 나은 선수가 없어서 대표팀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번째 경우의 선수들이라 해도, 어쨌든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판단하기에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출전시키는 거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이런 선수단이 나아가 11명의 박지성으로 베스트 일레븐이 채워지고, 그 뒤로 23명의 선수단이 박지성급으로 채워지는 날이 오면, 그제서야 메시 같은 당대의 에이스가 한국 팀에 등장하게 될 겁니다. 이걸 한 순간에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16강은 대단하고 의미있는 성과였고, 미래를 향한 중요한 한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또 이런 대목에서 축구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은 그냥 인생의 재미 하나를 놓치고 사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뭐 그 분들에겐 월드컵보다 중요하고, 훨씬 재미있는게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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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N에서 이번 경기의 MVP를 박주영으로 꼽았다던데, 박주영의 프리킥이 그린 아름다운 궤적도 환상적이었지만 뭐니뭐니해도 이날 한국을 16강에 끌어올린 주역은 박지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전방에서 최종수비진까지, 안 가는데가 없더군요. 심지어 상대 공격 실패 후 흘러나온 공을 전방으로 걷어내는 것도 최종수비수가 아니라 박지성이라는 건(이건 최종수비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지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위에서도 얘기했듯, 우리가 이 시점에서 박지성 같은 선수를 보유하게 된 건 지난 86년 이후, 또는 지난 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국가대표 축구를 육성시켜 온 수많은 공로자들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우연히 박지성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 5년 뒤, 혹은 10여년 뒤에 우리 국대의 1진이 11명의 박지성으로 짜여질 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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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아침 올라온 응원샷 중 최고의 장면입니다. 아주머니 만세!


P.S. 이번 월드컵 들어 (1) 대진운 아주 좋다 (2) 그리스가 한건 해주길 빌어야 한다 (3) 1승1패 이후 16강 전망 밝다 (4) 박주영이 나이지리아전에서 한건 해준다 모두 대략 얼추 적중하고 있어서 매우 고무돼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 더 해볼랍니다. "덴마크, 16강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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