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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력 좋은 가수들을 등장시켜 기를 쓰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한번 대결할 때마다 꼴찌를 떨어뜨려서 망신을 시킨다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가수들이 노래를 잘하는 줄 몰랐다' '서바이벌이란 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가수들이 열창하니 좋다' '오랜만에 이렇게 가슴떨리는 노래를 들어 본다'는 등등의 소감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한방에 그런 성원이 180도 회전해 원성으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자니 기분이 참 그렇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처음 성원을 보낼 때, '가수중의 누구 하나가 떨어진다니 참 흥분되고, 누구 하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그런데 떨어져야 할 사람이 안 떨어진다니까 온갖 비판이 쏟아지더군요.

이 대목에서 솔직해져야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가수들이 온 정성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 떨어지는 모습이 궁금했던 겁니다. 미리 얘기하자면, 대중에 대한 과대평가가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 한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간혹 있기 때문에 미리 설명을 붙입니다. 이 글은 김건모나 이소라, '나는 가수다' 제작진을 옹호하는 글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프로그램에는 '공정성의 훼손' 말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얘기하는 글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의 치명적인 '결정 번복'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공정함에 굶주렸던 시청자들에게 김건모의 '재도전 허용'은 또 하나의 특혜로 여겨졌고, 여론의 질타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재도전을 처음 거론한 김제동은 오지랖 때문에 욕을 먹었고, 이소라는 김건모의 탈락 상황에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방송 부적격자라는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제작진의 실책은 굳이 다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제작진은 가장 큰 실수는 '공정성이 생명인 서바이벌 게임에서 공정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할 때 '공정성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분야에서 공정성을 고집하겠다고 나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500명의 청중을 모아 놓고 '가장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를 뽑게 만든 다음 '가장 가창력이 떨어지는 가수'를 하나씩 교체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방식으로 정말 '가창력이 가장 떨어지는 가수'를 솎아낸다는게 가능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가창력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가창력이라는게 대체 뭐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략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딱 떨어지게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너도 그게 뭔지 알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을 겁니다. 이를테면 신승훈이나 이승철에게는 있는 거지만 김장훈이나 유희열에게는 없는 것. 뭐 그런 거죠.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하늘을 찢어 놓을 듯한 새된 목소리를 '놀라운 가창력'이라고 부르는 반면, 어떤 사람은 '소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김정민이나 박상민의 느낌을 '뽕끼'라고 천박하다 여기고, 어떤 사람은 '직접 와 닿는 호소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가장 노래 잘 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조영남'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발성의 깊이나 음정의 정확성 등을 고려한다면 있을 수 있는 답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가창력'의 기준이란 매우 흔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전인권을 '가창력 뛰어난 가수'로 분류하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마구 질러대는 고함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레너드 코헨이나 밥 딜런까지도 가창력 뛰어난 가수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가창력이라는 말을 '노래를 정확하게 잘 부를 수 있는 능력'에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간 뭔가 느끼도록 노래하는 능력'이라는 말로 확대 해석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흔한 오해 중에는, '뭔가 열심히 부르는 듯 한 모습'이 신통찮은 가수를 가창력있는 가수로 바꿔 놓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열창'과 가창력이 이상하게 혼동되는 장면이죠. 이를테면 이은미는 가창력 뛰어난 가수고, 김윤아는 그냥 평범한 가수라는 식의 묘한 오해가 대표적입니다.


문제의 판정 날, 문제의 청중 판정단은 '가창력'을 뽐냈다기 보다는 피아니스트와 조명, 액션에 치중했던 가수를 1등으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귀'로만 집중했다면 절대 꼴찌가 될 수 없었던 김건모를 탈락자로 선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중'은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 요소의 방해를 벗어나 가창력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서 아마 제작진의 혼란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히' 대중이 가창력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한 데 대해 발끈할 분들이 꽤 많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겁니다.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가장 노래를 잘 하는 가수였던 시대는 이미 약 20년 전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오래 전, 한국이 차세대 전투기 사업을 하면서 F-15와 프랑스제 라팔 전투기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뤄진 적이 있습니다. 이때 한 언론사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F-15와 라팔 중 어느 것이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되어야 하는지를 설문 조사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설문 조사 결과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걸 물어봤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나는 가수다'가 대중이 현장에서 들으면 '가창력'을 테스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무한도전'이 시청자들에게 누가 가장 잘생겼는지 찍어보라고 했을 때 어쨌든 유재석이 무조건 1위를 한 것과 똑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이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기'입니다. 그리고 이 '인기'와 '가창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물론 대중가수에게 '인기'와 '가창력'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은 여기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슈스케'는 뭐냐고 생각하실 분들. '슈스케'는 가창력 좋은 가수를 골라내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차세대 인기 가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재목'을 뽑아내는 프로그램입니다. 엉뚱하게도 '슈스케'의 그런 요소를 비판하신 분들이 있지만 그건 프로그램의 지향점을 잘못 판단하신 겁니다. '슈스케'건 '아메리칸 아이돌'이건, 이런 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애당초 처음부터 '가장 노래 잘 하는 가수'를 골라내겠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실 가수'를 뽑아내는 프로그램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가수다'의 첫번째 교훈은 '공정성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아무 거나 판단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거기 참여하는 가수들, 제작진, 시청자들, 아무도 거기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이 위험천만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런 비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시 프로그램을 시작할 제작진은 부디 이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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