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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대단히 흔한 여자 이름입니다. 좀 길기 때문에 리사, 엘리사, 베스, 엘, 등 여러가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엘리자베스의 이름 가운데 대표 애칭이 리즈(Liz)가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냥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가운데 영국 여왕보다 유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사망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79세면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지만, 육상효 감독님의 한마디, "어릴 때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세상을 떠나면 삶의 유한성에 대해 아프게 느낄 것을 걱정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니 정말 그렇다"는 말씀에 실로 공감하게 됩니다. 심지어 테일러의 전성기가 저물어 갈 무렵에 태어난 저조차도 이 말과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그 배우가 한때 가졌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50년대'를 한번 정리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두 차례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이 모두 60년대의 일이지만 '여신 리즈'가 가장 위력을 뽐낸 시기는 50년대가 아닐까 합니다.


<< 제가 본 영화들만 언급합니다. 못 본 영화들은 패스.>>

1932년 영국에서 태어나 LA로 이주한 뒤 1944년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 1949년 '작은 아씨들'을 통해 국민 미소녀의 자리를 굳힌 리즈는 1950년대 들어 미소녀 아닌 미녀로 탈바꿈해갑니다. 그 첫 시도는 아무래도 '신부의 아버지' 연작이지만 그건 제가 못 본 영화인 관계로 패스. 그리고 1951년, 너무나도 유명한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가 나옵니다.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후 전 세계에서 수만번에 걸쳐 (사실상)리메이크됩니다. '가난한 집의 명석하고 야심만만한 미남 청년이 재벌 집 딸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이루고자, 어려운 시절의 연인을 차 버리는 이야기'의 원조인 겁니다. 2011년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마이더스'의 먼 조상 뻘인 셈이죠.

글자 그대로 영화는 아메리카의 비극, 물신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회의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19세의 리즈는 주인공 몽고메리 클리프트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게 해 줄 열쇠' 역할을 합니다. 너무나도 청순하고 아름다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상징이죠. 비록 대단히 큰 비중은 아니지만, 아무튼 리즈의 존재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고민에 너무나 설득력있는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아울러 이 영화 이후 리즈에게는 '부잣집에서 자라난 공주님이며 발랄하고 청순하지만 다른 사람의 상황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캐릭터가 부여됩니다. 이를테면 한국 미니시리즈의 여자 2번으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죠.


1952년. 제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리즈의 모습이 등장하는 영화 '아이반호'가 등장합니다. 아이반호 역은 당대의 미남 스타 로버트 테일러. 사실 월터 스콧 경의 원작을 존중하자면 여주인공은 색슨 족의 로웨나 공주여야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아이반호를 짝사랑하는 유태인 처녀 레베카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에 리즈를 캐스팅 한 데서도 결국 아이반호와 맺어지는 로웨나보다 레베카가 돋보여야 한다는 연출 의도가 엿보입니다.

(여담이지만 조앤 폰테인은 이로써 '레베카'에게 두번째 까임을 당한 셈입니다. 이미 1940년작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에서 폰테인은 '그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미인인' 레베카'-영화 속에 얼굴은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라는 여자와 비교되는 역을 맡았죠. 폰테인도 상당한 금발 미녀지만 어쩌다 이런 역할을 두번이나 맡게 되는지 참...)

아무튼 '아이반호', 우리 제목으로 '흑기사'의 레베카는 그윽한 눈빛으로 한 소년의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었던 비련의 주인공으로 오래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본 작품은 1954년작 '랩소디'.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작품일테지만 제게는 매우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영화입니다.

또 한번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 역을 맡은 리즈는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홀딱 반합니다. 남자도 여자가 좋지만 연습 조차 하지 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는 여자의 철없음에 질려 버리고 결별을 선언합니다. 충격을 받은 여자는 주변에 있던 별볼일없는 피아니스트와 결혼해버리죠.

몇년 뒤, 여자에게 얹혀 살다시피 하던 피아니스트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해서 결혼한게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고 있다는 자각으로 그녀 곁을 떠나려 합니다. 그제서야 정신차린 리즈는 죄책감에 평강공주로 변신, 본래는 재능있던 남편을 정상의 피아니스트로 되돌려 놓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는 사이 옛 애인은 거장으로 승승장구하죠.

여자는 옛 애인과 조우하고, 둘 사이의 감정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합니다. 하지만 구렁텅이에 빠진 상태로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에 더욱 훈육을 강화하고, 남편의 재기가 거의 확실해지자 '이제 당신이 두 발로 설 수 있으니 난 떠나련다'는 뜻을 전합니다.
 



연주가 끝나면 아내가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처절한 심정으로 남자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단 저 동영상의 끝이 바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닙니다. 그냥 동영상 올린 분이 엔딩 크레딧을 보여주려고 편집한 모양이네요.)


이 영화에서 이 곡의 비장함은, 바이올리니스트 남자의 상징곡인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의 화려함과 정면으로 대비를 이루면서 최상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실제 피아노 연주는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맡았다는군요. 실제로 제가 클래식 음악의 매력을 느낀 것은 이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물론 거기에 리즈의 미모가 미친 영향은... 뭐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


'내가 마지막 본 파리'에서도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의 이미지는 계속됩니다. 이 시기 리즈의 주연작들이 한국 멜로드라마에 미친 영향은 참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 1954년 영화에서 이미 두 자매가 한 남자를 놓고 펼치는 묘한 신경전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검은 터틀넥이 잘어울리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영화는 1956년작 '자이언트'. 록 허드슨과 제임스 딘, 그리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세 주인공의 이름만으로도 당대 최고의 작품이 되기에 충분했던 영화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200분이라는 상영시간이 다소 긴, 몇 장면을 빼면 그닥 높이 평가하고 싶지는 않은 영화입니다만.... 어쨌든 괴팍한 제임스 딘이 끝까지 순정을 보이는 '마님'역의 리즈는 당연히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리즈의 60년대 작품들에게 오스카상이 주어진 것은 58년작인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와 59년작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 상을 주지 않은 데 대한 반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대 후반을 맞은 리즈는 그저 별 변동 없는 '철없는 부잣집 딸'에서 순식간에 진짜 배우로 변신합니다. '뜨거운...'에서 알콜 의존증인 남편 폴 뉴먼과 시아버지의 갈등을 보며 괴로워하는 아내 역을 맡아 홈드라마 적응력을 보여준 리즈는 마침내 걸작 '지난 여름 갑자기'를 통해 손꼽히는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리즈의 출연작 가운데 가장 화려한 면면의 영화는 '자이언트'라는게 정설이지만 개인적으로 최고의 영화(이후 작품들을 모두 감안하더라도)는 바로 '지난 여름 갑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브의 모든 것' 등으로 이미 두 차례나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거장 조셉 L 멘키위츠 감독(물론 뒷날의 '클레오파트라' 때문에 리즈와 싸잡아 욕을 먹지만)의 이 작품은 대부호 집안의 미망인 캐서린 헵번이 젊은 정신과 의사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만나 이야기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1년 전 여름, 헵번의 아들과 그 연인인 엘리자베스 테일러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천천히, 잘 드는 칼로 과일 껍질을 벗기듯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별다른 액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와 탄탄한 대본, 절묘한 연출에 의해 관객은 보는 내내 긴장을 멈추지 못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충격적인 사건과 영화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면 배우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에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말이 그저 뻔한 수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만 18세의 나이로 1950년대를 맞은 리즈는 10년 동안 세번의 결혼을 경험하고, 두 차례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평단과 일반 관객으로부터 불멸의 미모와 연기력을 칭송받는 여신의 반열에 오릅니다. 비록 오스카 수상이나 '사상 최고의 실패작'으로 불렸던 '클레오파트라', 리처드 버튼과의 결혼과 이혼 등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리즈의 인생에 남아 있지만,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이름을 불멸에 이르게 하기에는 지금 살펴본 10년으로도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으로 제 방식대로 엘리자베스 여신에 대한 조의를 표명합니다.


P.S. "난 결혼한 남자 말고는 아무와도 함께 자지 않았다"는 등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쿼트 가운데는 유명한 말들이 많은데, 그중엔 "난 리즈라고 불리는게 싫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알지만 본명이 너무 길다 보니 어쩔 수 없더군요.^

윤회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부디 얼른 다시 태어나 세상에 또 한명의 여신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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