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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애 주연 '아내의 자격'이 첫 전파를 탔습니다. 연출 안판석, 극본 정성주, 주연 김희애 이성재 이태란 장현성. 이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 없는 라인업입니다.

처음 대본을 대했을 때의 느낌은 '정성주 작가의 화려한 귀환'이었습니다. 1999년 최진실-김혜자가 환상의 고부간 연기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장미와 콩나물', 2000~2001년 원미경 주연의 '아줌마'로 남자들의 위선적인 가부장주의를 거침없이 공격했던 대 작가였죠(한 시대를 풍미한 미남 스타 강석우가 찌질남의 대명사 '장진구'로 불리게 됐던 바로 그 드라마입니다). 이 시기의 정성주 작가는 포스트 김수현의 선두로 불러 아깝지 않은 필력을 과시했습니다. 특히 홈 드라마에서 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힘은 대단했죠.

그러나 '고질적으로 대본이 늦는다'는 혹평과 함께 드라마 '술의 나라' 파동을 겪은 이후 정 작가의 작품에선 이전의 파괴력을 엿보기 힘들었습니다. 최정원 주연의 '애정만세'도 일정 수준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변호사들'은 마니아 층의 뜨거운 성원을 받았지만 예전의 정 작가 드라마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자격'은 정 작가가 절치부심 뽑아낸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소한 조연급 인물 하나 하나의 동작에도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 것은 물론, 대사 하나 하나에도 섬세한 디테일이 잘 지시되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자격'은 아들 교육을 위해 대치동으로 전세를 얻어 이주한 주부 서래(김희애) 이야기입니다. 전형적인 강남 중산/부유층에서 자라나 방송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남편 상진(장현성)이 '아들 결이의 장래를 위해 이대로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이동생(최은경)의 딸이 국제중에 입학하는 장면을 본 다음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예상보다 '강남의 벽'은 높았고, 결이는 국제중 입학을 위해 다녀야 할 학원 시험에서마저 꼴찌를 하는 참혹한 성적을 기록합니다. 궁지에 몰린 서래는 학원 원장인 '홍마녀'(이태란)를 찾아가 결이를 받아줄 것을 간청하고, 서래에게서 일반적인 대치동 아줌마들과 다른 뭔가를 본 홍마녀는 결이에게 기회를 줍니다.

날아갈 것 같지만 여전히 대치동 생활이 낯설고 힘든 서래는 동네 치과를 갔다가 언젠가 자신의 도둑맞은 자전거를 찾아 준 태오(이성재)를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서래와 태오는 양로원에 있는 서래의 어머니 치료를 위해 먼 길을 떠났다가 귀경하는 배를 놓칠 위기에 놓입니다. (여기까지가 1~2부의 주요 내용)



대본상으로 여기까지 내용을 접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여기 저기 나타나는 치밀한 취재의 흔적이었습니다. 대본은 강남 아이들이 학원 시험을 치르는 과정, 실제 가족의 식생활을 책임지는 '반찬 아줌마'들의 네트워크, 가족관계와 대화 내용 등 '대치동 라이프 스타일'의 디테일을 생생하게 살려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 속에 나오는 '대치동'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흔히 '욕망 `1번지'로 불리는 강남 일대. 그 가운데서도 자녀들의 미래가 교육에 걸렸다는, 가장 첨예한 욕망이 들끓어 오르는 곳입니다. 몇해 전부터 유행하던 말입니다만 흔히 자녀 교육의 성공에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동생의 희생,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네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중에서 '아빠의 무관심'이란 - 있어 봐야 도움이 안 되니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고 그냥 방해나 안 되게 멀찌기 가 있는게 낫다는 뜻 - 남자들이 지어낸 말 같기도 합니다만, 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보시면 이 네가지 요소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를 대외적으로 소개할 때 가장 간단한 요약은 '김희애의 불륜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작진은 이런 소개에 상당히 거부감을 갖습니다. 이 드라마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는 이미 1, 2회를 통해 '강남 교육특구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2세 교육이 현대 한국 부부들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쉽게 대답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예전만큼 부모 자식간의 유대가 굳지 않고 어떤 부부도 노후 대비를 자녀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됐지만 한국인의 교육열은 그 전의 어느 세대 못지 않게 치열합니다. 그 경쟁의 강도를 놓고 보면 사상 최고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1편에서 서래의 남편은 '이건 전쟁'이라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의미 못잖게 서래와 태오의 관계 역시 이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자칫하면 '불륜 미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죠. 두 사람의 만남이 수채화같은 영상 속에서 아른아른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의도를 따져 보면 단순히 불륜 미화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해가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선배 등으로 규정되어 가는 것이죠.



이런 관계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두 성인이 기존의 관계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감정을 느꼈을 때, 과연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 가는지를 바라보자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작가와 나쁜 작가의 차이가 있겠지만, 정성주 작가의 시선은 두 사람이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등지고 개인의 욕망을 향해 가는 과정을 참 설득력있게 그려냅니다.

이들이 과연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단지 지켜볼 뿐입니다. 물론 응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네. 누군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ㅋ)

마무리는 이 드라마의 주제곡처럼 쓰이게 된 Byrds의 Turn, Turn, Turn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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