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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01 [그라나다 5] 나스르 궁전의 꽃, 사자의 정원

그리스 출신의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에서 그라나다 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건축물과 음악의 일체감. 나는 이미 코르도바의 이슬람 사원과 세비야의 알카사르에서 이런 것을 짐작했다. 그런데 여기 그라나다에서 그것은 가장 명확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아랍 건축물의 최후이자 최상의 노력은 모든 물질적 형태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벽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그것을 호리호리한 기둥이나 아치로 대체했다. 혹은 아랍의 카펫처럼 벽들을 조각하고 디자인했다. 그렇게 그것들은 무게에서 해방되었다.

 

기둥들은 더 가늘어졌을 뿐만 아니라 더 낮아졌다. 아치는 영묘하게 물결친다. 장식물들은 사상처럼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 된다. 단일한 주제가 주어지고, 이 주제는 수학적인 정교함과 환상의 풍요로움으로 무한히 울려퍼진다.

 

아랍의 음악가이자 건축가들은 빛과 공기와 색으로 공간을 채웠다. 그들은 대담한, 하나의 특별한 목적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물질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고정되고 무거운 모든 내용물을 추상화시켜서 오직 지적인 윤곽만을 남기는 것이었다."

 

실제로 보고 나니 진정 실감이 난다.

 

 

윗글의 이상이 가장 잘 실현된 곳을 찾자면 역시 나스르 궁전 가운데에서도 사자의 정원 Patio de los Leones 을 꼽게 된다.

 

사자의 정원인데 사자는 어디 있다고 궁금해 하실 분들, 

 

사자 나온다.

 

 

 

뒤로 돌면 이런 장식의 문.

 

앞을 보면 생각보다 규모는 작지만 자못 감동을 자아내는 사자의 정원이 전경을 드러낸다.

 

 

 

 

 

 

나스르 궁전 평면도. 대략 파란 선을 따라 구경을 하게 된다.

 

중앙의 긴 빨래판 모양이 도금양(아라야네스)의 정원 Patio de los Arrayanes, 이고 우하단에 사자의 정원이 보인다.

 

 

사자의 정원에 있는 사자는 우리 민화 속 호랑이를 닮았다. 공포의 대상이 아닌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사자상이 12마리인 것은 매 시간마다 물을 흘려 내보내는 것으로 시계의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든 사자가 입을 통해 물을 흘려 내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의 방들.

 

첫번째 방은 흔히 아벤세라헤의 방 Sala de los Abencerrajes 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팔각별 모양의 천장은 나스르궁 최강의 조형미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방은 나스르 궁에서 가장 흉악한 전설을 담고 있는 방이다.

 

아벤세라헤 일족의 남자 30여명이 이 방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유는 정치적 음모에 대한 발각설과 왕비와의 불륜설이 있다. 가이드북에는 이 방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 있다는 등의 호러 스토리를 전하고 있지만 사실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천장의 아름다움이 매우 인상적인 방이다.

 

어쨌든 성 전체가 기독교도들에게 넘어가기 전에도, 넘어간 뒤에도 이 방은 께름칙하다는 이유로 그리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모습들이 바로 여행 사이트나 기행문의 '알함브라' 파트를 장식하는 바로 그런 비주얼이다.

 

사실 사자의 정원을 구성한 이 수많은 기둥들이 사진으로 볼 때보다 못하다고 실망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그 많은 관광객용 사진들은 대개 여름의 해질녘에 찍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진들 속에서 이 기둥들은 금빛으로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직접 가서 보면 솔직히 그런 느낌은 아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날씨가 꽤 흐렸다. 해가 쨍쨍 나는 맑은 날엔 또 다른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꽤 조명을 타는 유적이다.

 

 

 

벽에 어른어른 그림자 같은 것이 비친다. 이런 것들이 아벤세라헤 일족의 핏자국인지도.

 

 

그리고는 왕의 방. Sala de los Reyes

 

스페인어의 Sala는 방(Room)으로도, 홀(hall)로도 번역되는데 이 경우엔 그냥 홀이라고 하는게 나을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Sala de los Reyes 는 방도 홀도 아닌 그냥 긴 회랑이다.

 

 

 

그 다음 방은 두 자매의 방 Sala de Dos Hermanas 이라고 불린다.

 

특별한 전설이 있는 방은 아니다(심지어 정말 자매가 살았다는 보장도 없다). 보압딜과 그 이전의 군주들이 가족과 함께 거주하던 방으로 알려져 있다. 저 높은 천장에서부터 들어오는 빛이 꽤 아름답게 방을 감싼다.

 

또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아름답다.

 

 

 

 

이렇게 해서 사자의 정원을 지나 나스르 궁의 부속 건물로 접어든다.

 

 

 

눈썰미 있는 사람이 보면 창틀의 모양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고,

 

 

천장의 글자도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여기는 카를로스 5세가 잠시 사용했다는 황제의 집무실 Habitaciones de Carlos V 이다.

 

 

방 자체가 지금까지 거쳐온 알함브라의 방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누가 봐도, 기독교도들이 알함브라의 주인이 된 뒤에 구축한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음에 나타나는 방이 바로 '워싱턴 어빙의 방'.

 

전에 말했던 '알함브라 이야기'의 저자이며, 사실상 서구 사회에 알함브라 관광 붐을 일으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중세 이후 먼지에 덮여 있던 알함브라를 세상에 널리 알린 덕분에 관광객들이 밀려오고, 그 덕분에 스페인 정부도 알함브라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고 정비에 나섰다는 얘기다.

 

어빙은 물론 '스케치북'의 저자로 알려진 미국 문학의 비조이기도 한데, 이렇게 알함브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방이 남을 정도의 영광은 역시 알함브라를 소개한 공이 아닐까 싶다.

 

(국내 번역 제목은 '알함브라' 1권과 2권인데 그라나다로 갈 때 꼭 읽고 가야 할 정도는 아니다. 감상이 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고나 할까. 맘에 드는 문장은 아니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동물의 형상.

 

아시는 분 있으면 설명 좀...

 

 

 

워싱턴 어빙의 방을 나선 테라스에서 구 시가 쪽을 바라보면 이런 정경이 펼쳐진다. 안달루시아 특유의 구조를 가진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아름답다.

 

 

 

 

그래서 이런 장난도 쳐 보고 싶어진다. 인형 같은 집들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나스르 궁 구경도 거의 끝이다.

 

쇠창살의 정원 Patio de la Reja. 글자 그대로 네 면이 모두 건물에 둘러 싸인, 정통 사각형 파티오다. 작고 아담.

 

 

 

그리고 나서 건물을 돌아 나오면 오렌지 정원 Jardín de los Naranjos 이 나온다.

 

 

옆으로 돌아 들어가면 아랍풍 목욕장의 유적이 등장.

 

 

 

타일로 방수가 되어 있는 목욕방. 별 모양의 천장 창을 통해 조명을 해결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오렌지 나무 정원을 거쳐 밖으로 나오게 된다.

 

 

나스르 궁 안녕. 그리고 관람 시간이 끝났다.

 

알함브라는 여기서 안녕.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빗발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의외로 알함브라를 보고 실망했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생각보다 매우 작은 규모(나스르 궁에 한정해 이야기할 때), 나스르궁을 보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절차와 줄서기의 번거로움, 또 아마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직면해야 할 안달루시아의 직사광선과 더위 등이 이런 실망을 부추긴 요인이 아닐까 싶다.

 

알함브라는 다른 중동 지역의 이슬람 유적에 비해 규모와 색채감이 좀 약한 것도 사실이다. 돌과 벽돌의 자연색을 그대로 활용한 유적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마르칸트의 티무르제국 유적의 웅대함과 신비로운 파란 타일에 넋을 잃어 본 사람이나, 이스탄불 톱카피 궁전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금은보화의 빛을 본 사람에게 알함브라는 다소 소박하게 보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알함브라에 대한 열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전에도 얘기했지만) 알함브라의 아간 관람 사진을 보고 난 뒤였다. 아마도 밝은 태양 아래서는 워싱턴 어빙이 그토록 강조하는 '달빛 어린 전설'이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하는 '관능적이고 요염한 분위기'를 느끼기 쉽지 않을 듯 하다.

 

언젠가 돌아와 밤의 알함브라를 보게 되길 기원하며.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식당...은 다음 편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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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송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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