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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 만화에는 대개 주인공과 맞수인 완벽한 야구 선수가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오혜성 못잖게 유명했던 마동탁이죠. 그런데 한국 야구에는 그런 타자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너무 완벽해서 만화같았던 타자입니다.

그 타자, 한때 재일교포 강타자 장훈에 비견되어 '작은 장훈'이라고 불렸던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고인이 됐습니다. 왕년의 야구소년 눈에 불가능이 없는 타자로 여겨졌던 거인이 이렇게 빨리 전설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요즘 정신이 사람 정신이 아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강타자 장효조'를 얘기할 때 프로 진출 이후를 얘기하곤 합니다. 4회의 타격왕, .331의 통산 타율. 신화가 되기에 충분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한 천재타자가 어느 야구소년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강렬한 기억을 심어준 날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뭐 직접 만났다거나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1978년. 서울 동대문구장(당시 이름은 서울운동장)에서 드문 볼거리 하나가 등장합니다. 한미 대학야구. 미국 NAIA 소속 대학야구 선수 15명으로 구성된 팀이 내한해 한국 대학선발팀과 경기를 가졌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대학선발이라면 그냥 무명 선수들의 집합체 정도로 생각되겠지만, 프로가 없던 시절 대학선발팀의 위용은 대단했습니다. 당시 멤버는 이랬답니다.

◇대학선발야구단
▲단장=이봉모 ▲부단장=이팔관 ▲총무=신현철 ▲감독=김진영(중대감독) ▲「코치」=배성서(동국대감독) 강태정(건대감독) ▲투수=최동원(연대) 김시진(한대) 노상수(고대) 유종겸 선우대영(이상 중대) 김성한(동국대) 임호균(동아대) ▲포수=박해종(연대) 조종규(건대) ▲내야수=김봉연 정진호 양세종(이상 연대) 김진근(성대) 김한근(한대) 정학수(동아대) ▲외야수=김우근 송진호(이상 건대) 장효조(한대) 박종훈(고대) 양승관(인하대)



사실 최동원-김시진-임호균은 당시 한국 야구의 넘버 1, 2, 3 투수들이었습니다. 김성한이 투수로 들어 있는데 놀랄 젊은(?) 야구팬들도 있겠지만 당시의 김성한은 조계현이나 이광은 등과 함께 손꼽히는 투타 겸업의 천재 선수였습니다. 프로 원년에 거둔 10승은 우연이 아니었죠.

최동원-박해종의 배터리는 당연히 국가대표 주전이었고, 박해종-김봉연-장효조 역시 국가대표에서도 클린업 트리오에 해당했습니다. 이 시절에도 실업야구가 있었지만 박해종이나 김봉연은 사실 실업야구에 먼저 진출했다가 대학으로 U턴한 경우라 나이는 일반 대학생보다 한참 위였습니다. 경험 면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거죠.

그 해의 국가대표 명단입니다.

▲감독=김응룡(한일은) ▲「코치」=한을룡(한전)·이재환(연대) ▲투수=이선희(경리단) 최동원(연대) 김시진(한대) 유남호(롯데) 박철순(성무) 권영호(한국화장) 이광권(한전) ▲포수=심재원(한국화장) 박해종(연대) ▲내야수=김봉연(연대) 천보성(성무) 김재박 김일환(이상 한국화장) 배대웅(포철) 구영석(상은) ▲외야수=장효조(한대) 김일권 이해창 김준환(이상 경리단) 김우열(제일은)

면면을 보시면 대부분 프로야구 초창기를 빛낸 스타플레이어들입니다. 아무튼 국가대표에서도 핵심을 차지하던 쟁쟁한 선수들이 대학선발의 주축을 이뤄 미국에서 온 선수들과 붙었습니다. 



WBC를 거치고, 박찬호 추신수의 시대를 보면서 현재의 야구팬들은 미국 야구에 대해 별다른 공포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본 야구만 해도 장훈, 백인천의 활약 덕분에 크게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체격 면에서 압도적인 '미국 야구'는 '절대 한국인이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란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죠. 아마 지금도 현저한 '한국 농구와 미국 농구' 정도의 차이, 혹은 '한국 육상과 미국 육상의 차이' 정도를 생각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아무튼 '미국 본토의 대학야구 선수들'은 어떤 수준일까 하는 궁금증 속에 대회의 막이 올랐습니다. 7월23일, 한국은 당연히 에이스 최동원을 등판시켰고, 최동원은 5회까지 1실점(비자책)으로 호투하고 타선은 4점을 뽑아 이길 듯한 기미를 보입니다. 하지만 6회 최동원은 투런 홈런을 맞아 4-3으로 쫓긴 채 마운드를 김시진에게 넘기고, 김시진이 역전 3점포를 허용하면서 5-7로 첫판을 내줍니다.

한국의 충격은 사뭇 컸습니다. 최고 투수인 최동원과 김시진, 임호균을 모두 동원해서도 미국 타선을 봉쇄하지 못했고, 타자들은 나름 분전했지만 거구의 미국 타자들에게 동대문구장은 작게만 보였습니다. 게다가 야수들의 다이빙 캐치, 외야에서 홈으로 '쏘는' 송구 등은 그때까지 한국야구에서 볼 수 없는 허슬플레이였습니다. '본토 야구는 강하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했던 겁니다. 당연히 첫판 이후 비관론(...'론'이라봐야 동네 여론이지만)이 번졌습니다.

하지만 둘째판부터 상황이 일변했습니다. 첫날 '역시 김시진은 안돼(큰 경기에 약한 경향...ㅋ)' 소리를 듣던 김시진이 9이닝을 2실점으로 완투하고 타선이 대폭발하며 13대2, 대승으로 첫날 패배를 설욕한 것입니다. 이렇게 1대1이 된 상황, 3차전에 관심이 몰렸습니다.

여기서 장효조의 한방이 전설을 만듭니다. 1978년 7월25일, 당시만 해도 전력 사정으로 보기 쉽지 않았던 야간 경기(흔히 '나이터'라고 불렸죠) 때의 일입니다.




3차전은 한국의 승세가 초반 빛을 발했습니다. 선발 임호균은 5회까지 단 1안타로 호투했고, 타선은 박해종의 3점포를 포함해 5-0으로 앞섰습니다. 하지만 호투하던 임호균은 일순 흔들려 만루홈런을 허용해버립니다. 5-4로 쫓긴 상황. 1차전의 홈런 역전패가 팬들의 눈에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한국에도 찬스가 돌아왔습니다. 7회. 1사 만루에서 4번 김봉연이 타석에 섰습니다. 하지만 삼진. 그런데 해설자가 묘한 말을 합니다. "병살타보다는 삼진당한게 나아요." 1차전 막판의 역전 찬스를 병살타로 날린 김봉연에 대한 질책인지, 아니면 5번 장효조에 대한 기대인지, 요즘 같으면 해설자들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해 버린 겁니다. (사실 김봉연은 1~3차전에서 연속 홈런을 치는 좋은 컨디션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서 2사 만루, 타석에는 한국에서 가장 잘 친다는 장효조. 물론 프로 데뷔 후의 장효조를 기억하는 분들에겐 '딱총'의 이미지가 강하겠지만 당시의 장효조는 당당한 홈런타자였습니다. 프로 데뷔 시즌인 1983년에도 18개의 홈런을 쳤을 정도로, 당시의 장효조는 장/단타를 가리지 않는 타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프로야구가 시작된 이후, 그의 체구가 그렇게 작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5-4로 쫓긴 7회, 2사 만루, 2-3의 극적인 상황에서 장효조는 왼쪽 담장을 살짝 넘기는 만루홈런을 터뜨려버립니다. 당시 한국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밀어 친 홈런'. 9-4. 온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야구를 보면서 이만큼 강렬한 임팩트를 준 홈런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장효조는 소년에게 야구의 신이 되었습니다. 전혀 관심 없던 대학야구도 챙겨 보기 시작했죠. 대학야구에서도 장효조는 평균 4할 이상의 강타자였고, 타자 개인의 힘으로 경기를 뒤집어 놓는 카리스마를 뿜어냈습니다. 국가대표에서도 그 이상 믿을 수 있는 타자는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삼성의 잇단 한국시리즈 패배와 함께 '찬스에 약한 타자'로 낙인찍히게 된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아무튼 프로 진출 이후, 무시무시한 활약을 보였지만 1978년 한미대학야구 3차전에서처럼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영화같은 활약'은 다시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물론 이 분도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1983년 타격왕을 차지하고도 신인왕을 박종훈 현 LG감독에게 넘겨준 것에 대해 대개 '신선하지 않다'는 이유(물론 아마 시절 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 스타였던 장효조에게 새삼 신인왕을 주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로 주로 설명하지만, 많은 야구인들은 '안하무인'이라는 주변의 평가도 큰 역할을 했다고도 증언합니다.

또 호타준족이었지만 수비만큼은 도저히 칭찬할 수 없었다는 것 역시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프로에서는 주로 우익수로 출전했지만 아마 시절만 해도 1루수나 지명타자 출전이 많았죠. 특히 결정적인 포구 미스가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격에 있어서만큼은 신의 솜씨라는 것 역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한때 야구 기자였던 시절, 원로 심판들이 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투스트라이크 이후에 포수 미트로 들어오는 공을 보면 베테랑 심판들은 공이 들어 오기 0.1초 전에 '아, 삼진이구나', 혹은 '치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는 겁니다. 공의 방향, 스피드, 타자의 자세(어느 코스를 기다리는구나)를 본 상태에서의 종합적 판단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측을 어김없이 비웃는 타자가 바로 장효조였다는 거죠. '절대 칠 수 없는 코스. 헛스윙이나 루킹 삼진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믿을 수 없는 각도에서 배트가 나와 커트를 시켜 버린다는 겁니다. 또 이럴 때마다 장효조 타자는 심판을 보면서 씩 웃었다고 합니다. '어때, 못 칠줄 알았지?'하는 표정으로. 이심전심인 거죠.

여기에 위 도표를 보시면 경기수에 비해 안타수가 엄청나게 많지는 않습니다. 이건 아무 공이나 치는 타자가 아니라 끝까지 기다리는 타자였다는 것이죠. 실제로 타격 1위는 통산 4번이지만 출루율 1위는 6번입니다.

1m72의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이런 경이적인 선구안, 앞에서 말한 배트 컨트롤, 거기에 '글러브 안에 들어온 공도 친다'는 배트 스피드. 그것이 '장효조의 전설'을 만든 것입니다.




그날의 신화가 생각나는 밤. 추모의 뜻을 담아 두서없이 정리해봤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S. 사실 옛날 기사를 찾아보기 전까지 저도 제 기억이 맞는지 반신반의했습니다. 한점차로 쫓긴 상황, 2사만루 2-3 풀카운트에서 나온 만루홈런. 그런데 정말 기억 그대로더군요. 가끔 기억이 전설을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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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필사진 후다닥 오랫만에 올라온 글이 야구 글이네요.. ^^;;;
    해태팬이었던 제게 장효조선수는 김종모선수의 라이벌 정도로 기억을..(쿨럭~~~)
    하여간 당시 좌효조 우종모 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K방송국 해설하시던 분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포수 미트에서 공을 꺼내서 친다고 자주 표현하시던...
    물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냉정하게 김종모 선수가 약간 밀렸던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여튼 삼성과 경기를 보면서 위기상황에서 장효조타자 나오면 꽤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 맞으믄 안되는데...
    불안해~~~
    이제 제가 꼬꼬마 시절에 봤던 스타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등지는 걸 보면서 세월을 실감합니다...
    얼마전 본 최동원전감독의 앙상한 모습은 충격을 넘어서 공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부디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P.S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2011.09.09 11:01 신고
  • 프로필사진 테리우스원 아주 멋진 해설까지 잘 감상하고 갑니다
    즐거운 한가위 되시고 행복하세요 파이팅 !~~~~
    2011.09.09 13:06 신고
  • 프로필사진 송파아재 장효조는 제 고교 친구죠. 저희가 밤 늦게 도서관에서 공부 할 때 운동장에선 효조가 치고, 달렸습니다. 도서관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지만 1970년대 초반의 학교 운동장은 밖의 전봇대 백열등 불빛이 운동장을 어스름 비쳐줄 뿐. 상당히 컴컴했어요. 그 운동장 홈플레이트 옆에는 나무 기둥에 헌 타이어를 매어두었는데, 효조는 그 타이어을 죽어라 쳐댔었죠. 효조 누님이 도시락을 가지고 오곤 했어요. 효조는 타고 난 천재성에 지독한 연습으로 만들어진 한국 야구 의 전설입니다. 효조 재학 중에 대구상고는 전국대회 3관왕을 합니다. 대통령배, 봉황대기에 이어 황금사자기까지. 청룡기는 대구 지역 예선에서 우승한 경북고가 차지했습니다. 당시 대구상고 감독은 강태정씨였습니다. 전국 대회 우승 때마다 카퍼레이드를 했는데 대구역에 내려 라이벌 경북고 앞을 일부러 돌아 오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 효조의 명복을 빕니다. 2011.09.09 15:49 신고
  • 프로필사진 선우재우부 잘 읽었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2011.09.09 16:44 신고
  • 프로필사진 박준영 잘 봤습니다.
    나는 워낙 해태팬이었던고로, 장효조타자가 나오면 웬지 불안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진정한 타격천재라 생각합니다. 요즘 정신없이 바쁜것 같은데..추석 잘 쉬어요.
    2011.09.09 17:17 신고
  • 프로필사진 이정기 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아주 강렬한 인상을 준 게임이었습니다.그당시 그는 야구팬에 우상이었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1.09.09 20:57 신고
  • 프로필사진 이지연 제 기억에도 장효조 선수는 완벽한 타자였어요. 한참 온갖 스포츠에 관심이 많던 제 국민학교 시절 프로야구가 출범을 해서 여자인 제게도 향수가 남아 있어요. 학생시설 이후엔 관심을 끊어버린 야구지만, 장효조 선수의 갑작스런 부고가 맘 한켠을 아리게 하는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1.09.09 22:39 신고
  • 프로필사진 달봉이 저도 1년에 야구장을 50번 이상 가는 광팬이지만...송기자님 글에 예전 기억이 나네요...1980년대 쯤에 지방에서 전국체전이 열렸는데...그때 한국화장품 팀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경기후 이해창, 심재원 선수가 사인을 해주고 있었는데...이해창 선수 사인을 받은 종이 뒷면에다 사인을 받으려는 한 아이를 보더니 심재원 선수가 그 종이를 찢어버리더라구여..저도 그러려고 했었는데 그걸 미리 안 어떤 친절한 누나(?)가 종이를 한장 건넨 덕택에 무사히 두 선수의 사인을 받았는데...암튼..그때 기억으론 '못됐다!' 였는데...달리 보면 자존심과 예의의 문제였을수도 있겠다 싶네요..그래도 어린이에게 좀 심했어...ㅠㅠ...암튼...이제 야구장가면...저보다 나이많은 선수가 없네요...ㅠㅠ 2011.09.11 10:09 신고
  • 프로필사진 달봉이 아참, 저는 장효조 선수하면...당시 허리부상으로 스윙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타로 나와서 배트 콘트롤 만으로 좌전안타를 만들어내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1.09.11 10:11 신고
  • 프로필사진 비밀댓글입니다 2011.09.11 15:00
  • 프로필사진 민아비스트홀릭 아;오랜 리서치 끝에 알아들은
    이노무 야구 무식 머리ㅠ^ㅠ
    조은 정보 감사
    추석 잘보내용^^
    2011.09.11 21:39 신고
  • 프로필사진 어릴적 야구 저도 그 경기 기억납니다.
    밀어서 친 만루 홈런은 그때 처음 본 것 같네요.
    해설자는 흥분해서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 장효조 선수가 이렇게 일찍 가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1.09.12 09:24 신고
  • 프로필사진 -_- 왜케 요새 영화 리뷰 안 올려요? 2011.09.14 00:51 신고
  • 프로필사진 가을남자 그 한미 대학야구대회때 가장 활약한 사람은 김봉연이지요. 아마 7차전 까지 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김봉연은 한게임 빼고 전게임 홈런을 하나씩 쳤지요. 장효조는 저보다 약간 후배로 생각되는데 대구상고 1학년을 다니다 3학년으로 월반을 했었는데 아마 학교를 늦게 다녔던것 같읍니다. 사실 김봉연 선수도 52년생인데 54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답니다. 김봉연은 원래 군상상고 에에스투수였는데 나중에 '송상복'이라는 선수가 에에스가 되었지요.
    오랜만에 몇자 올립니다. 송기자님 명절은 잘보내셨는지요?
    2011.09.14 15:52 신고
  • 프로필사진 오~~ 어제는 최동원 투수께서 영면하셨습니다... 두분 모두 야구의 전설이 되셨네요... 다시 나오기 힘든 영웅들로 기억합니다... 그분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2011.09.15 14:11 신고
  • 프로필사진 비밀댓글입니다 2011.09.16 16:36
  • 프로필사진 skywalker 뇌 사이즈가 작아서 더 자세히는 기억 못하지만 아마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마치고 공항에서 직접 운동장으로 와서 대타로 안타를 친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또하나 누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거의 3분의 1을 홈슬라이딩해서 득점을 하고 바로 홈플레이트에서 기절했던 기억도 나고요.

    기억이 전설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멋진 표현이네요. ^^
    2011.09.20 14:44 신고
  • 프로필사진 골프존 정말 레전드였죠~! 장효조님은 정말 전설의 투수로 남을 것입니다 ㅜ^ㅜ .. 유익한 글 뜻깊게 보고 갑니다~! 2011.12.06 13:17 신고
  • 프로필사진 이대호 한미 대학야구선수권대회 그 당시에 보았죠
    장효조 그는 관중의 환호에 -------
    다음날 중앙일보 기사였읍니다
    2012.02.15 16:56 신고
  • 프로필사진 이대호 그리고 김봉연선수 삼진당하는 게 낫다는 해설가의 말도
    정말 그대로입니다
    아마도 이호헌선생님께서 해설하신 것 같은데
    2012.02.15 16: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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