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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화두를 던진 이래 이 주제는 한국 영화/드라마 제작자들의 벗어날 수 없는 고민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얘기인 즉 간단합니다. 과연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영화건 드라마건, '블록버스터'라고 불릴 만한 성과를 향해 투자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옹호세력은 만만찮습니다. 이를테면 '쉬리'를 위시해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도전했던 수많은 대작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관객들의 성원을 얻어냈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나 '디 워', 올해의 천만 관객 동원작 '해운대'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 대작들을 겨냥하고 그 스타일을 표방했던 작품들이 '그래도 이게 한국 영화의 저력'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 작품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외양에 비해 자랑할만한 내실을 갖췄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비가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옹호론자들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외양을 키우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외양과 내실이 모두 탄탄한, 소위 '작품성있는 대작'이 나올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의혹 역시 끊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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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에서 색칠한 스티로폼이라는게 너무 역력한 바윗돌을 던지며 싸우는 신라군과 백제군을 보는 시청자들, '아이리스'의 어이없는 마무리를 보며 분개했던 시청자들은 과연 어떤 쪽의 손을 들어 줄까요. 그와 관련한 생각입니다.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하려다 보니 꽤 길어졌습니다.



제목: 한국 사극의 전투신은 왜 동네 북인가

2010년.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대규모 스펙터클 전쟁 영화와 드라마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소지섭 김하늘 주연의 MBC 드라마 <로드 넘버원>(연출 이장수)이 있고, KBS는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6·25 소재 드라마 <전우>를 부활시킨다는 방침이다. 영화계에선 차승원 김승우 권상우 주연 <포화속으로>(감독 이재한)의 제작 소식이 눈길을 끈다.

이런 현대전 대작들의 영향인지 드라마 <선덕여왕>의 붐을 이어갈 사극 대작의 소식은 잠잠하다. 이병훈 프로듀서의 <동이>(MBC) 외에는 눈길을 끄는 작품도 없다. 제작사들은 아예 사극 시놉시스를 대놓고 기피하는 상황이다. 아무래도 제작비가 현대극의 두 배 이상 드는 데다 상품 노출을 통한 제작비 지원 역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영세한 외주제작사의 입장에선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피할 수밖에 없다.

또 최근 몇몇 대작 사극들의 경우, 드라마 후반으로 갈수록 제작비 부족으로 인해 작품의 시각적 퀄리티가 뚝 떨어지는 안타까운 경우를 낳곤 했다. 유종의 미를 위해선 드라마 후반에 대형 전투 신 등이 나와야겠지만, 불행히도 거기 들어갈 제작비는 이미 다 쏟아 부은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사극 전문가는 이런 얘기를 한 적도 있다.

“50부작이라고 치고 처음 2회까지 20회 분의 제작비를 쏟아 붓는다. 초반에 눈길을 끌지 못하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10회까지 40회까지의 제작비를 쓴다. 시청률만 기대대로 나오면 나머지 회차에 대한 제작비는 방송사에서 부담하게 돼 있다.” 그러다 보니 초반엔 200~300명의 단역 배우에다 수십 필의 말까지 동원돼 그럴싸한 전쟁 장면이 구현되지만, 후반에는 네티즌들로부터 ‘30만 대군이 아니라 30명 대군이냐’는 악플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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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들일 돈을 다 들인다고 해서 시청자들이 그냥 감동해 주는 것도 아니다. 최근 종반으로 접어든 <선덕여왕>의 전투 신은 초반에 비해 물량 면에선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시청자들의 만족도는 매우 낮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시청자의 기대치는 <글래디에이터>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맞춰져 있다. <적벽대전>조차도 어설퍼 보일 정도다. 한국 TV 드라마의 제작비로 이런 작품들과 스펙터클 경쟁을 벌인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바엔 전략을 바꿀 필요가 있다. HBO의 인기 사극인 <로마(Rome)>나 <튜더스(The Tudors)>같은 작품들을 참고하는 거다. <로마>는 카이사르의 말년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출범에 이르는 로마의 격동기를, <튜더스>는 영국의 전제 왕정을 확립한 헨리 8세의 파란만장한 편력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에서 대규모 전투 신을 찾아보기는 너무도 어렵다.

특히 <로마>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 -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 -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의 대결 -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 등 로마의 운명을 건 전투들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 50명 이상의 병력이 격돌하는 전투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스펙터클이 없다는 이유로 실망하지 않는다.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전쟁 장면만 피해 가는 솜씨가 너무도 절묘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상이나 미술비까지 아낄 수는 없겠지만, 한국 사극의 제작진이 연구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두어 시간에 끝나는 영화야 어쩔 수 없겠지만, 드라마는 특히 이런 지혜를 닮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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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태왕사신기'의 전투 신은 위에 든 예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종학이라는 완벽주의자의 손끝에서 나온 전투신은 위에 거론된 작품들과는 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왕사신기'또한 '내실과 외양의 균형'을 비교하는 논리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합니다. 배용준이라는 한류 슈퍼스타의 등장과 호쾌한 전투신까지는 흠잡을 데가 없지만, '쥬신의 왕'을 자처하는 담덕이 대체 왜 한민족의 재통일과 중원 회복을 꾀하지 않는지를 비롯해 작품의 내적 논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허점이 쏟아져 내립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현재 방송가나 업계에서 맞서는 내용을 요약하면 "드라마가 드라마지(혹은 영화가 영화지)", 즉 "그만하면 됐지 뭘 더 바래"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실의 퇴장을 전후에 '선덕여왕'에 쏟아진 실망과 비난에 대해 제작진이나 MBC 드라마국이 '그런건 설정'이라거나 '작가의 권한에 속하는 부분'이라는 식으로 대응한 것 역시 그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결국은 그냥 그 정도라는 것을 자인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현재 우리 시청자들(혹은 관객)의 수준으로 보아 내용의 논리적 완결성이나 플롯의 개연성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낭비"라는 것이 현재 제작진의 논리입니다. 거기에 쓸 시간이나 노력, 자본이 있으면 더 비싼 배우를 쓰거나, 더 많은 엑스트라를 쓰거나, 말을 몇마리 더 쓰거나, 더 화려한 갑옷을 만들거나, 화약을 몇KG 더 쓰는게 시청률을 높이는데(혹은 관객을 늘리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죠. 그리고 현실을 생각하면 거기에 정면으로 반발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네. 이 부분에선 시청자/관객들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겠죠).

하지만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엑스트라 500명을 써 본 경험이, 제작비 200억원을 컨트롤해본 경험이, 할리우드 특수효과팀과 작업해 본 경험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더 '시행착오'를 겪으면 한국 영화/드라마가 제작비 1억 달러짜리 영화나 회당 제작비 1000만달러대의 드라마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가 열심히 따라잡는 속도가 할리우드의 발전 속도보다 빠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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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참고로 삼고 싶은 것은 BBC의 드라마 진용입니다. 척 봐도 그리 돈 들어가는 드라마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장수 SF 시리즈 '닥터 후'만 해도 거대 미드에 비하면 제작비 얘기를 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하지만 각개 드라마의 완성도는 찬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대형 전투신 하나 없이 대작의 느낌을 다 내는 '로마'나 '튜더스'의 교훈도 연구해볼 만 합니다.

이제는 한번쯤, '어떻게 하면 돈을 덜 들이고 돈 들인 드라마보다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에 좀 투자가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어떻게 하면'을 연구하는 비용은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것 또한 생각해둬야겠죠. 언제까지 '역시 일본 원작이 내러티브가 튼튼하다'면서 드라마며 영화며 죄다 일본 원작 판으로 만들어야 합니까.

물론 어떻게 하면 되는지도 다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당장 돈이 안 되는 단막극을 통해 연출자나 작가들을 훈련시키는 비용은 너무나 아깝지만, 작품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광고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투자(이를테면 단막극 한 편의 제작비와 맞먹는 톱스타의 기용)에는 눈에 불을 켜는 방송사에 사실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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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의 치명적인 매력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시절부터 존재했습니다. 드라큘라 백작은 매력적인 귀족 남성입니다. 그가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그런 매력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후에도 수많은 픽션들이 뱀파이어를 다루고 있었지만, '못생기고 추악한 흡혈귀'에 대한 작품은 '노스페라투'외엔 그닥 생각나지 않습니다.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 시리즈를 봐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뱀파이어 연대기'의 주요 주인공인 레스타(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는 톰 크루즈가 연기한 역할입니다)가 록스타로 변신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 아예 '인간보다 아름답고 인간보다 우아한' 흡혈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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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뉴 문

흡혈귀의 원형은 그리스 신화의 라미아(Lamia)나 로마 신화의 스트리고이(Strigoi)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 뱀파이어라는 단어가 발생한 것은 빨라야 17세기, 영어로는 18세기의 일이다.

로런스 리켈스(미국 UC샌타바버라 교수)는 최근 국내에 출간된 저서 『뱀파이어 강의』에서 이 시기 유럽에서 뱀파이어에 대한 공포가 급격히 확산된 것은 서유럽인들이 느끼던 동유럽의 야만성이나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사망 후 '무덤으로부터 되돌아와 사람들의 피를 빨 가능성이 높은 자들'로 분류됐다. 알코올 중독자, 자살자, 몽유병자, 세례받기 전에 죽은 아이, 매춘부, 동성애자, 심지어 '언청이로 태어난 아이' 등이다.

공통점을 추려 보면 소외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 다시 말해 죽어도 애도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들임을 알 수 있다. 한 번 더 생각하면, 누군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공동체에 피해가 돌아올 수 있다는 공리적인 경고가 전설 속에 숨어 있는 셈이다.

브램 스토커가 1897년 소설 『드라큘라』로 뱀파이어를 픽션 소재로 이용한 이후 이 괴물들은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과 영생의 덧없음을 일깨워주는 비유로 성장했다. 하지만 요즘 전 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꽃미남들은 이전의 뱀파이어들과는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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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 시리즈 2편 '뉴 문'은 미국에서 이미 2억50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고, 최근 국내에서도 1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 속 뱀파이어들에게 영원한 삶의 고뇌와 죄의식 따위는 없다. 인간을 죽이지 않아도 혈액은행을 통해 허기를 해결할 수 있고, 신비로운 외모와 초능력에다 '네가 숨쉬는 것 자체가 내겐 선물이야'라고 속삭이기까지 한다. 상대가 반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다.

이런 '뉴 문'의 열기 속엔 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는 소박한 흡혈귀의 전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주인공 로버트 패틴슨을 바라보는 여성 팬들의 시선은 하이틴 스타들을 바라보는 10대 소녀 팬들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아무리 진지한 고민은 일단 거리를 두는 시대라지만 초승달(New moon)에서 밝게 빛나지 않는 부분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끝)



'뉴 문'을 볼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보고 나서 그리 유쾌해지지 않을 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이런 세계적인 문화현상을 외면한다는 것은 직업윤리(?)에 어긋난다는 생각 때문에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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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줄거리는 요약하고 말고도 없을 정도입니다. 일단 악한 뱀파이어들이 자취를 감추자 고민거리가 없어 고민인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따라 죽을 수가 없을까?"하는 고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있는 한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안전할 수 없다는 (좀 납득은 가지 않지만)결론을 내리고, 깔끔하게 벨라와의 관계를 정리해버립니다.

에드워드가 하루아침에 떠나자 벨라는 산 송장이 되어 버리는데, 그런 벨라를 여전히 노리는 악한 뱀파이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하지만 벨라 곁에는 어느새 자신이 늑대인간임을 자각한 제이콥(테일러 로트너)이 있습니다. 제이콥이 벨라를 보호하고, 어느새 벨라와 제이콥은 감정을 공유하게 되지만... 벨라는 여전히 에드워드를 잊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미친 짓을 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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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게 이성적인 사고나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절대 금기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뭐 등장인물들이 모두 10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상당히 리얼하다고 볼 여지도 있죠.)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흥분하는 관객들은 - 10대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 상당히 넓은 연령대에 포진해 있습니다. 20대는 물론 30대, 40대 관객들도 꽤 있습니다. 이것 역시 남성 아이들 그룹의 '이모 팬들' 현상을 생각하면 전혀 놀랄 일은 아닙니다. 잘생긴 청년과 닭살 로맨스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연령을 무시한 전체 여성층으로 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치명적인 매력'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들이 잘생기고 멋진 인물들로 그려진 건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매력적이고 위험한 뱀파이어의 캐릭터는 기존의 뱀파이어에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불노불사의 미남 청년' 이미지가 입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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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것 역시 그동안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이런 캐릭터들은 '과연 사람이 늙지 않고, 죽지도 않으며, 영원한 젊음과 미모를 간직하고, 먹고 살 걱정도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모든 고민과 번뇌가 사라질까'에 대한 상상의 결과입니다.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영생을 가진 존재들은 필연적으로 고독과 권태를 상대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등장합니다. 이 시리즈의 뱀파이어들은 매우 새롭긴 하지만 사실은 상상력 부족의 소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100년간에 걸친 뱀파이어 픽션의 전통을 싹 무시해 버리고, 영생과 불멸이라는 소재에 대한 인간의 축적된 사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죠. "잘 생겼는데 늙지도 않아? 그럼 좋은 거 아니야? 돈도 많아? 그럼 더욱 좋지. 몸도 날쌔고 초능력도 있어. 어머, 그럼 내가 위기에 빠지면 언제든지 구해줄 수 있겠네? 그런데 피를 먹는다고? 뭐 내 피만 아니면 어때. 아, 사람은 안 죽여도 된다고? 그럼 문제될 게 없잖아? 완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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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에드워드와 크리스틴 커플이 생각해 낸 가장 큰 문제라는 게 2편인 '뉴 문'에 나오는 "내가 늙어서 할머니가 되어도 너는 나를 사랑할거야?" 정도입니다. 이건 '하이랜더' 시리즈만 해도 시작하고 10분만에 등장하는 문제죠. 네네.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아무 생각 없는 10대들입니다.

젊은 꽃미남들에게 온 세상 여성들이 환호하는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아는 처지에서 새삼 '뉴 문'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인 뱀파이어는 그동안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발전하고 육성돼 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정리된 뱀파이어는 인간이 갖지 못한 장점들을 엄청나게 갖고 있지만, 결코 인간보다 우월해 질 수는 없는 반면교사의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을 상대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다 갖는다 해도 그것이 곧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철학적인 배경을 가진 존재들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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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그 모든 걸 한방에 날려 버린 얄팍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깊이 있는 사유의 중요성을 아예 부인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고 있죠. 영화 속의 뱀파이어 집단은 스타이며 셀레브리티인 이들이고, 영화 속 여주인공이나 관객들은 이들의 밝은 면만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입니다.

영화 바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죠. 아이들 그룹의 멤버들도 죽을 때까지 춤과 노래를 연습해야 하고, 때로는 성공을 위해 야비해져야 하고, 치열한 경쟁 속의 삶을 살아야 하며, 언젠가는 나이를 먹어 팬들의 사랑을 잃는다는 사실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리 깊은 사랑은 아닙니다. 명품 백에 대한 사랑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깊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뉴 문'은 현실을 떠난 판타지이기는 커녕 현실의 무시무시함을 더욱 강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 나서도 몸서리가 쳐 집니다. 제목에 대한 답은 '여자들은 항상 뱀파이어 캐릭터를 사랑했다'입니다. 하지만 뱀파이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 이후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랑하게 된 것은 처음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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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 어쌔신'이 한국에서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비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습니다. 정지훈(비)이 주연한 '닌자 어쌔신'의 미국 흥행 성적은 지난 주말까지 3000만달러 정도. 실제 제작비는 예상보다 적은 4000만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이제 미국내 흥행만으로 손익균형을 이루기는 조금 힘겨워 보입니다.

하지만 비에게는 막강한 아시아의 응원 세력이 있죠. 모국인 한국을 비롯해 일본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어느 정도만 밀어 주면 '닌자 어쌔신'은 시리즈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비를 주인공으로 채택했을 때부터 아시아권 흥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일각에선 비의 출연이 결정됐을 때부터 "왜 하필 (일본의 고유 캐릭터인) 닌자 역이냐"고 불만을 드러낸 분들도 있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할 때 닌자 캐릭터가 있었기에 한국 배우들이 할리우드 진출이 수월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분나빠할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마워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닌자와 한국 영화인들의 인연에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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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닌자

1676년 일본에서 출간된 『반센슈카이(萬川集海)』라는 책을 보면 일본인들에게 닌자(忍者)는 단순한 암살자나 특수요원 이상의 의미임을 느낄 수 있다.

흔히 닌주쓰(忍術)라고 불리는 닌자의 온갖 기술과 무기 사용법, 철학을 집대성한 이 책은 닌자의 역사를 '중국 고대 복희씨와 황제 때부터'로 거창하게 잡고 있다. 일설엔 '고지키(古事記)'에 나오는 4세기의 왕자 야마토 다케루(日本武)가 닌자의 시조라고도 한다. 그는 여자로 변장하고 적진에 침투해 두 적장을 살해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복면 닌자는 14세기 이후 기록에 등장한다. 각지의 영주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국(戰國)시대 들어 닌자는 전문직으로 승격됐고, 이가(伊賀)와 고가(甲賀) 지역은 우수한 닌자들의 출신지로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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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후에도 도쿠가와 막부는 '정원지기'라는 뜻의 오니와반슈(お庭番衆)라는 닌자 비밀 조직을 운영했다. 피터 루이스의 『닌자 이야기』에 따르면 비교적 근세인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막부에 개항을 요구했을 때에도 닌자들이 미군 군함에 침투해 문서를 훔쳐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화려한 전설은 현대전과 함께 막을 내렸지만 닌자들은 20세기 후반 일본 대중문화의 꽃으로 되살아났다. 한국에서는 '왜색'이란 이유로 배제됐지만 닌자가 나오는 영화들은 홍콩제 권격 액션 영화들과 나란히 세계 각국에서 인기를 모았다. 1970년대의 소니 지바, 80년대의 쇼 코스기 같은 '닌자 스타'들은 아직도 매니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최근에는 닌자 캐릭터가 한국 영화인들의 할리우드 진출 경로 역할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신상옥 감독은 1995년부터 할리우드에서 저예산 영화 '닌자 키드' 시리즈의 제작자로 성공을 거뒀고 시리즈 3편 '닌자 키드 3(3 Ninjas Knuckle Up)'은 직접 연출했다. 이병헌도 할리우드 대작 'G.I.조'에서 닌자 캐릭터를 맡았다. 정지훈(비)이 주인공인 '닌자 어쌔신'은 말할 것도 없다.

하필 왜 죄다 닌자 역할이냐는 비판도 있지만, 오히려 일본 국내에서는 “할리우드에서 요즘 제작되는 영화의 닌자 역을 왜 모두 한국 배우들에게 빼앗기는 거냐”라는 시각이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 동양인 소프라노들의 세계 진출 창구 역할을 해왔듯 닌자 캐릭터는 남자 배우들의 문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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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의 캐릭터는 '일본'이라는 독특한 문화권을 세계에 설명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떠올릴 때 첨단 기술이나 자동차를 생각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사무라이나 닌자를 떠올립니다. 복면과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칼을 들고 있는 캐릭터를 보면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닌자다'라고 속으로 중얼거릴 겁니다.

과연 한국의 문화 요소 중에서 이 정도로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 있나 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깟 자객 따위, 라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세계인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닌자'는 흉폭한 살인자의 이미지보다는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슈퍼 히어로 캐릭터에 더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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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닌자 캐릭터는 일찌기 문화 상품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이소룡이 너무 일찍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은 '아시안 액션' 상품의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 흐름을 주도한 것이 소니 지바(치바)와 쇼 코스기라는 스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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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치바는 많은 사람들이 '킬 빌'에서 칼 만드는 아저씨 역으로 기억하고 있는 배우이지만 왕년의 일본제 액션 영화에서 단골 스타였습니다. 기억을 도와드리자면 오키나와에서 초밥 만들다 말고 우마 서먼에게 칼을 만들어주는 아저씨죠. 이 영화에서 맡은 캐릭터의 이름인 '핫토리 한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보디가드였던 전설적인 닌자의 이름에서 따 온 것입니다.

물론 소니 치바가 한창 때 활동하던 영화들은 국내에는 전혀 반입되지 못한 영화들이기 때문에 그가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은 곽부성과 정이건의 사부 역으로 출연한 '풍운' 등 중국 무협 영화가 개봉된 뒤의 일이라고 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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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 어쌔신'에 정지훈의 사부 역으로 등장한 쇼 코스기는 미국으로 진출해 미국산 닌자 영화 시리즈로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닌자 어쌔신'에 출연한 것도 당연히 그 이유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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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이 연기한 닌자 캐릭터 스톰 쉐도우와 정지훈이 연기한 닌자 라이조 역을 두고 혹자는 '닌자 캐릭터로 밤낮 할리우드 진출 어쩌고 해 봐야 결국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은 무술 전문 배우 역할이나 하고 말 뿐'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된 얘기는 전에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지 동양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 구사 능력과 그쪽에서 원하는 스타일의 연기력, 그리고 그 배우가 끌어들일 수 있는 관객의 규모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할 때 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미국에서 황인종 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무협이든, 아니든)를 개봉한다 칠 때 과연 그 영화가 흥행성이 있었을까를 생각해본다면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서서히 변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배우들이 닌자 역할을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봐야 할 것이고, 그 배우들이 거기서 그칠지 혹은 그 이상으로 발전할지의 여부는 그 다음에 생각할 부분입니다. 도전해 보지도 않고 '가서 닌자 역이나 할 걸 뭐하러 가'라고 말할 얘기는 아니죠. 그리고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백인 여성 관객들이 정지훈군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는 광경을 머잖게 보게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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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김명민이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충분히 받을만한 상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나 올해는 '박쥐'의 송강호, '국가대표'의 하정우 같은 쟁쟁한 상대들과의 대결을 통해 따낸 주연상이라 가치가 유난히 돋보입니다.

김명민의 연기에는 누가 토를 달지 않았지만, '내사랑 내곁에'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평가가 좀 엇갈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김명민의 이번 수상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듯 합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달라지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단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여전히 수많은 보도들이 '20kg를 감량하는 연기 투혼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식의 도식적인 보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일전에 썼던 글을 뒤늦게 이쪽으로 가져옵니다. 이 글이 지면에 실리고 나서 상당한 김명민 팬들의 오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쩌면 '해명의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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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우의 몸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1983)를 본 많은 사람은 리얼리티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 혀를 내둘렀다. 중세 일본 어느 산골 마을의 기로(棄老) 풍습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감독과 스태프, 배우들은 3년간 실제로 오지의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흙냄새를 피부 깊숙이 묻혀냈다.

특히 할머니 역의 배우 사카모토 스미코는 돌벽에 이를 부딪혀 부러뜨리는 연기를 조작 없이 실제로 해내는 열의를 보였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이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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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를 돌이켜 보면 과감하게 몸을 혹사해 전설이 된 배우들이 적지 않다. 많은 배우가 극중 인물로의 완벽한 변신을 위해 다소 위험할 수도 있는 신체 변형을 감행했다. 가장 대표적인 배우는 로버트 드 니로다. '분노의 주먹'(1980)에서 한 복서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모두 연기한 그는 23㎏의 중량 변화를 실제 몸으로 표현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는 '언터처블'(1987)에서도 갱 보스 알 카포네로 변신하기 위해 27㎏을 불리는 한편 앞쪽 머리숱을 뽑아 대머리가 되는 열의를 보였다.

24일 개봉한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김명민이 20㎏을 감량했대서 화제다. 영화에서 루게릭병 환자 역을 맡은 김명민은 평소 체중인 72㎏에서 극중 환자의 상태에 맞게 감량을 시작, 사망 직전에는 52㎏의 앙상한 몸을 드러낸다.

체중의 변화가 연기 열정의 표상처럼 여겨지는 것은 제아무리 명배우라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던 시절의 유산이다. 말런 브랜도는 영화 '데지레'(1954)에서 나폴레옹 역할을 맡아 감쪽같은 매부리코를 분장으로 만들어 냈지만 1m83㎝의 키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요즘 같으면 '반지의 제왕'에서 1m67㎝의 배우 일라이저 우드가 키 1m20㎝ 내외인 난쟁이로 변신하는 게 예사지만 말이다.

컴퓨터 그래픽이 일상화된 2009년에도 배우의 실제 신체 변형에 가산점이 주어져야 할까. 만약 그렇다면, 글자 그대로 '뼈를 깎고 살을 찢는' 고통을 감수해 가며 성형수술을 통해 불멸의 젊음과 새로운 미인형에 도전하는 여배우들에게 세상은 왜 그리 냉담한 것일까. 첨단 기술의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열정이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사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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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분들은 이 글이 김명민의 연기 열정에 대한 폄훼라며 흥분하시기도 한 모양인데, 분명히 그게 아니라는 점을 전달하고 넘어가야 할 듯 합니다. 이 글에서 공격하고 있는 것은 '살빼기=명연기(혹은 명배우)'라는 식의 단세포적인 시각입니다. 영화 개봉 당시를 생각해보면 어디를 봐도 '살을 뺐다'는 얘기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그게 영화의 질이나 김명민의 연기의 질을 설명해주는 결정적인 요소인 양 말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해서 김명민이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연기를 잘 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살을 많이 뺐기 때문입니까. 연기는 지독하게 못 하는 배우가 다이어트에는 재능이 있어서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20~30kg씩 체중을 늘였다 줄였다 한다면, 과연 그럴 때에도 '연기 투혼'이라는 말로 칭찬하고 '연기상을 줘야 한다'고 칭찬해야 한단 말입니까.

연기란 '실제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관객의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을 위한 예술입니다. 만약 '실제로 그런 것'만이 진정한 연기라면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는 병사 연기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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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자신의 육체를 희생해가며 자신이 연기하려는 상태에 최대한 근접해 보려는 시도는 대단히 숭고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이런 희생의 의지만으로 칭찬받을 수는 없습니다. 축구경기의 예를 들어 보자면, '투혼이 빛났다'는 이유로 우승컵을 줄 수는 없지요. 우승컵은 이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명민의 연기력은 '연기력' 자체, 혹은 관객에게 '보여진 결과'를 통해서 칭찬받아야지 '20kg를 감량해 건강에 위협이 왔다'는 이유로 칭찬받아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김명민은 눈빛만으로도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이 연기는 살을 뺐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애를 낳아 보지 않은 여배우가 애 셋을 둔 여배우보다 관객들이 보기엔 더 훌륭한 연기를 해 낼 수도 있습니다. 우주에 한번도 나가 보지 못한 배우가 무중력상태에서의 격투 연기로 갈채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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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성형 수술 이야기는 당연히 농담입니다. '만약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만으로 배우가 칭찬받아야 한다면 가장 칭찬받아야 할 사람들은 수시로 자신의 몸을 고통과 마취의 위협을 감수하고 수술대에 올려놓는 여배우들이야말로 진짜 찬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 아니냐는 얘기죠.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하면 김명민이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탁월한 '연기력' 때문입니다. 살을 빼는 '투혼'이 빛나서가 아니라, 그 결과로 관객 앞에 드러난 연기가 훌륭하게 비쳤기 때문이죠.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살 아니라 팔을 하나 잘랐어도 그것만으로 훌륭한 배우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배우의 실제 신체 변형에 가산점을 줄 수는 없다'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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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나자나 한번 빠진 살이 잘 돌아오지 않는군요. 요요로 걱정하시는 분들에겐 참 부러운 일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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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한 형법상의 처벌 규정이 위헌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혼인빙자간음에 대한 헌법소원이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니지만 이번에야말로 이 규정이 사라질 때라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돼 있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여기에 대해 한줄 글을 남기게 됐습니다. 시간에 쫓기다가 쓴 부끄러운 글이지만, 그러다 보니 좀 불친절한 글이 된 듯도 해서 거기에 대해 뭔가 해설의 성격을 가진 글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글의 출발점은 이것입니다. 혼빙간(이젠 그냥 이렇게 쓰겠습니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는 법'이라고 이 법을 옹호해왔습니다. 하지만 과연 진짜 '보호'가 이뤄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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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혼인빙자간음

최근 영미법의 이슈 중 하나는 ‘기만에 의한 강간(Rape by deception)’의 성립 여부다. 지난 200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최고법원은 동생으로 가장하고 동생의 애인과 성행위를 한 남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여성이 성행위에 동의했을 경우는 강간죄를 적용할 수 없으며, 동의가 기만에 의한 것인지는 법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계에서는 의사로 위장한 병원 직원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성의 사례 등을 들어 ‘기만’도 강간의 수단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26일 한국에선 혼인빙자간음죄에 56년 만에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한국 사법행정학회가 2006년 펴낸 ‘주석 형법’ 교과서에 따르면 이 죄는 1953년 9월 대한민국 형법이 처음 제정될 때부터 존재했다. 당시 일본도 유사한 법을 제정하기 위한 초안을 갖고 있었으나 실제 반영하지는 않았다. 현재는 미국의 일부 주와 터키·쿠바·루마니아 등에 유사한 죄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의 의미는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남성들로부터 여성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법 제정 2년 뒤에 일어난 박인수 사건을 볼 때 과연 그 취지가 받아들여졌는지는 의문이다. 55년 7월 미남의 전직 해군 대위가 20여 명의 여대생을 유린했다는 스캔들은 장안의 화제였고 결국 박인수는 2심에서 혼인빙자간음으로 1년형을 선고받지만, 대중은 도리어 피해자(?)인 여대생들에게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68년작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유부남 사업가(신영균)와 사랑에 빠진 여교사(문희)가 남자를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했다면 관객은 여주인공을 애잔한 마음으로 바라봤을까. 물론 세월이 흘러 지난해엔 남편(김주혁)을 둔 아내(손예진)가 미혼 남성과 또 한번 결혼한다는 파격 소재의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가 화제가 됐다.

이런 변화를 봐선 혼인빙자간음죄의 퇴장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 여성의 성적 결정을 존중하게 된 것일까. 지금이야말로 여성에게만 일방적인 정조를 강요하는 봉건적인 시선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를 자문해 볼 때다. 분명한 것은 ‘기만에 의한 강간’의 성립 여부를 논의하기까지엔 아직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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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의 박인수 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 판결문에 있었던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명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의 취지가 어쨌든, 박씨를 혼빙간으로 고소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이미 법적인 보호대상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타락해 있었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혼빙간'으로 여자가 남자를 고소한 경우 일반 대중의 비난의 시선은 '당연히 나쁜 놈'인 남자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여자 역시 '가볍게 행동한, 아무 생각 없는 여자' 취급을 받기 마련입니다. 전문가이든 아니든 누군가의 설레발에 넘어가 '천금같은' 정조를 함부로 아무게나 줘 버린 여자 취급인 것이죠.

또 '혼빙간'의 고소인이 되는 순간 여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피해자를 보는 따뜻한 시선'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윗글에서 '미워도 다시 한번'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은 이 부분에 대한 얘깁니다. 이 영화가 당시의 관객들에게 먹혔던 것은 유부남을 사랑한 유치원 여교사가, 시골에서 남자의 본처와 아이가 상경했을 때에 그냥 조용히 물러날 마음을 먹고 혼자 아픈 가슴을 달랬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자가 '내 청춘을 물어내라'며 남자를 고소했다면, 많은 관객들은 오히려 이 극중 캐릭터를 '독한 년'이라고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빙간의 요소가 성립하려면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감췄어야 하지만, 고소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여자 쪽에서는 어쨌든 '나는 남자가 유부남인지 몰랐다'고 주장하기 마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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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도 많은 여자들이 '사짜(의사, 변호사 등등)' 스펙을 들이미는 남자들의 '결혼하자'는 말에 몸을 던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결국 많은 여자들이 결혼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어쨌든 '조건'이라는 것이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게 현실일겁니다.

좋은 조건을 이용해 '혼인을 빙자'해서 여성의 몸을 농락하는 것과, 윗글 맨 위에서 소개한 '기만을 통한 강간(Rape by deception)'은 꽤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두 경우 모두 여자가 남자에게 속아 원치 않는 성관계를 맺은 경우에는 사회적인 징벌이 있어야 한다는 시선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과연 '피해자'인 여성을 순수한 의미에서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논의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지각 능력을 보는 수준에서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의 '혼빙간' 규정이 여자를 보는 시선은 금치산자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시선이 제 높이로 올라오고 나서야 비로소 '기만에 의한 강간'을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 여성계가 혼빙간의 폐지에 적극 찬성하고 나선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혼빙간이라는 죄가 존재하건 안 하건, 한 여자가 어떤 이유에서든 한 남자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헤픈 X' 취급을 받는 사회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얘기를 해 두고 싶습니다. 1955년의 박인수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1심에서 박씨를 무죄로 풀어 준 재판부의 '놀라운 명판결'이 아니라, 판결이 어떻든 이미 대중의 여론은 그 사건의 고소인들(혹은 피해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지난해의 아이비 사건만 돌이켜 생각해 봐도 이 부분에서 한국 사회가 '확실히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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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인가 있었던 '빨간 마후라' 사건 때문에 '빨간 마후라'가 구글에서 성인인증을 받아야 검색할 수 있는 단어가 돼 버렸다는 개탄할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의 영화 '빨간 마후라'와 김영환 장군의 이름은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고유명사들입니다.

지난 주 일제히 '김영환 장군'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난 14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치러진 김영환 장군의 추모제와 관련한 내용들입니다. 요약하자면 김영환 장군은 6.25가 한창이던 1951년 12월18일, 공비 토벌을 위한 공습에 나섰다가 UN 사령부의 공격 목표가 해인사인 것을 알고 명령에 불복, 인류의 문화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또 이 분은 한국 공군 파일럿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처음으로 도입한 분이기도 하더군요. 그 분의 사적을 돌아보다 생각난 얘기들을 지난 주말에 써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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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숭고한 불복종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1944년 8월 9일, 독일의 디트리히 폰 콜티츠(Von Choltitz) 중장은 파리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2개월 전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 시시각각 파리로 진격하고 있는 상황. 히틀러는 그에게 거듭 “절대 파리를 온전한 채로 내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폰 콜티츠는 이 명령을 묵살한 끝에 8월 25일 1만7000명의 휘하 장병과 함께 연합군에 항복했다. 히틀러는 폰 콜티츠의 항복 소식에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Brennt Paris)?”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연합군의 파리 수복 과정을 영화화한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 작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폰 콜티츠는 회고록에서 “후세에 '파리를 파괴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감지한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온전한 파리를 보게 된 것은 폰 콜티츠의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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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떤 군대도 상명하복을 철칙으로 삼지 않은 적은 없다. 대한민국 군 형법 44조도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아니한 자'에게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라는 엄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은 양심에 따른 명령 불복종으로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14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는 6·25 당시 유엔군의 폭격 명령을 거부, 국보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의 추모제가 열렸다. 그는 항명을 추궁하는 상부에 해인사의 가치를 조목조목 설명해 '귀하와 같은 장교를 둔 건 대한민국의 행운'이라는 찬사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비슷한 시기 “태우는 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며 구례 화엄사를 소각령으로부터 지킨 차일혁 총경, 오대산 상원사를 태우려는 국군 장교에게 “그럼 나도 함께 태우라”고 맞선 방한암 선사의 이야기도 감동을 전한다. 물론 그 뜻을 받아들여 법당 문짝만 뜯어 태우고 떠난 이름 모를 국군 장교를 빠뜨릴 수 없다.

위화도 회군 이후 수많은 장군이 사리 사욕에 의한 하극상으로 역사를 더럽히기도 했지만, 이렇듯 숭고한 불복종의 기록은 인간이 명령대로 단순 복종하는 기계와 어떻게 다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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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생인 김영환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넘겨 받아 한국 공군 최초의 전투비행단을 지휘한 에이스였습니다. 이 분이 빨간 마후라를 처음으로 착용하게 된 계기를 찾아 보다 보니 참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김영환 당시 대령이 1951년 형인 김정렬(뒷날 참모총장) 장군의 집에 가서 치맛감인 빨간 비단 천을 얻어다 목에 감은 것이 시작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2차대전때 독일의 에이스였던 리히토펜의 진홍색 머플러에서 착안한 김대령이 '빨간 마후라'를 후배 조종사들에게도 사용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
http://www.army.mil.kr/history/%C2%FC%B0%ED/%C1%D6%BF%E4%C0%CE%B9%B0/%B3%B2/%B1%E8%BF%B5%C8%AF.htm 에 더 자세한 얘기가 있습니다.일설에는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도 김영환 장군이라고 합니다만, 이 사이트에 따르면 영화의 내용은 승호리철교 폭파작전을 지휘한 유치곤 장군의 이야기에서 더 많은 것을 따 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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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는 그야말로 전쟁 영화의 고전입니다. 이 영화에선 폰 콜티츠가 양심적인 지식인의 표상으로 그려지지만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인사들은 그가 파리에서 항복하기 전까지 수많은 레지스탕스들을 체포해 처형했으며, 전세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것을 판단, 전쟁 이후 자신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 급격히 변신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요소를 참고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파리의 보존은 아이젠하워도 쉽게 파리로 진공하지 못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고, 그 부분에서 콜티츠에게 공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아울러 콜티츠의 항복 때문에 드골의 자유프랑스군과 파리 수복의 공을 나눠 갖게 된 좌익 레지스탕스들은 콜티츠를 미워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는군요. 이 구도는 2차대전 이후 프랑스 좌익의 운명에 꽤 큰 영향을 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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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엔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국어 교과서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수필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수필엔 방한암 선사가 상원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은 국군 장교와 갈등을 일으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이 수필엔 한암 선사가 장교를 "이삿짐을 싸야 하니 며칠 뒤에 오라"고 돌려보내고, 돌아온 장교가 법당 문을 열자 한암 선사가 절명해 있는 광경을 본 뒤 차마 절에 불을 지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사실과는 좀 다르다고 하더군요.^ 한암 스님이 절의 소각을 막은 것은 맞지만 입적하신 것은 이보다 좀 뒤의 일이라고 합니다. 선우휘의 단편 '상원사' 때문에 사실과 전언 사이에 혼란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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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차일혁 총경은 유명한 아드님 때문인지 요즘도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입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으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 분은 지금 들어도 전설적인 일화를 여럿 남겼습니다. 가극 '눈물의 여왕'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분이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듣고 한 말이 "이 절을 태우는데 하루면 충분하지만 다시 지으려면 천년도 부족하다"는 명언입니다. 전쟁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용기로는 감히 하기 힘든 말일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참 이런 분들의 일화가 자꾸 잊혀지는게 아쉬울 뿐이라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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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의 역사를 가진 동춘 서커스가 해체를 선언했다는 얘기를 듣고 쓴 글인데, 어느새 '해체는 없다'는 새로운 소식이 떴습니다. 일단 수원시가 상설 공연을 할 수 있는 부지를 무상으로 대여하기로 하는 등 각지로부터의 관심이 급한 불을 끄게 했다는 얘깁니다.

지난달 말, '마지막 공연'을 전제로 진행된 공연은 동춘서커스 역사상 가장 홍보가 잘 된 공연 중 하나였을 겁니다. 동춘이 아직 존재하고 있는지조차도 까맣게 잊었을 사람들까지도 '해체' 기사를 보고 '아, 아직도 열심히들 하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했을테니까요. 하지만 들리는 말로는 그 공연에도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구나 '동춘' 얘기를 하면서 유행처럼 '태양의 서커스'를 반찬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냥 그런 식의 단순한 비교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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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커스

2세기 초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의 풍자시에는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포기한 다음부터, 우리는 단 두 가지에만 목을 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장 달콤한 복리와 오락에 혹해 너무 쉽게 민주주의를 포기한 민중에 대한 비판이다. 이미 이 시기 로마에선 각종 기예나 신기한 동물 쇼, 광대놀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에 전차 경주까지 합쳐진 대규모의 서커스가 성행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수많은 해외 사신들을 초빙한 가운데 백희(百戱)라는 이름의 대형 서커스 쇼를 펼친 기록이 있다. 2세기 초 장형(張衡)이 쓴 '이도부(二都賦)'에 동해황공(東海黃公)이나 어룡만연(魚龍蔓衍)처럼 구체적인 연희의 제목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의 2000년간 인류를 즐겁게 해줬던 서커스는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위기에 놓였다. 산업사회의 성숙과 함께 등장한 TV와 영화, 프로 스포츠 등 다양한 볼거리와 맞서는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84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동춘 서커스가 경영난 끝에 오는 11월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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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4년 창단한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는 서커스가 결코 시대에 뒤진 오락이 아님을 입증해냈다. 이들은 기존의 볼거리에 음악과 조명, 의상과 스토리 등 현대적인 요소들을 가미해 관객의 발길을 돌려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창단 이후 지금까지 200개 도시를 돌며 9억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내년에도 20개의 서로 다른 공연을 온 세계에서 펼칠 예정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상하이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으로 꼽는 상하이 서커스(上海雜技)도 유서 깊은 중국 기예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는 하나 사라져가던 이 연희가 재건된 것은 1994년, 아크로바트 쇼 '금색서남풍(金色西南風)'이 크게 성공한 뒤의 일이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역시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제작자 캐머런 매킨토시가 손을 잡기 전까지는 사양 시장으로 취급됐다. 어떤 장르도 그 역사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시장의 변화를 주시하는 변신의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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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는 주브날(Juvenal)이라고 불릴 것 같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Decimus Iunius Iuvenalis)는 16편의 정치 풍자시(satire)를 썼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빵과 서커스'가 나오는 10번째 작품입니다.

사실 유베날리스의 시대는 로마의 혼란기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정 초기, 5현제 시대로 이어지는 안정기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베날리스는 대중이 '빵과 서커스'에 눈이 멀어 민주주의를 포기했다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고민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던져주는 '양식'과 '오락'에만 취해 길들여졌다는 얘깁니다.

이 시기의 서커스는 지금의 서커스와는 좀 다릅니다. '서커스'라는 것이 거대한 공연장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고, 각종 기예나 동물 쇼, 광대 놀이처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서커스의 요소 외에 검투사의 싸움이나 전차 경주까지 포함된 초대형 버라이어티 공연이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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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동안 면면히 내려오던 서커스가 어떻게 위기를 맞았는지는 이미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몰락의 길을 걷던 서커스라는 장르에 태양의 서커스라는 새로운 조류가 등장하며 이를 모방한 수많은 '현대적 서커스' 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서커스가 그렇듯, '현대화된 서커스' 또한 모두 성공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태양의 서커스'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것 역시 그냥 되는 건 아닙니다. 쉴새없이 새로운 요소와 도전이 실현되고 있고, 그 동안 쌓아올린 자본력과 노하우로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중의 취향이란 변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동춘이든 누구든, 혹시라도 정부 당국이 나서면 결과는 너무나 뻔할 겁니다. 해외 연수를 통해서든 자료 분석을 통해서든 '태양의 서커스'를 모델로 한 개혁이 이뤄지겠죠. 하지만 과연 그런 모방이 얼마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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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함께 웨스트엔드의 황금기를 연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는 "우리가 처음 무대에서 쇼를 짤 때만 해도 뮤지컬은 돈 버는 쇼가 아니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언젠가 우리 쇼로 이 공연장을 꽉 채우고 말겠다"는 열정 뿐만 아니라, 그 열정을 실현시킬 수 있는 창의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장르든 공연 예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는 '우리의 애환이 담긴 장르를 살려야 한다는 동정'이나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공무원들의 문화 상품 기획서의 구색 맞추기 항목'이 아닙니다. 바로 이 열정과 재능이죠. 그렇지 않다면 어떤 지원도, 어떤 동정도 저절로 관객을 몰아다 주지는 않을 겁니다.

P.S. 쓰고 보니 '신문산업'에도 해당되겠군요. 갑자기 한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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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휩쓸고 있는 '디스 이즈 잇'의 열풍에서 한국은 슬쩍 빗나가 있는 느낌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디스 이즈 잇'의 2주 한정 상영 방침이 바뀌어 연장 상영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지방 몇개 극장에서 상영관이 축소되면서 '상영기간 단축'에 대한 헛소문이 돌고 있다고도 합니다.

마이클 잭슨 같은 대형 스타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에 대한 예우 치고는 좀 초라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물론 개인적인 감상일 뿐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스타라도 '추모의 열기' 혹은 '사후의 영광' 같은 것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팬들로부터 시작된 감정이 일정한 임계치를 넘어섰을 때에나 조성될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문득 지난 세기를 장식했던 다른 스타들이 남긴 마지막 흔적들은 어떻게 처리됐는지 정리해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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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완성 유작

1973년. 홍콩 권격 스타 이소룡은 인기 절정의 순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해 미주 대륙에 공개된 '용쟁호투(龍爭虎鬪)'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흥행업자들은 그가 더 이상 새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군가가 이소룡이 사망 직전 차기작을 위해 촬영한 10여 분가량의 액션 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5년 뒤 개봉된 영화 '사망유희(死亡遊戱)'는 이 촬영분에 스토리를 덧붙여 만들어졌다. 앞부분을 만들기 위해 이소룡과 닮은 한국 배우 김태정이 기용되기도 했다.

그래도 '사망유희'까지는 이소룡의 작품으로 인정받지만 그의 마지막 출연작으로 알려진 1981년작 '사망탑(死亡塔)'은 지나친 장삿속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 영화엔 이소룡이 나오는 몇 개의 자투리 장면이 스쳐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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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마릴린 먼로가 사망했을 때에도 그가 출연 중이던 영화 '섬싱스 갓 투 기브(Something's Got to Give)' 제작진은 어떻게든 영화를 살려 보려 했다. 하지만 촬영 분량이 너무 짧아 결국 이 영화는 그냥 '먼로의 마지막 작품'이 아닌 미완성작으로 남았다.

곧 개봉될 히스 레저의 유작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좀 더 기발한 방법을 썼다. 2008년 레저가 죽기 직전 연기한 부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서 세 배우가 '얼굴이 변했다'는 설정으로 레저의 역할을 연기한 것이다. 그의 유작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패럴 등 정상급 배우들이 선뜻 나섰다는 미담도 전해진다.

지난 6월 사망한 마이클 잭슨이 준비하고 있던 생애 마지막 공연의 리허설 광경을 편집한 다큐멘터리 '디스 이즈 잇'이 지난 28일 세계 99개국에서 공개됐다. 잭슨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라 팬들은 앞다퉈 극장으로 향하고 있지만 몇몇 측근은 본인이 이 영상의 공개를 원했을 리 없다며 개봉을 반대하기도 했다. 누나 라토야 잭슨은 “리허설 때 최선을 다해 춤추고 노래하는 가수는 없다. 마이클이라면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이번엔 팬들의 손을 들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미완성으로 남은 이 공연의 기록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잭슨이 살아서 이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면 얼마나 대단한 공연이 됐을지'를 더욱 아쉽게 하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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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과 '사망유희'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사망유희'를 만들기 위해 제작진이 짜낸 스토리는 대략 이런 것입니다.

홍콩 최고의 스타 빌리(이소룡)가 의문의 범죄 조직으로부터 살해 협박을 당하고, 그 실체를 찾기 위해 죽음을 가장했던 빌리는 자신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펼쳐지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빌리는 생전의 자기를 위협했던 조직을 하나하나 파괴해갑니다.

그럴싸한 스토리이고, 스토리상에 등장하는 장례식 장면에는 진짜 이소룡의 장례식 장면을 쓸 수 있으니 여러모로 안성맞춤입니다(당연히 이런 부분을 계산한 스토리죠). 다만 진짜 문제는 그 나머지 스토리를 연기할 이소룡이 없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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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축구'와 '킬빌'은 물론 '사망유희'의 '노란 추리닝'은 이소룡의 이미지를 타고 끝없이 재활용되고 있습니다. 빈약한 퀼리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의미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한국이라면 죽기 전의 이소룡 역에 다른 배우를 쓰고 '복수를 위해 성형수술을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홍콩에서는 아시아 전역에서 그를 대신할만한 배우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발탁된 것이 한국의 당룡(唐龍: 위에서 말한 김태정의 예명)과 뒷날 톱스타가 되는 홍콩의 원표였습니다. 특히 당룡은 '선글라스만 씌워 놓으면 똑같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죠. 상대적으로 고난도의 액션 연기는 원표의 몫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의 퀄리티가 그리 높을 리는 없겠죠. 이소룡의 명성을 쫓아 '사망유희'를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실망 뿐입니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당대의 이소룡을 사랑했고, 그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사람들의 몫일 뿐입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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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패럴이 각각 1차 변화후, 2차 변화후, 3차 변화후의 모습을 연기한다는군요. 히스 레저가 테리 길리엄 감독과 만나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스스로 인생을 정리했는데, 레저의 유작을 살리기 위해 감독이 이들 배우들을 만나 "조금씩만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다들 흔쾌히 응해 한 역할을 네 배우가 연기하는 희한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군요.

테리 길리엄 감독의 좀 너무 어두운 유머 감각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튼 어떤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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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디스 이즈 잇'의 퀄리티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보는 사람들 역시 충분히 이런 부분을 고려하고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절대 다수의 반응이 "저걸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가서 (잭슨은) 얼마나 원통할까"인 것으로 봐도, '불완전한 공연'에 대한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듯 합니다.

오히려 '디스 이즈 잇'은 일각에서 유포되는 별 근거 없는 이야기들 - 2000년대 이후로 잭슨은 노래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든가, 이미 모든 공연은 립싱크로 이뤄지고 있었다든가 하는 내용들 - 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도 얘기했듯 화려한 춤사위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공연 전체를 놓고 봤을 때에는 이런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유능한 무용수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안무가로서의 잭슨이 갖고 있는 무대 장악력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아무튼 '사망유희'가 있어 이소룡을 추억하는 팬들을 위로하고, '디스 이즈 잇'이 잭슨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면 이런 작품들에까지 완성도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담긴 의미만으로도 존재의 가치는 충분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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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축구라는게 본래 발로 하는 거다 보니 눈으로 보기엔 답답할 때가 많죠. 세 골째를 먹었을 때에는 저절로 채널이 돌아가더군요. 그렇게 어렵게 골을 넣고, 그렇게 쉽게 골을 내주다니..

물론 8강이면 훌륭한 성적입니다. 당초 이번 대회가 시작할 때만 해도 목표는 16강 진출이었습니다. 최근 몇년간 20세 이전부터 스타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들이 팀을 이룬 상태에서도 16강 진출에 계속 실패해왔고, 이번 대회에도 카메룬-미국-독일과 한 조를 이루면서 '죽었구나'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브라질-스위스-나이지리아와 붙어야 했던 2005년, 브라질-미국-폴란드와 한 조였던 2007년에 비해 유난히 나쁜 대진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번 대회를 지켜보면서 1983년의 기억이 되살아난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의 찬란했던 기억과 함께 그 시절의 아쉬움도 함께 다시 살아나더군요. 그래서 써본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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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소년 강국

 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이집트에서 선전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에게 잊혀졌던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1983년 6월 16일 오전 8시. 일찌감치 출근한 사람들은 TV 앞에서 일손을 잡지 못했다. 각급 학교에서도 수업은 뒷전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은 멕시코에서 열리고 있던 한국과 브라질의 U-20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준결승 경기에 쏠려 있었다.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한국은 경이적인 연승으로 세계 4강에 진출, 온 국민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비록 접전 끝에 1대2로 아깝게 패하긴 했지만 외신들은 붉은 유니폼을 입은 한국 선수들의 분전에 ‘마치 붉은 악마들 같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뒤로 이 말은 한국 축구의 상징이 됐다.

박종환 감독과 주축 선수들은 귀국해서도 영웅 대접을 받았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신군부는 “이 팀이 88년 올림픽 대표팀의 주축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집중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온 국민이 ‘88팀’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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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공 신화는 여기까지. 박종환 감독은 1986년 대표팀을 맡았지만 88년 7월, 올림픽 개막을 2개월 남기고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됐다. 결국 그해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는 2무1패로 조 예선 통과에 실패했다. ‘83년 멤버’ 가운데 소기의 목적대로 88년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뛴 선수는 수비수 김판근 정도였을 뿐, 신연호와 김종부 등 발군이었던 선수들은 여러 이유로 한국 성인 축구의 간판이 되지 못했다. 83년 당시 한국을 꺾고 우승한 브라질의 베베토와 둥가·조르징요 등이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가 되어 1994년 미국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축구에서만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분야에서 ‘한국 청소년’은 세계 수준의 기량을 과시했다.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나 과학 올림피아드 무대에서도 한국 고교생들이 지난 20여 년간 거둔 성적이 좋은 예다. 하지만 이들이 성인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자라났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어느 분야에서나 장기적인 성장보다는 즉시 점수를 딸 수 있는 편법만 판을 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홍명보 감독의 데뷔작인 이번 젊은 영웅들은 ‘한국 축구의 미래’로 커나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끝)


1983년 청소년 팀의 기적같은 4강 신화는 이미 리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브라질만 베베토나 둥가 같은 저런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8강에서 탈락한 네덜란드 멤버 가운데에도 그 이름도 거룩한 마르코 반 바스텐이 포함돼 있더군요.

잘 키운 청소년 대표팀이 미래의 주축이 되는 경우는 여러 차례 목격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1991년, 피구와 코스타 등이 이끈 포르투갈의 '황금세대'죠. 이들의 힘으로 포르투갈은 유로 2000 등에서 좋은 성적을 내며 일약 유럽 축구의 주도국 대열에 진입했습니다. (사실 이들이 가장 화려하게 꽃필 것으로 예상됐던 2002 월드컵 무대는 주최국 한국과 같은 조가 되는 바람에 망쳐졌다는 느낌도 있죠. 이 대목에서 잠시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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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8년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 당시 공포의 투톱이었던 앙리와 트레제게도 바로 1년 전인 97년 U-20 대회에서 곧바로 두각을 보였습니다. 이때의 프랑스도 8강 진출국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예선 같은 조였던 한국은 앙리와 트레제게에게 각각 두골씩을 내주며 2대4로 참패했습니다. 이관우가 이끌던 당시 한국 팀은 박진섭이 두 골을 넣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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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한국이 국제대회 대진운이 별로 안 좋은 편이긴 하지만 이 해의 대진은 참 볼만합니다. 브라질-프랑스-남아공과 한 조. 아, 물론 이 대회 전까지 프랑스의 느낌은 지금 같은 강팀의 느낌은 아닙니다. 이 대회를 계기로 프랑스도 축구 강국의 면모를 되찾았죠.

이 대회 최고의 참극은... 당시 브라질에게 당한 3대10의 참패입니다. 지금 볼로냐에서 뛰고 있는 아다일톤에게 무려 6골을 먹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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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등등의 성공사례들이 있습니다. 반면 한국의 83년 멤버들은 그 뒤로 화려하게 개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관심을 모으고 집중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멤버들 치고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입니다.

88년 대표팀에 속했던 83년 멤버들은 김판근 김종건 김풍주의 세 사람입니다. 이중 주전으로 자리잡은 것은 김판근 정도였죠. 물론 2년 전에 열린 86년 월드컵 대표에 속했던 김종부가 있지만 프로 진출과 관련, 복잡한 스카우트 파문에 휘말려 운동을 쉬면서 성인 무대에서는 기대했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골감각을 자랑했던 신연호는 물론이고 '제2의 스트라이커'였던 이기근 역시 88년 K-리그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지만 국가대표와는 별 인연이 없었습니다. 이건 물론 당시의 기형적인 대표팀 운영과도 관련이 깊죠. 90년대까지 역대 K-리그 득점왕들은 대부분 국가대표에서는 소외된 선수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왜 김주성은 거론되지 않나 하실테지만 김주성은 '88팀'의 주요 멤버였긴 했지만 '83년 멤버'는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김주성도 83년 멕시코에 뛴 것으로 착각하시는데 김주성은 83년 4강 이후 88팀의 육성 과정에서 최진한 김삼수 황영우 여범규 등과 함께 뒤늦게 발굴된 선수들 중 하나였던 것이죠. 물론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 축구의 주축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만, 윗글은 '83년 멤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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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거듭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한국은 그동안 유독 '청소년만 강한 나라'의 면모를 여러 분야에서 보여왔다는 것입니다. 수학과 과학 올림피아드의 예도 들었지만 그에 앞선 기능올림픽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스포츠의 여러 종목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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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감독은 2012년 올림픽까지 일단 지휘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이번 대회가 U-20(20세 이하)이고 올림픽은 사실상 U-23 대회인 만큼, 2009년과 2012년의 연관성은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물론 축구계의 비주류였던 박종환 감독과 대한민국 축구의 적자인 홍명보 감독의 입지를 비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연히 훨씬 좋은 여건과 지원이 이뤄지겠죠. 부디 어젯밤 눈물을 흘리던 선수들이 3년 뒤 런던에서는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때에는 8강 이상의 성적을 내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블로그 방문의 완성은 한번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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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일본 총선에서 만년 여당 자민당이 침몰하고 사실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일어난게 지난 8월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조용히 묻혀 지나간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이쪽으로 가져올 타이밍을 놓쳐 버렸는데, 바로 일본 최고의 스타, 여자들이 매년 뽑는 '최고의 남자 연예인'에서 10년 넘게 일본 최고의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는 기무라 타쿠야와 소속 그룹 SMAP이 관련된 사건입니다. 만약 한국에서 SMAP 정도로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 여당인 한나라당을 공개 지지하며 '구관이 명관'이라고 옹호하고 나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기 있는 연예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가 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일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굳이 이름을 달자면 'SMAP의 자민당 지지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미 전해 들은 분도 있겠지만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비교할만한 한국 사례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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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스타의 한마디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장에 당대 최고 인기 코미디언 김병조가 등장했다. 그가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 통민당(당시 통합 야당이던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말하자 박수와 웃음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다음 날 언론에 보도되자 대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김병조는 하루아침에 방송·광고계에서 퇴출돼 '자숙'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받은 대본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도 소용없었다.

일본의 총선 열기가 절정으로 치닫던 지난 8월 26일, 대표적인 우익 언론인 산케이 신문에 희한한 광고가 실렸다. 신문을 완전히 싼 4페이지짜리 래핑 광고. 겉보기엔 일본 최고의 인기 그룹인 남성 5인조 스마프(SMAP)의 새 음반 광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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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안쪽 두 페이지 내용.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방법'이란 제목의 글이 SMAP 멤버들의 명의로 실려 있었다. 내용은 '경기가 좋으면 총리도 인기가 있고, 경기가 나빠지면 인기도 떨어진다' '행복한 미래는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남 탓하기는 쉽지만 막상 자기가 직접 하려 하면 뭐든 힘든 법이다' 등등.

긴 글 어디를 봐도 '자민당'이나 '민주당'이라는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지만 누가 봐도 의미는 불 보듯 선명했다. 위기에 몰린 집권 자민당을 응원하는 노골적인 메시지였던 것이다.

서구 언론들은 이런 기이한 현상을 크게 보도했다. 일본 주오 대학의 스티븐 리드 교수는 영국 텔레그래프지와의 인터뷰에서 “스마프가 정치 캠페인에 동원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자민당이 얼마나 절박했는가를 보여준 증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해외에서의 이야기다. 정작 일본 내에서는 이 사건을 거론한 언론 보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 광고가 실린 신문은 품귀현상 속에 인터넷 경매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됐지만, 그 내용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 강요된 말 한마디로 방송에서 퇴출되는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만약 한국의 인기 아이들 그룹이 선거를 앞두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글 한 줄이라도 미니홈피에 쓴다면 그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한해협 양쪽에서 '연예인의 발언'에 실리는 무게가 이토록 다른 이유가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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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펼쳐 놓으면 이런 내용의 광고입니다.

위에 대략 정리를 했지만 주제만 얘기하면 '지금 있는 사람들도 선거로 뽑은 정치인들 아니냐. 사실 막상 일 시켜 놓으면 거기가 거기다. 구관이 명관이다.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지해라. 바꿔 봤자 별수 없다...' 이런 내용입니다.

정말 자민당이 얼마나 다급했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죠. 하지만 일본의 수많은 신문-방송 가운데 이 문제를 짚고 나선 곳은 거의 없는 듯 합니다. 블로고스피어가 좀 시끄러웠고, 그걸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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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팬들은 그 래핑 광고가 담긴 신문을 서로 사고 파느라 정신이 없더군요. 일본 옥션의 매물 페이지입니다. 꽤 전에 캡처한 화면이라 지금은 다 없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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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문이 옥션에서 거래될 정도로 인기 높은 SMAP인데 정작 그 메시지는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다니.... 이건 광고를 낸 쪽이 서운해해야 할 일인지, 아니면 SMAP 쪽에서 서운해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 사건은 일본 정치를 바라보는 해외 매체들 사이에서만 화제가 됐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쟈니즈쪽에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광고를 한 것이냐'고 문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답은 '이건 아무런 정치적인 의도가 없는, 그냥 SMAP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글일 뿐'이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제정신인 사람 가운데 저 글을 SMAP 멤버들이 직접 썼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누가 보나 쟈니즈와 극우 언론 산케이의 합작품이겠지만 이런 일에 말려들어 이름을 내주고도 아무 소리 없는 SMAP 멤버들이나, 거기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SMAP 팬들이나, 언론 매체들이나 한국적인 시각에서 보면 참 신기합니다.

한국같으면 이런 눈가리고 아웅하는 수작이 통했을까요. 어림도 없겠죠.

문득 떠오르는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윗글에 나오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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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1987년 6월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하신 말씀은 이런 식으로 보도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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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내용이었지만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1987년 6월. 바로 뜨거웠던 '6월 항쟁'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앞선 4월29일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선언이 있었고, 6월10일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후보가 민정당의 차기 대권 후보로 지명됐습니다. 이때를 전후해 민심은 들끓었고, 마침내 6월29일 노태우 후보는 당시 헌법의 대통령 간접선거 조항을 포기하고 직선제 개헌을 통해 87년 연말 대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무튼 이건 좀 지난 다음 얘기고, 바로 다음날 신문 만화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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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시청자들의 항의로 MBC는 김병조씨의 방송 출연을 제한할 것을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김병조씨가 출연하는 방송은 모두 MBC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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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일만인 6월13일. 김병조씨는 스스로 '당분간 쉬겠다'고 선언합니다.

'지구를 떠나거라' 등의 유행어, '나도 리도 샴푸를 써야겠다'는 등의 광고로 세상에 거칠 것이 없던 인기 코미디언이 하루 아침에 야인이 돼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연예인이 무슨 힘이 있나. 시키는데 어떻게 안 하냐"는 항변은 일면 일리가 있는 얘기였지만 성난 여론은 그런 변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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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나는 이름들이 몇명 더 있지만, 아무튼 김병조씨는 당시의 뜨거웠던 정치 열기에 애매하게 희생된 케이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한국과 너무나 대조적인 일본의 반응. 과연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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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케이블TV 사상 최고의 히트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도 막바지에 달해 최종 승자 가리기에 들어갈 전망입니다. 이 프로그램이 처음 예선을 시작한다고 홍보에 열을 올릴 때가 엊그제같은데 벌써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군요.

지난 주에 이 프로그램은 MC와 심사위원 한명을 교체했습니다. 예정된 수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시청자들의 방송평과 일치하는, 적절한 교체였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심사만 시청자 피드백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 셈이죠.

'슈퍼스타K'가 본선을 시작했을 무렵, 시청자들로부터 적잖은 불만(?)이 터져나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엄격한' 심사위원들의 투표 결과(10%)가 아니라 네티즌들의 투표(70%)에 의해 사실상 상위 입상자가 결정된다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의견이 꽤 많았죠.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 '공평'과 '불공평'을 나누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의견입니다.



슈퍼스타 K가 불공평하다고?

요즘 QTV '열혈기자'라는 프로그램에 관여하고 있다. '열혈기자'란 연예기자를 지망하는 젊은이들(물론 지원자는 수백명이었다)에게 매주 미션을 부여하고, 수행 결과를 토대로 매주 한두명씩을 떨어뜨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남는 한 사람은 일간스포츠 연예기자로 채용된다. 부상으로는 차를 한대 준다.

이 도전자들에게 기사 연습 삼아 현재 방송되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들의 리뷰를 시켰더니 한 친구가 M.net의 '슈퍼스타 K'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껏 최고 가수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매긴 점수는 10%만 반영되고 네티즌 투표가 70%를 차지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 불공평한 제도라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정말 불공평한 제도일까? 수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도전자를 탈락시키는 방법은 크게 나눠 세가지다. 같은 도전자들끼리 평가해 떨어뜨리는 방법('서바이버', '배첼러' 등), 심사위원들이 평가를 해 떨어뜨리는 방법('어프렌티스', '프로젝트 런웨이' 등), 그리고 시청자나 네티즌들이 떨어뜨리는 방법('아메리칸 아이돌' 등)이다. 마지막 방법은 앞의 두 방법에 대해 불공평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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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일단 프로그램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슈퍼스타 K'는 대중 가수를 선발하는 프로그램이다. 최고의 대중 가수는 어떤 사람인가? 전문가들이 최고라고 인정하는 사람일까? 사실 그렇지 않다. 어느 시대나 '비운의 명가수'라는 이름으로 소수 마니아들의 칭송을 받지만 최고의 자리에선 한발 비껴 가는 가수들이 있다. 자주 예로 드는 코멘트지만, 한때 최고의 남성 R&B 보컬이었던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내한 공연 때 기자회견에서 "농구에선 가장 골을 잘 넣는 마이클 조던이 최고지만 팝계에선 가장 노래 잘 하는 사람이 최고의 스타가 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부분을 인정한다면, 전문가들인 심사위원들이 1위를 선정하는 것보다 대중이 직접 ARS 투표를 통해 떨어뜨릴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결코 '불공평한' 일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사실 불공평하다면 대중의 인기라는 것이 본래 '공평'과는 거리가 멀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뽑았다는 칸 영화제 그랑프리작이 흥행에서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심지어 이보다 훨씬 대중적이라는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역시 정작 일반 관객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때가 많다.

그렇다고 아예 작정하고 대중적으로 만들면 늘 대박이 나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는 늘 도박성을 띤다. 그나마 실력과 인기의 차이가 가장 적은 분야는 스포츠다. 그 스포츠에서도 팬들이 뽑은 인기 순위 1위와 전문가들이 뽑은 실력 1위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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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확장시킬수록 대중의 선택이란 점점 더 믿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가장 잘 만들어진 자동차가 항상 판매 1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최고 품질의 상품이 반드시 시장 점유율 1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온 세상의 민주주의 국가 국민들에게 '지금 당신네 나라의 국가원수는 당신네 정치인들 가운데 제일 뛰어난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어떤 답이 나올까?

그런 면에서 '슈퍼스타 K'의 방식(혹은 그 원조인 '아메리칸 아이돌'의 방식)은 대중의 잔혹함과 변덕스러움, 그리고 때로 이해하기 힘든 반응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좋다는 건 아니다. "불공평하다고? 어쩔 수 없어. 그게 바로 세상의 이치니까…"라고 안영미 흉내를 내긴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대중과 평단을 모두 감동시키는 진짜 천재가 불쑥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웅크리고 있다. 사실은 이런 희망이 '슈퍼스타 K'를 지탱하는 진짜 힘일 지도 모른다.

P.S. 그럼 '슈퍼스타 K'에서 대중이 선택한 최종 우승자는 켈리 클락슨 같은 슈퍼스타의 자리가 보장되는 거냐고? 어허. 지금까지 뭘 들으셨나. 대중에게 어떤 식이든 변덕 없는 일관성을 기대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좌절로 끝난다니까. 그건 그때 가 봐야 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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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관련된 각종 산업은 모두 동전던지기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만치 현재까지의 추세로 미래의 경향을 점치는 것이 그야말로 '점치는' 수준에 가깝다는 얘기죠. 가장 믿을만한 생산 단위들을 이용해 콘텐트를 만들어도 기대했던 결실이 나올지 안 나올지에 이르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슈퍼스타 K'는, 말하자면, 대중문화의 생산 단위에서 최종 소비자에 이르는 중간 마진을 제거하려는 시도입니다. 생산자들이 직접 대중 앞에 나서서 우리의 가치를 매겨 달라고 요청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중의 직접 평가가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기 때문에, 여기서 배출된 승자들은 그만치 스타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다만, 이 가능성 역시 '높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분명히 뜬다'고 말하기는 힘들 겁니다. 대한민국 연예계로 진출하는 채널이 바로 이 '슈퍼스타 K'하나로 한정되어 있다면 모르지만 반드시 그럴 거란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프로그램이 케이블 TV로서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이 전체 대중의 취향을 대변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수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릅니다.

같은 이유로 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들'의 경우에도, 모든 우승자가 승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슈퍼스타 K'는 미국 시장에 비해 턱없이 위축돼 있고 지금 이 순간도 무너져가고 있는 유료 음악 시장을 무대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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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대중이 직접 뽑은' 이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정작 음반을 내놓고 프로로 데뷔했을 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다면 - 물론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지만 - 그거야말로 대중의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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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가 감독판 상영 등으로 화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흥행 최고점은 지나친 듯 하지만 뒤늦게 이 영화를 보는 분들이 아직 적지 않은 듯 합니다.

'국가대표'가 주는 메시지는 자명합니다. 21세기의 '겉으로는 최첨단'인 대한민국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영화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타인에 대한 관용의 결여'라는 부분에 대한 비판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속 밥(헌태)은 스키 점프 대표팀의 정체에 대해 안 다음 자신이 이용당하고, 또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국가대표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낀 사람들은 그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재일동포인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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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가대표

관객 800만 동원을 앞둔 영화 '국가대표'에는 밥(하정우)이라는 재미동포가 나온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아예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되지만 밥은 애국가 1절 가사도 모른다. 자연히 '양키 새끼'라며 욕하는 동료와 갈등을 빚는다.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니다. 재일동포 출신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은 1961년 1월 1일 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때 처음 국가대표로 뽑혔다. 당시 나이 19세. 59년 8월 7일 재일동포 학생야구선수단의 일원으로 한국 땅을 밟은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최근 출간된 자전적 에세이집 『꼴찌를 일등으로』에 따르면 가네바야시 세이콘(金林星根)으로 불리던 소년은 한국에 와서야 자기 이름이 '김성근'이라는 걸 알았다.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동포 여학생의 미소는 따뜻했다. 처음 먹어 보는 불고기 맛에 반했고 영화 '비극은 없다'의 주인공 김지미에게 매료됐다. 동료 선수의 친척들이 숙소로 찾아오면 그때마다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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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좋지만은 않았다. 경기 도중 교포 투수의 공이 경남고 4번 타자 박영길의 머리를 맞히자 관중은 일제히 '쪽발이 물러가라'며 야유를 보냈다. “일본에서 조센진이라고 차별받고 사는 것도 서러운데, 재일동포 선수단을 구성하는 일도 얼마나 어려운데, 쪽발이라니….” 국가대표가 된 뒤에도 '쪽발이'라는 수군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일민족'의 순혈주의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인기 아이들 그룹 2PM의 리더였던 재미동포 출신 박재범은 4년 전 인터넷에 남긴 몇 마디 불평 때문에 하루아침에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고향인 시애틀로 돌아가는 신세가 됐다. '군대도 안 가는 교포'라는 이유가 그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북돋웠다. “한국에서 돈만 벌어 돌아갈 거라면 지금 당장 꺼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혹시 한국식 생활 방식과 예절에 익숙지 않다는 이유로 4년 전의 그를 몰아붙인 결과가 '난 한국인들이 싫어(I hate Koreans)'라는 불만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을까. 그 실수 하나로 등을 떠밀듯 보낸 조국은 과연 그에게 어떤 나라로 기억될까. 그를 바라보는 다른 동포 청소년들에게 '대한민국'은 까다롭고 차갑기만 한 나라로 기억되는 건 아닐까. 2009년 현재 재외 한인의 수는 682만 명에 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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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은 - 가끔 해설자로 TV에 나오는 걸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 아직도 한국어 발음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특히 ㅇ 받침 발음은 절대 안 되는 편입니다.^ 그의 아들 김정준은 그에겐 여전히 '존준'입니다. '꼴찌에서 일등으로'를 보면 '고려왕'이라는 브랜드의 CF 모델로 나섰을 때 '고려왕'이 '고려완'으로 발음되는 바람에 수없이 NG를 낸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 그가 1961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지 1년 반만에 국가대표가 됐을 때는 어떤 상태였을지 쉽게 상상이 됩니다. 1년 반을 모두 한국에서 산 것도 아닙니다. 학생야구단 원정을 왔다가 일본으로 돌아갔고, 고교 졸업후 프로 구단과 사회인 야구단 진출이 좌절된 뒤 한국 동아대에 스카웃되어 6개월 정도(그러니까 야구 시즌 동안) 선수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철도부 야구단의 선수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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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에서 일등으로'에는 '쪽발이라는 말을 들어도 올 수 있는 조국이란게 있다는게 좋았지만, 조국은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국가대표 투수로, 60년대 실업야구의 에이스로 명성을 떨친 그였지만 워낙 외곬수인 성격 탓인지, 아니면 서투른 한국어 탓인지 그는 수시로 코너에 몰렸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조국'을 따뜻하게만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한때 삼성에 김성길이라는 투수가 있었습니다. 언더스로로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죠. 그도 몇 차례 이런 어려움을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부산이나 광주 경기에서 이기고 있으면 어김없이 '이 쪽발이'라는 야유가 날아왔다. 일본에서는 내가 속한 팀이 이기고 있으면 '조센진'이라는 야유가 날아왔다. 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불과 15년 전 일입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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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민족과 순혈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재외 한인의 수는 700만에 육박합니다. 결혼이나 기타 이유로 아예 이 통계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닐 겁니다.

그 자손들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인의 생활 방식이나 문화를 자진해서 이어 가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먼 해외에서 그런 문화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을 배척하다 보면 결국 한국은 자꾸 작은 나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윗글에서는 분량때문에 제외했지만, 700만에 달하는 재외 한인은 물론이고 한반도 안에서의 '다문화 가정'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용모는 같지만 한국말도 못하는' 부류와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어딘가 용모가 이질적인' 사람들은 이미 '한국인'이라는 집단을 구성하는데 있어 무시할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단일민족의 신화에 매달리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풍토가 자리해야 합니다. 더 넓게 수용하지 않으면 이 나라 앞에는 점점 더 쪼그라들거나, 쪼개지는 길이 선명해 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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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idol) 그룹 멤버들의 수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방신기 사태는 물밑에서 장기화되어 가는 듯 하고, 2PM의 리더 재범이 미국으로 돌아간데 이어 SS501의 김현중은 신종 플루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공통점 없는 사건들이지만 이런 뉴스들이 일으키는 반향을 보면, 이들의 팬이 아닌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대체 아이들이 뭐길래'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한국은 1996년 H.O.T의 출현과 함께 아이들 시대를 맞게 됩니다. 10년이 조금 넘은 역사죠. 아이들 그룹의 운영이나 결성에 있어 아직 한국은 초보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 그룹이라는 존재와 사회적인 영향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경우를 참고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아이들 그룹을 만들고, 독특한 운영 노하우를 키워온 나라가 바로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아이들 그룹 운영은 올해로 47년에 달합니다.

일본 아이들 그룹을 오래 전부터 좋아하고, 자니즈의 팬이었던 분들에게는 상식적인 내용일 겁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의 '아이들 입문'을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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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펑크라는 문학 장르를 세상에 알린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의 장편 소설 중에 '아이도루(Idoru)'라는 작품이 있다. 1997년작이다 보니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일본의 사이버 가수 교코에 착안한 미래 사회의 사이버 스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왜 책의 제목은 아이들(Idol)이 아니라 아이도루(Idoru)일까. 당연히 '아이도루'는 '아이들'의 일본식 발음이다(사실 한국에도 '아이들'보다는 '아이돌'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심지어 몇몇 언론사는 '아이돌'이 공식 표기 방침이기도 하다). 깁슨은 소위 '만들어진 아이들 스타'는 미국보다 일본이 원조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아이들 그룹이라는 용어의 정의가 필요할 듯 하다. 보통 팝 아이들(pop idol)이라고 하면 십대들이 열광하는 인기 스타를 통칭하게 된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그렇고 비틀즈도 그랬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이들 그룹이라는 말은 특정한 형태의 뮤지션들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즉 ▲10대 초반, 늦어도 10대 중반부터 전문적인 기획자에 의해 발굴된 멤버들로 구성돼야 하고 ▲데뷔 전 상당기간의 트레이닝을 거쳐야 하며 ▲가사와 음악 역시 전문적인 기획자들에게 의존하며 ▲팬들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해가는 운명을 갖는다는 점이 아이들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팀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준에 따라 볼 때 서태지와 아이들은 팝 아이들이긴 하지만 아이들 그룹은 될 수 없다.

영미권에서는 보이 밴드(boy band)라는 말이 좀 더 보편적으로 쓰인다. 이 말 역시 사용되면서 의미가 조금씩 변했다. 처음 쓰인 것은 마이클 잭슨과 형들로 이뤄진 잭슨5가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한 1968년 무렵이다. 이 시기의 보이 밴드라는 말은 그냥 나이 어린 멤버들로 이뤄진 그룹이라는 정도였지만, 1984년 뉴 키즈 온 더 블럭이 신화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보이 밴드=아이들 그룹'이라는 시각이 보편화됐다.

그런데 아이들 그룹의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마이클 잭슨과 잭슨 5가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인 1962년, 이미 오늘날의 형태와 거의 차이가 없는 아이들 그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일본에서 결성된 사상 최초의 아이들 그룹 자니즈(Johnny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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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31세였던 자니 기타가와는 16세의 마이에 히로미와 이이노 오사미, 15세의 나카타니 료, 14세의 아오이 테루히코 등 네 미소년을 모아 10대 소녀들을 겨냥한 그룹을 만들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태생인 기타가와는 주일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가 우연히 음반 기획자로 변신했다.

자니즈는 멤버들 개개인의 매력은 물론 쉽고 밝은 노래,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춤과 몸짓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또 멤버들은 청소년 대상 영화와 드라마에도 출연하며 다양한 재능을 뽐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기타가와는 아예 재능있는 소년들을 조기에 발굴해 제 2의 자니즈로 키워낼 수 있는 기획사를 창업한다. 이것이 바로 자니즈 사무소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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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자니즈라는 이름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일본 연예계에 손톱만큼의 지식만 있다면 자니즈 출신 보이 밴드들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6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들 그룹이 자니즈라면 70년대에는 포 리브스(Four Leaves)가 있었고 80년대에는 본격적인 댄싱 아이들 그룹 쇼넨타이, 즉 소년대(少年隊)가 위력을 뽐냈다. 1984년 3인조로 구성된 쇼넨타이의 인기는 곧바로 국내에도 이어져 소방차라는 대체 그룹이 만들어졌다. 물론 자니즈의 최대 걸작은 1991년 데뷔한 SMAP다.

1988년, 기타가와는 당시 인기 아이들 그룹이던 히카루 겐지의 백댄서로 12명의 소년 댄싱 팀을 가동시켰다. 이미 스타가 되어 있는 팀과 함께 무대에 세움으로서 누가 실전에서 통할지를 검증하는 방법이었다(이런 시스템은 나중에 자니즈 주니어라는 '2군' 체제로 확립된다). 이 12명 중 기무라 타쿠야, 나카이 마사히로, 구사나기 츠요시(초난강), 이나가키 고로, 가토리 신고, 모리 가쓰유키의 6명이 SMAP이라는 새로운 팀으로 선택됐다. 1991년 이들이 정식 데뷔했을 때의 나이는 나카이와 기무라가 19세, 이나가키와 모리가 18세, 구사나기가 17세, 막내인 가토리는 14세였다.

일본 아이들 역사상 최고의 그룹으로 불리는 SMAP은 1993년 '캐릭터 부여'라는 새로운 전략과 함께 순항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전략에 따라 나카이는 열정적인 리더, 이나가키는 시니컬한 귀공자, 구사나기는 배려심 강한 착한 친구 등의 이미지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기무라 다쿠야가 드라마에 데뷔하며 뒷날 일본 최고의 인기남으로 발돋움할 계기가 만들어진 것도 1993년의 일이다. 1996년 모리의 탈퇴로 5인조가 된 SMAP은 오늘날까지도 그룹을 유지하면서 멤버 개개인이 모두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이 함께 진행하는 토크쇼 'SMAP X SMAP'에 게스트로도 초대되느냐 마느냐는 한류 스타들이 일본 내에서 스타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의 기준으로 통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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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P 이후에도 자니즈는 V6, 아라시, 캇툰(KAT-TUN) 등 최정상의 인기 그룹들을 배출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여성 멤버가 단 한명이라도 있는 그룹은 배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자니즈는 1980년대 오렌지 시스터즈라는 여성 그룹 프로젝트를 시도하다 실패한 것 외에는 아예 여자 연습생을 받지 않고 있다.

이런 운영은 곧바로 기타가와의 성적 취향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기타가와는 여러 차례 자기 휘하 아이들 멤버들에 대한 성희롱 혐의를 받았다.

1999년, 일본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슈칸분슈운(週刊文春)은 자니즈 내부의 성추행과 음주, 흡연 등 어두운 구석을 캐는 기획기사를 보도했다. 이로 인해 자니즈에 대한 경찰 수사가 진행됐고, 기타가와는 의회 청문회에도 나서야 했다. 혐의를 전면 부장한 기타가와는 곧 슈칸분슈운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재판은 5년 이상 진행되다가 결국 '슈칸분슈운 측의 취재에는 자니즈의 비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보도할만한 근거가 있었다. 단 음주와 흡연 부분에서 자니즈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다소 애매한 결론이 내려졌다. 물론 이런 내용 역시 주요 언론에 의해서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자니즈는 지금도 최고의 미소년 아이들 그룹들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동성애나 성추행 부분을 제외하고 한국의 아이들 업계는 대동소이하게 자니즈 모델을 모방하고 있다. 90년대 초에도 잼이나 투투, 룰라 같은 댄스 그룹들이 인기를 얻었지만 최초의 한국형 아이들 그룹이라면 아무래도 1996년의 H.O.T를 꼽게 된다. 이후 SM이 S.E.S와 신화, 대성기획(현 DSP)가 젝스키스와 핑클을 내놔 성공을 이어가자 이들을 모방한 그룹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하지만 급조된 아이들 그룹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SM과 대성기획 이외의 기획사 소속 아이들 그룹 중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것은 소방차 멤버 출신 김태형이 제작한 NRG 정도일 뿐, 나머지는 대부분 단명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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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와 가요계의 경기 추락은 '신생 아이들 그룹'의 맥을 끊었다. 아이들 그룹은 고비용일 수밖에 없다. 연습생이건, 데뷔 초년생이건 백댄서와 스태프를 포함해 장정 10~20여명이 몰려다니면 밥값이나 교통비만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다.

공백을 깬 건 역시 SM. 2004년 등장한 동방신기는 오랜만에 아이들 그룹에 목말랐던 10대 팬들에게 감로수 역할을 했다. 4~5팀을 만들 에이스들을 뽑아 한 팀에 몰아넣었으니 자질은 우수할 수밖에 없었고 동방신기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아이들 그룹 비즈니스의 필연인 장기 계약과 처우 문제는 또다시 그룹의 장래에 암운을 던졌다.

일본이라면 어땠을까. 자니즈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기본적으로 모든 계약은 주기적으로 갱신되지만 사실상 종신 계약이라고 보는 게 좋다. 자니즈가 포기하지 않는 한, 스스로 자니즈를 벗어나 연예계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니 기타가와와 슈칸분슈운의 법정 분쟁이 진행중인 기간에도 분슈운(文藝春秋)계열의 매체를 제외하곤 어떤 방송이나 신문도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만치 자니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한류 스타들을 놓고 일본 매체 기자들이 가장 의아해 하던 것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무소(소속사)가 자주 바뀌냐"는 것이었다. 일본식 사고방식으로 보면 동방신기의 이익 배분 논란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자니즈는 물론 어떤 기획사에서도 한창 인기가 치솟는 20대 초반의 청춘 스타들은 돈을 벌지 못한다. 소속 연예인들은 연공 서열과 왕년의 활동 경력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 당장 인기 있는 최고 스타보다 10년 20년 '근속'한 왕년의 스타들이 훨씬 더 많은 돈을 가져간다. 이것이 일본의 '사무소' 시스템이다. 일본 연예인들에게 데뷔 5년째인 가수들이 1인당 20억원 넘게 돈을 벌었다고 하면 눈이 휘둥그레 질 것이다.

아이들 그룹이란 연예계의 냉혹함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학업과 학교생활로 보낼 10대 시기를 이른 직업훈련으로 보낸 아이들 그룹 멤버들은 춤과 노래, 그리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을 제외하면 성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들이 결핍되기 쉽다. 물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설사 아이들로 성공한다 해도 그 전성기는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찬란한 시기를 되새김하며 범죄의 유혹에 빠져드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함을 동경하는 10대들은 날로 늘어가는 추세다. 결국 이들에게 조언해줄 어른들의 현명함만이 비극을 줄일 수 있다.
(끝)



좀 더 길게 썼어야겠지만 주어진 지면의 한계로 이 정도에 끝냈습니다. 미국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의 비교 등도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쇼넨타이가 활동하던 80년대만 해도 한국은 단순히 일본 대중문화의 모방국이었습니다. 쇼넨타이가 준 충격이 바로 이 분들을 만들어 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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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한국 최초의 아이들 그룹(?)이라고 봐도 좋을 이 분들은 당시에는 초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분들이 성공을 거둔 이후로 차츰 댄스 그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햇죠. 일본과는 달리 혼성 그룹들이 두각을 보였습니다. 윤현숙의 잼을 비롯해 투투와 룰라의 전성기가 있었고, 노이즈도 이 시기를 빛낸 그룹이죠.

그런 시기를 지나 이제는 한국산 아이들이 일본 시장을 넘나들며 한류를 이끌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아이들 그룹이라고 해도 일본에서는 10대 시장을 공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등의 문제는 있지만 절대적인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모한 것만으로도 상황은 고무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 그룹의 육성과 운영은 꽤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습니다. 물론 그 멤버 개개인에게는 인생을 좌우하는 학교생활과 바꾼 배움의 장이라는 면에서 더더욱 그렇죠. 글 말미에 '어른들의 책임'을 강조한 것은 그런 부분들을 고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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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아이들 그룹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팬들입니다. 팬덤의 결집과 육성, 관리는 아이들 그룹의 생존과 지극히 밀접한 관계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팬들의 사랑은 맹목적이라는 겁니다. 이들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애당초 정상적인 판단을 요구한다면 아이들 그룹이라는 현상 자체가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팬들의 이런 맹목적인 사랑은 가끔 아이들 아티스트를 잡아먹기도 합니다. 지나친 팬들의 사랑은 가끔 스토킹으로 변하기도 하고, 안티 팬들을 불러모으기도 합니다. 팬덤은 흔히 아이들의 기획사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그릇된 판단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가끔 팬들은 아픈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도 긴 주삿바늘이 아기를 찌르는 걸 볼 수 없다며 한사코 아기를 내려놓지 않는 엄마를 연상시킬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팬들의 사랑은 아이들 아티스트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때로 팬들은 그들의 우상을 죽인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기도 합니다. 요즘도 팬들의 바보같은 사랑때문에 완전히 재기불능이 될 지도 모르는 한 아이들 아티스트의 모습에 눈길이 갑니다. 과연 그 팬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바로 '오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짧은 글에 많은 내용을 담느라 부실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연재를 하다가 > 여기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요즘은 스타 아나운서가 없을까  (52) 200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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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가 소리소문 없이 귀국하려다 길목을 지키던 취재진에게 '적발'됐습니다. 느닷없이 카메라를 발견했으니 놀랐을 법도 한데 찍힌 사진을 보면 우아하기만 합니다. 역시 월드스타답게 취재진을 발견한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얼굴을 가리거나 어설픈 달리기로 '못볼 꼴'을 찍히는 우를 범하지 않았더군요.

사진들을 보니 입국검사장보다 훨씬 안쪽인 방역검색대 앞에까지 진출해서 찍은 사진도 있던데 이 지점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같은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속사정을 알고 보니 취재진의 치밀함이 참 놀랍습니다. 경쟁매체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스타들을 추적하는 취재진도 고생이지만, 문득 소위 신비주의 노선을 가고 있는 스타들도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렇게까지 대중과의 접촉을 피하는 데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문득, 거의 80년 전부터 신비주의를 몸소 실천했던 한 스타의 일생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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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비주의

1936년 11월 23일, 미국의 사진 전문 주간지 라이프(Life)는 창간 특집으로 그레타 가르보의 화보를 실었다. 인터뷰는 없었다.

당시 최고의 톱스타로 군림했던 가르보는 화면 밖에서는 철저하게 은둔자의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데뷔 초기를 제외하면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팬들의 사인 요청도 거절했으며 자기가 주연한 영화의 시사회에도 참석을 거부했다. 41년 은퇴 후 90년 사망할 때까지 어떤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비주의의 원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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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신비주의(mysticism)란 ‘자연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 절대자와 소통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신비주의라는 말은 ‘대중과의 소통을 극도로 기피해 자신을 신비로운 존재로 남겨두려는 연예인들의 전략’을 가리키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의미의 ‘한국적 신비주의’는 마땅히 영어로 옮길 말이 없다. 간혹 비유적인 의미로 쓰이는 가르보이즘(Garbo-ism)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평소 이런 신비주의의 화신으로 꼽히던 이영애가 결혼까지도 극비리에 치러 화제다. 남편의 신원을 일절 공개하지 않은 채 해외에서 식을 올리고, 결혼 이튿날 법무법인을 통해 사실 통보만을 한 결과 온갖 억측과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쏟아지고 있다. 이영애의 행동에 대해서도 국민적인 스타로서 팬들에 대한 예의를 잊은 행동이라는 비판론과 아무리 스타라 해도 스스로 사생활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는 옹호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분위기다.

사실 이영애에 대한 이런 큰 관심은 본인이 자초한 것으로 보인다. 가르보의 전기 작가인 존 베인브리지는 “결국 언론 보도에 대한 지나친 공포가 그녀를 역사상 가장 파헤쳐 보고 싶은 존재로 만들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신비화한 결과가 필요 이상의 궁금증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일부 팬이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결혼으로 인한 논란이 장기적으로 이영애에게 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정작 걱정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마땅히 내세울 출연작도 없이 그저 이영애풍의 신비주의를 추종하며 30초짜리 CF를 대표작으로 삼고 있는 일부 스타들이다. 이영애야 10년 뒤에도 ‘대장금의 이영애’로 기억되겠지만, 과연 그들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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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위에서 말했듯, '대중과의 직접 접촉이나 매체를 통한 접촉을 모두 극도로 기피하는 경향'을 과연 '신비주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약간 복잡한 문제입니다. 제1감으로는 누군가의 무신경한 오용이 굳어진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비'와 '소통'이라는 키워드 때문에 아주 얼토당토 않은 적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한국어로 연예인들의 '신비주의'라고 쓰고서 그걸 mysticism이라고 옮겼다간 큰일 난다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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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우면서도 차가운 미모로 근 20년간 톱스타의 자리를 지킨 가르보의 은둔생활은 여러 모로 특이합니다. 가르보는 신분을 감추고 어디 적막산골로 간 것이 아니라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맨하탄 한복판의 고급 아파트에서 만년을 보냈습니다. 라이프는 만년에도 가르보를 몇번 더 괴롭힌 적이 있지만, 가르보는 입을 꼭 다물고 취재진을 뿌리쳤을 뿐입니다. (위 사진은 사망 4일 전 '라이프'가 포착한 1990년의 가르보입니다. 지팡이를 들어 사진기자에게 반감을 표현하고 있죠. ...노인을 이렇게까지 괴롭히다니.)

아무튼 신비주의의 요체는 분명합니다. '가릴 수록 더 궁금하다'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전략이죠. 거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개인적인 성향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스타덤에 높이 오를수록 사생활이라는 것은 사라져가기 때문이죠. 소위 유명세라는 것도 날이 갈수록 비싸집니다.

(가끔 신문 등에서도 '유명세를 타다'와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실수입니다. '유명세'라는 말은 有名勢가 아니라 有名稅, 즉 유명해진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내야 하는 세금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명세는 '타는' 것이 아니라 '치르는' 것이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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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신부 이영애는 이제 귀국을 했고, 결혼한 사람으로서 생활해 갈 겁니다. 당장은 취재 열기가 뜨겁겠지만 언젠가는 그 관심도 잦아들겠죠. 어쩌면 신비주의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아직 연기생활을 계속할지, 하지 않을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연기를 계속 한다면 앞으로는 좀 더 자연스럽게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상태에서 연기를 중단하고 '보통 사람'이 된다면 오히려 대중들의 관심은 더욱 커지겠죠.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영애든 그레타 가르보든, 스타덤에서 멀어진 다음에 생각해 볼 때 신비주의는 매우 사소한 문제입니다. 현역으로 활동할 때 카메라를 피했건 안 피했건, 이건 한 배우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그냥 에피소드로나 기억될 문제죠. 그레타 가르보는 '안나 카레리나'나 '마타 하리'로 기억될 것이고, 이영애는 '장금이'나 '금자씨'로 기억될 겁니다.

하지만 그만한 업적도 없이 신비주의로만 인기를 유지하는 배우들은 과연 늘그막에 어떻게 될까요. 대체 무엇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요. 과연 몇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왕년의 유명했던 핸드폰/샴푸 모델'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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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드라마의 본격화가 곧 드라마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일리 있는 얘깁니다. 왕년에는 의사 가운이건, 이발사 가운이건 어쨌든 흰 가운만 입고 나오면 의사라는 식의 드라마도 꽤 있었죠. 하지만 요즘은 명찰 하나까지 신경을 써서 만드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그만큼 '날림 제작'은 사라져가는 분위기인 듯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떤 직업의 세계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나왔을 때 "실상은 저것과 전혀 달라!"라며 분개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불만이 나오지 않는 작품들이 매우 드물 지경입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어느 쪽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그래서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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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 '스타일'이 방송된 이후, 잡지사에 근무하는 여기자들(요즘은 주로 '에디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의 반응이 이런 저런 방향에서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제작진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만족한다는 반응은 거의 없다. 99%가 "세상에 저런 잡지사가 어디 있냐"는 내용이다.

날마다 파티 의상인 김혜수를 두고 "어떻게 저렇게 입고 일을 하냐"는 반응이 기본이고 "남의 회사 어시(assistant, 즉 수습)를 돈 주고 빼간다는게 말이 되냐" "포토그래퍼가 기획회의에 들어오는 회사가 어디 있냐"는 등 디테일에 대한 지적도 적지 않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스타일'만 그랬던 게 아니다. 직업의 세계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치고 해당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야, 정말 리얼하다. 실감난다'는 반응이 나오는 경우는 당최 들어 보질 못했다. 신기할 정도다.

의사든 변호사든 예외가 없다. '종합병원' 이후 모든 메디컬 드라마, '애드버킷' 이후 모든 법정 드라마가 진짜 의사나 변호사들로부터는 "세상에 무슨 의사(혹은 변호사)가 그따위냐. 대체 병원(혹은 로펌)인지 놀이터인지 모르겠다"는 볼멘 소리를 들어왔다. 최근의 '뉴하트'나 '파트너'에 이르기까지 주된 평가는 "저런 식으로 했다가는 당장 옷 벗어야 할 것"이란 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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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꼭 전문직만 그런 건 아니다. 농부든, 어부든, 간호사든, 항공사 여승무원이든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자신들의 직업에는 죄다 불만이다. 체크해 볼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재벌이나 조직폭력배들도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자신들의 역할이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긴 하다. 재벌 2세들도 드라마를 보면서 자기들끼리 "야, 저게 말이 되냐? 근데 너 혹시 니네 회사에 맘에 드는 여직원 있으면 저렇게 하냐?"하고 통화를 할까?)

물론 기자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연예 담당 기자들은 정상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점점 드물어 지는 것 같다. 사실 '스타의 연인'에 나오던 얼띤 기자(정운택)나 영화 '과속 스캔들'에 나오던 봉필중 기자(임승대)를 마음에 들어 하기란 쉽지 않은 일 같다. 게다가 봉필중 기자처럼 기사를 썼다간 집이 몇 채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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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방송되는 드라마 '드림'에 나오는 희한한 기자(정은표)는 사진 한 장의 댓가로 스포츠 백 하나에 가득 찬 현찰을 챙긴다. 참 좋은 세상이다. 하긴 그 정도 돈을 막 뿌려댈 수 있을 정도로 격투기 선수와 스포츠 에이전트들이 떼돈을 벌고 다니는 날이 오긴 했으면 좋겠다(이 친구들도 '드림'에 불만이 많더라는 얘기).

기자의 경우는 다른 직업들과 좀 다른 면도 있다. 다른 직업의 경우엔 좋은 변호사나 좋은 의사가 나오는 드라마도 '리얼리티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을 받곤 한다. 하지만 기자의 경우엔 아예 '좋은 기자'라는 것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예외는 손예진이 주연했던 '스포트라이트' 정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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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경우에도 '정의를 지키는 신념에 찬 방송 기자'들과 '부패하고 타락하고 게으른 신문 기자'들이 드라마 속에서 아주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뭐 방송국에서 만든 거니까 이해한다. 신문사가 만들었다면 아마 반대가 됐겠지). 아무튼 일부나마 '좋은 기자'들을 다룬 죄로 이 드라마는 시청률에서 참패했다. 시청자들은 아마도 '좋은 기자'가 나오는 드라마를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군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전문직 드라마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나 '온에어'를 두고 PD나 드라마 작가로부터 불평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연기자나 매니저들은 이들 드라마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지만, PD나 작가들이 이 드라마에 불만이 있었다면 그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을 거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혹시 작가협회에서는 '해당 직업을 가진 극중 인물들이 실제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면 그 드라마는 망한다'고 가르치는 걸까? 그런데 이거 혹시 한국 드라마만 이런 걸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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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직업은 모르지만 최소한 기자에 대한 한 한국드라마만 저런 건 아닌 듯 합니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더스틴 호프만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 1976)'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기자라는 종자들은 항상 무슨 일이 되게 하기보다는 안 되게 하는데 재능이 많은 존재들로 그려집니다.

아래 사진의 아저씨가 나오는 '다이 하드'가 대표적인 경우고, 대부분의 기자들은 하는 역할이란게 대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긴 이런 부분을 생각해보면 '스포트라이트'는 대단히 무모한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뭘 믿고 기자를 주인공으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목에 대한 답은 나와 있는 셈입니다. '망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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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요즘 '스타일'을 본 잡지사 쪽의 반응이나 '드림'을 본 스포츠 에이전트, 혹은 이종격투계에서 나오는 반응들을 보면 한국 드라마나 영화의 '현실불감증'은 여전한 듯 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현실보다 한심하게'가 아니라 '현실보다 너무 화려하게' 그려냈기 때문에 이 불만은 그냥 불만 수준으로 남아 있는게 다행일 듯 합니다. 만약 현실보다 나쁘게 그려졌다면 당장 소송이나 대대적인 항의를 받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전에 간호사 단체나 항공사 여승무원 단체에서는 이런 일이 꽤 잦았죠. 바로 '특정 직업에 대한 비하'라는 항의 말입니다.

이런 항의를 고려한다면 역시 특정 직업을 나쁘게 그리는 것 보다는 좋게 그리는 것이 유리하겠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쁘게 그리는 것이 대세'인 이 직업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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