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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의 쇼킹했던 뉴스 중에 '해리 포터'의 여주인공 엠마 왓슨이 양익준 감독의 독립영화 '똥파리'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뭐 워낙 정신없이 돌아가던 나날이라 자세히 훑어보지는 못하고 그냥 제목만 보는 수준이었는데, 놀라운 가운데서도 몇가지 궁금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1) '똥파리'를 언제 봤을까? 2) 그런데 '똥파리'의 영어 제목이 뭐지? Dung Fly는 아닐테고...^^ 뭐 그런 정도였죠.

며칠 뒤에 누군가 '똥파리'의 영어 제목이 'Breathless'라고 가르쳐 주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흠. 리처드 기어 나오는 영화 제목과 똑같군..."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 만화평론가로 잘 알려진 미디어 연구가 김낙호님의 트위터를 보고 의혹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정말 엠마 왓슨이 추천한 것은 '똥파리'였을까요?



기사 내용을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엠마 왓슨은 최근 세계적인 패션지 보그(Vogue) 인도판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vogue.in/content/my-beautiful-life-emma-watson




그리고 인터뷰 기사 말미에, 몇가지 질문에 간단하게 답한 부분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디자이너로 이자벨 마랑 등을 꼽고, 좋아하는 영화로 "양익준의 '똥파리', 장 피에르 주네의 '아멜리에',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그리고 리처드 커티스의 모든 작품"이라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기사를 쓴 기자는 'Breathless'라는 영화 뒤에 친절하게 '양익준'이라고 덧붙여 놨습니다.

어떻게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안 한국 기자들이 이 내용을 대서특필하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보그가 무슨 듣보잡 매체도 아니고, 직접 인터뷰를 한 보그가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겠습니까.

그런데 김낙호님(@capcold)이 이런 부분을 지적하셨습니다.



(아래 capcold님이 직접 남겨주신 댓글, '고다르 감독님은 아직 살아 계십니다.^^)

흠...

사실 만약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이상 관심이 있는 누군가 'Breathless'라는 영화를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두 편의 영화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첫째는 영어로 'Breathless', 불어로 'A Bout De Souffle', 한국어로는 '네 멋대로 해라'라는 제목을 단 1960년작, 장 뤽 고다르 감독의 프랑스 고전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장근석을 한때 '허세남'으로 만들었던, "뉴욕 헤럴드 트리뷴!" 이라는 대사의 출처가 바로 이 영화입니다. ㅋ)



그리고 한편을 더 떠올린다면 리처드 기어 주연의 1983년작 'Breathless', 국내에서는 '브레드레스'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던 영화입니다. 사실 이 두 영화는 같은 영화죠. 자동차 도둑인 한 남자가 우연히 살인사건에 연루되고, 도망쳐야 할 상황에서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목숨을 댓가로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이야기입니다. 리처드 기어 판 '브레드레스'는 프랑스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이, 엠마 왓슨이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에 심취해 있다는 것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는 겁니다. 왓슨은 2010년, 랑콤 광고 한편에 출연했는데, 단순히 출연한 것 뿐만 아니라 연출과 카피에도 자기 의사를 반영했고, 그 컨셉트는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런 내용은 당시 WWD라는 여성지와의 인터뷰에 나와 있습니다.
(원문은 접근이 안 되어 그 내용을 인용한 웹 문서를 가져왔습니다.)


얼마나 비슷한지는 직접 눈으로 보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위쪽은 왓슨이 출연했던 랑콤의 광고, 아래쪽은 '네 멋대로 해라'의 여주인공 진 세버그에 대한 트리뷰트 영상입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여러 장면을 짜깁기한 것입니다.









왓슨이 짧은 헤어스타일을 비롯해 의도적으로 세버그의 스타일을 추종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해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런 비교도 자주 되고 있더군요.



이쯤 되면 '어, 뭔가 좀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왓슨이 말한 영화는 고다르의 영화였던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가능한 가설은 "엠마 왓슨은 전후 설명 없이 그냥 'Breathless'라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했고,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영문 제목이 같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와 양익준의 영화를 혼동해 이 영화가 '똥파리'로 둔갑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그' 인도판 기자의 양식을 믿는다면, 반대로 의혹이 일기 시작합니다. 만약 '보그' 기자가 엠마 왓슨을 인터뷰하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물었을 때, 전후 맥락 없이 그냥 "'Breathless'"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그 유명한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제쳐 두고, 리처드 기어 주연의 나름 컬트 영화를 제쳐 두고, 2008년작 한국 영화일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 해서 저렇게 자신있게 (   )안에 부가 정보로 넣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보그 기자가 아니라 세계 어떤 기자라도 이렇게 과감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은 그리 높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국 기자라도 말이죠(오히려 이 경우엔 '똥파리'의 영문 제목이 'Breathless'라는 걸 모를 가능성이 더 크겠군요.^^).

만약 그 기자가 영화에 대해 문외한이고, Breathless가 바로 고다르의 'A Bout De Souffle'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차라리 그래서 imdb 같은 곳에서 검색을 했다면, 이 가능성은 더 낮아집니다.




...해서 제목도 의혹 제기로 끝났지만, 사실 제가 내릴 답은 없습니다. 정리하면 분명한 팩트는 (1) '보그' 인도판 기자는 왓슨이 말한 영화가 양익준의 영화라고 분명히 적었고, (2) 왓슨은 영문 제목이 같은 고다르의 영화 팬이란 사실을 이미 공표한 바 있다, 이 두가지입니다. 

물론 이 두개의 팩트는 '왓슨이 어딘가에서 양감독의 영화를 보고 매혹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공존 가능합니다. 왓슨은 프랑스의 고전 'Breathless'와 한국의 'Breathless'를 모두 좋아하고, 이번엔 (같은 아시아 매체와의 인터뷰이므로) 신작 영화를 추천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인이 해명하지 않는 한 진실은 저 어둠 속에....


아무튼 그러고 나니 궁금증은 배가됩니다. 과연 왓슨이 추천한 영화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혹시 개인적으로 연락 되시는 분 있으면 한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의혹만 제기해 놓고 뭐냐고 따지시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궁금한 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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