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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는 김장훈의 '오페라, 오페라, 오페랄랄랄라'를 떠올리고, 그 다음에는 뚱뚱한 아저씨가 뚱뚱한 아줌마의 없는 허리에 간신히 짧은 팔을 감고 희노애락을 가늠할 수 없는 우렁찬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가끔 오페라를 보러 간다든가, 오페라 dvd를 샀다든가 하는 말을 하면 별 희한한 짓거리를 한다는 얘기가 듣기 싫어 아예 얘기를 하지 않는게 보통입니다.

지난 주말, 호암아트홀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HD 영상에 담은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을 봤습니다. 아시다시피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첫날 밤에 해당하는 작품이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최근 들어 그 시즌 무대에 올려졌던 작품을 그대로 HD 영상으로 제작,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극장에서 상영하게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메가박스가, 그리고 연말부터는 CGV에서 이 시리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관람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체 진짜 오페라도 아니고, 영상물을 극장에서 보는데 가격이 2만5천원이면 너무 비싼 게 아니냐. 두 사람에 5만원이면 오페라 DVD를 두 장은 살 수 있다. 맞는 말이지만, 오페라 DVD를 집에서 보는 것과, 극장에서 보는 것 사이에는 영화를 집에서 보는 것과 극장에서 보는 것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네. 사실 저도 몰랐습니다만, 그런 차이가 '있더군요'.)

그리고 DVD는 그리 '최신 공연'이라고 보기 힘든 영상을 보여줍니다. 이 메트 오페라 시리즈처럼 2010년 시즌의 공연을 곧바로 전 세계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DVD 발매가 빠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오페라가 이런 강점을 가질 수는 없죠. 브린 터펠이나 로베르토 알라냐, 안나 네트렙코, 마르첼로 알바레스 같은 최고의 스타와 최고의 무대 기법이 동원되는 메트 오페라니까 이런 식의 상품화가 가능할 겁니다.

또 한가지, 다른 메트 오페라와 다른 점은 바로 바그너의 '링' 시리즈였다는 점도 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냥 오페라가 멜로드라마라면 바그너 오페라는 블록버스터라고 해야 할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재 연출가라는 로베르 르파쥬(Robert Lepage)의 손길이 닿은 무대는 정말 살아 움직입니다.

막이 오른 뒤 첫 장면은 '라인의 황금'의 상징인 세 라인 강의 처녀들(Rhinemaiden)의 등장입니다. 이 첫 장면은 바그너 당대부터 상상력을 동원한 연출이 이뤄졌던 장면이죠.

현대로 오면서 다양한 연출이 이뤄졌습니다. 뭐 이를테면 이런 식도.

그런데 이렇게 깊은 강물 속에서 노래하는 세 처녀(인어)의 모습을 형상화한 건 정말 획기적입니다.

그리고 저 세 처녀가 헤엄치는(사실은 매달린) 저 벽. 저 벽에 이 무대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보통 벽이 아닙니다.

때론 동굴의 천장과 바닥으로,

때로는 계단으로,

그리고 이런 성벽과 무지개다리로 변신합니다.

이런 식으로 초대형 철골 무대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시각적인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무대의 무게만 45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구조가 버티지 못할까봐 보강 공사를 거쳐 선보이는 무대입니다.


첨단 기술을 이용한 무대 장비와는 반대로 의상은 완전히 복고풍입니다. 1870년대 초연 때의 의상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바그너 극 의상과 모더니즘이 빛나는 차가운 알루미늄 성벽으로 장식된 무대. 놀라운 조화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오페라인 만큼 '음악'과 '노래'에 대한 평이 있어야겠지만 제가 그럴 주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21년 전에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무대에 올렸던(DVD도 나와 있죠) 제임스 레바인인 만큼 음악적으론 흠잡을 데가 없어 보입니다. 특히 당대의 베이스 바리톤 가운데 브린 터펠보다 나은 보탄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


'라인의 황금'에 나오는 보탄은 북구 신화의 주신 오딘의 다른 이름입니다. 주신이고 신들의 아버지이긴 하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는 전혀 다른 신격입니다.

제우스(주피터)와 보탄(오딘)의 차이는 이미 유럽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던 일입니다. 요일의 이름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수요일은 보탄의 날, 그리고 목요일은 보탄의 아들이며 번개의 신인 쏘르(토르, '니벨룽의 반지'에는 도너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의 날입니다. 그런데 이 요일의 이름이 영미권에 전해지면서 수요일은 수성(머큐리/헤르메스), 목요일은 목성(주피터/제우스)의 날로 번역됩니다.

상식적으로는 보탄=제우스여야겠지만 남쪽 유럽 사람들은 보탄과 머큐리를 상업의 보호신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쏘르와 주피터를 번개의 지배자라는 공통점으로 묶은 것입니다. 그만치 보탄은 점잖고 권위 넘치는 주신이라기보다는 재기발랄하고(?) 사기성이 농후하지만(?) 계약에는 놀라울 만치 엄격한 신입니다. 심지어 그 자신의 사기성(?)을 보강하기 위해 나중에 신들의 멸망을 가져오는 사악한 불의 신 로키(역시 바그너 악극에는 로게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를 늘 달고 다니는 신입니다.

아무튼 바그너의 악극에 나타나는 보탄은 신이라기엔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이 뚜렷한 신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적인 약점이 결국은 신들의 몰락을 낳는 단서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라인의 황금'은 4부작의 서막이면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작품답게, 나머지 세 작품의 스토리에 복선을 깔아 두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아무튼 '라인의 황금', 정말 못 봤으면 크게 후회할만큼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몇달 뒤 국내에서도 볼 수 있게 될 '발퀴레'에서는 이런 장면(바로 위 사진)까지 연출된다니 도저히 아니 볼 수가 없겠습니다.^^

P.S. 이런 무대를 직접 본다면 더 멋지겠지만, 개인적으로 저라면 HD 영상으로 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비싼 표를 사서 실연 무대에 간다 해도 90%의 관객은 배우의 얼굴 표정조차 보기 힘들죠. 그런 의미에서 HD를 통한 오페라 관람은 오페라라는 장르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뭔가 부실한듯 해서 퍼온 동영상.





그러고 보니 주빈 메타도 21세기형 링 시리즈를 내놨군요. 역시 쫌 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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