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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라는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가 대략 이러이러하게 흘러가겠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예측은 거의 틀릴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구 영화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스토리라인은 예상을 벗어나기 힘들 수밖에 없고, 또 충주 성심학교라는 실제 청각장애인 고등학교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그렇습니다. 거기에 '강우석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죠.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정해진 길로 다니는 지하철처럼 '뻔한 영화'인 것이 분명한데도 '글러브'는 여전히 위력적인 상품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강철처럼 심장이 단련된 사람들이라 해도 '글러브'를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이것이 분명 '덜 가공되었기 때문에 더 감동적인' 것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세 차례나 MVP에 올랐던 한국 프로야구의 간판이었지만 이제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인 투수 김상남(정재영)은 여러 차례 누적된 음주 사고로 선수 생활이 끝장날 위기에 놓입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매니저 철수(조진웅)는 왕년의 은사인 KBO 상벌위원장의 주선으로 상남을 충주 성심학교로 보내 코치 자원봉사를 하게 합니다.

'전국대회 1승'이라는 이들의 목표를 보고 코웃음을 치던 상남. 하지만 교감(강신일)과 나선생(유선), 열명밖에 안되는 아이들의 열정은 상남을 움직이고, 결국 상남은 아이들이 봉황대기에 나가 진짜 고교야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뻔할 뻔짜의 스토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중간 중간 들어가는 70년대풍의 닭살 대사 또한 무척 거슬립니다. 인물들은 전혀 발전이 없습니다. 두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동안 카메라는 상남-나선생-상남-철수-상남-교장선생-상남-아이들 사이를 계속 오가지만, 카메라 밖의 시간은 아예 정지해 있습니다. 어떤 상상력도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보여지는 것이 전부이고, 꽤 긴 상영시간 동안 스토리의 진행은 하품이 날 정도밖에 진전되지 않습니다.

특히 최악의 캐릭터는 유선이 연기하는 나선생입니다. 이 역할은 스토리 진행(그나마)을 위해 철저하게 희생되는 듯 합니다. 상남이 아이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냉정하게 굴면 "아이들은 어쩌구요?", 상남이 화를 내면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상남이 유난히 아이들을 살뜰히 챙기는 나선생을 보며 "이건 숫제 엄마구만"하고 빈정대면 보살같은 미소를 지으며 "전 그냥 이 아이들이 좋아요(네. 정말 2011년 한국 영화 최악의 대사로 꼽힐 만 합니다. 1960년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입니다)", 아이들이 지쳐 쓰러져가면 "이제 그만해요!"하고 울부짖는 역할이죠.



그야말로 '전형성 100%'의, 뻔하디 뻔뻔뻔뻔뻔한 캐릭터입니다. 시나리오 공모전 심사위원이 공모작에서 발견하면 빨간 줄로 북북 그었을 것 같은 캐릭터죠. 이런 캐릭터이니 유선 아니라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자 헬렌 미렌을 데려다 놔도 제대로 된 연기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말 편집 과정에서 완벽하게 들어 내도 영화의 흐름에 아무 지장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이런 캐릭터가 대사량은 전체 출연진 가운데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많다는 건 이 영화의 성격을 제대로 말해 주는 요소입니다. 이런 쓸데 없는 대사와 감정 전개로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정작 있어야 할 아이들과 상남의 관계나 아이들 서로간의 관계 같은 건 그냥 휙휙 넘어 갑니다. 본래 시나리오에도 없었는지, 아니면 찍어 놓고 다 들어 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완성된 영화에서 관객은 "여러분 대략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하시죠? 네. 맞아요. 자, 그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수준의 내용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 결과 투수 역의 장기범이나 포수 역의 김혜성 등 열명의 선수들은 거의 존재감이 없습니다. 김혜성의 러브라인이 잠시 눈에 띌 뿐, 최소한 각각의 아이들이 어떤 캐릭터인지 비쳐질 기회는 전혀 없죠. 그냥 '선수 1, 선수 2, 선수 3....'일 뿐입니다.



또 '명색이 야구 영화인데 야구 장면을 보여줘야지' 라는 강박관념도 높은 점수를 보기 힘듭니다. 세 차례의 야구 경기 장면이 나오는데, 첫 경기와 둘째 경기는 크게 무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만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세번째 경기는 아무리 봐도 너무 길고, 너무 산만합니다. 엄청나게 긴 시간에 걸쳐 그 많은 커트를 찍기 위해 고생했을 양팀 선수 역의 배우들과 스태프에겐 참 미안한 얘기지만, 대체 왜 이렇게 긴 경기 장면, 그것도 수없이 똑같은 시퀀스가 반복되는 장면이 필요한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엄청나게 긴 반면, 야구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이 봐도 엉성한 진행이 너무나 눈에 띕니다. 손톱이 갈라져 피를 흘리면서도, 정규 이닝에서만 120개 넘게 던지고, 연장전에 들어가 4이닝을 더 역투하는 투수.... 이 정도가 되면 난타를 당하건 말건 다른 선수 중 누군가를 마운드에 올려 놨어야 합니다. 게다가 연장 13회, 전광판을 보면 양팀의 안타 수는 25대27이더군요. 아무리 난타전을 치렀다지만 이건 좀 아니죠. 또 아무 맥락 없이 왜 명재가 SF볼을 던지는지,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왜 상남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지 등등은 계속 영화의 구멍으로 남습니다.



뭣보다 '왜 봉황대기인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없습니다. 봉황기는 한국 고교야구 대회 중 유일하게 지역 예선이 없는 대회죠. 다시 말해 성심학교로서는 (지역 예선을 통과할 수 없는 실력을 감안할 때) 유일하게 서울에 올라와 참여할 수 있는 전국대회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 또한 전혀 없습니다.

(더 지적하자면, 이들의 목표는 '전국대회 1승'이지만 봉황대기에서의 1승은 다른 대회 지역예선에서의 1승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예선 없이 야구부가 있는 학교면 모두 참가할 수 있는 전국대회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굳이 '전국대회 1승'이라고 포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전국대회 1승'이 '지역 예선을 통과한 수준 높은 팀들을 상대로 한 1승'이란 의미라면 청룡기나 대통령배같은 다른 대회 이름을 댔어야죠.)



이 영화의 주역 가운데 유일하게 칭찬할만한 사람은 정재영 하나뿐입니다. 그조차도 영화 전반부에서는 너무나도 전형적이라 짜증나는 캐릭터에 매달리지만, 이 영화를 대표하는 대사인 "정말 무서운 적은 우리를 동정하는 놈들이다!" 장면에서 정재영이라는 배우는 한껏 빛을 뿜습니다.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는 여럿 있겠지만, '글러브'에서 상남 역을 맡아 이 대사를 이런 분위기로 해낼 수 있는 배우는 역시 정재영일 겁니다. 그 밖에도 영화 전편을 통해 영화에 생기를 불어 넣는 사람은 정재영뿐입니다.



이런 저런 내용을 생각해 볼 때 영화의 완성도는 후하게 줘야 70점을 넘기 힘듭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는 겁니다. 너무나 뻔한 눈물 코드인데도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참기는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영화를 '더 잘' 만들면 더 많은 눈물이 날지, 아니면 대략 이 정도의 완성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더 큰 것인지, 저는 아직 이런 부분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대략 이 영화의 내용을 짐작하고, 이런 영화가 던져줄 수 있는 감정의 격동을 원하는 관객에게 '글러브'는 최적의 선택입니다(절대 비아냥거리는게 아닙니다. 정말 눈물이 납니다).

아쉬운 점은 많지만, 어쩌면 그런 아쉬움은 애당초 지하철을 설계한 감독에게 왜 포르셰 스포츠카를 내놓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바보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가 바로 '글러브'입니다. 지하철에겐 지하철의 미덕이, 스포츠카에겐 스포츠카의 미덕이 있는 법이죠. 그리고 사람이 더 많이 탈 수 있는 쪽은 역시 지하철인지도.




P.S. 이 만화 수준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를 기대한 건 너무 과욕이었을까요. 그와 관련된 얘기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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