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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쓸데 없는 말이 '그만하면 잘 했어(Good Job)'야."

 

이 말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영화, '위플래쉬(Whiplash)'를 봤습니다. 압권입니다. 특히 마지막 15분 가량, 대사는 열 마디도 되지 않는 가운데 펼쳐지는 치열한 대결과 반전, 이런 영화는, 특히 이런 피날레는 어떤 영화에서도 일찌기 본 적이 없습니다. 근 몇년간 본 영화 중 가장 강추하고 싶은 작품.

 

감독 데미안 차젤(Damien Chazelle, forvo.com에 따르면 샤젤도, 차젤레도 아닙니다)은 18분짜리 단편으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만들어 본 뒤, 그 성과를 토대로 투자를 받아 이 본편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인간승리.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에 반감을 갖는 분들도 적지 않더군요. 물론 어떤 부분이 거부감을 낳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만 합니다.

 

 

 

 

드럼에 재능 있는 학생 앤드루(마일스 텔러)는 미국 최고의 음악학교인 샤프너 스쿨(가상의 학교입니다)에 입학해 꿈을 키워나갑니다. 여느 때처럼 밤 늦게 연습하던 어느날, 학교 최고의 실력자인 플레처 교수(J.K. 시먼스)로부터 지목을 받고, 학교의 엘리트들이 속해 있는 스튜디오 밴드의 연습에 나가게 됩니다. 그날부터 앤드루의 지옥 문이 열립니다.

 

플레처의 광기는 영화 전편을 통해 관객을 장악합니다. 어린아이를 보거나, 마음에 드는 순간에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따뜻한 말로 간을 빼줄 듯 얘기하지만, 일순간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를 접하게 되면 조상 삼대를 들먹이는 욕설과 함께 폭행도 서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미친 선생'이죠. 그에겐 레귤러와 후보의 구분도 없습니다. 어제 아무리 잘 했어도 오늘 실수하면 당장 연습장 밖으로 악기를 싸 들고 나가야 하는 것이 그의 규칙입니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이런 식의 훈육 방식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울 수도 있는데, 영화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전제는 플레처의 실력입니다. 일반인은 물론 드러머들의 귀로도 구별하기 힘든 미세한 박자 차이를 고집하고, 30여명의 밴드 가운데 누가 틀린 음을 냈는지 귀신같이 짚어 내는 능력. 그리고 그가 지도한 밴드의 수상 경력과 그가 키워낸 제자들의 활동상이 이미 그의 실력을 검증해 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폭거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죠.

 

이런 내용이다 보니 영화의 제목이자 메인 테마인 곡의 제목이 whiplash, 곧 '채찍질' 인게 당연한 일. 

 

 

 

 

 

이 영화에 대한 반감의 포인트도 여기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의 시퀀스들을 '교육 현장'에 대입하고 싶어 합니다. 실제로 영화 중간에 플레처의 훈육을 받았던 학생과 학부모에 의한 문제 제기가 중요한 장면으로 등장하기도 하죠. 하지만 분명히, 이 영화의 내용을 교육 전반에 대한 우화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위 0.01%, 아니, 상위 0.0001%에 속하는 초 엘리트들의 도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학교 교육이란 '과정 이수'와 '졸업 자격'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입니다. 즉 '이 수준의 학교에서 60점 이상으로 과정을 마치면 어느 정도의 수준 이상임을 인정할 수 있다' 정도가 학교 조직의 목표인 셈이죠. 하지만 이 경우, 고도의 능력을 갖춘 슈퍼 엘리트의 육성을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입니다. 이른바 일반 교육과 영재 교육을 분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나를 극한까지 혹독하게 몰아쳐서 내 안의 잠재력을 일깨워 줄 수 있었으면'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물론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런 욕구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욕구는 의외로 자신이 어떤 분야에서 정상을 노릴 만 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서구인들보다는 한국인들의 내면에 이런 정서가 더 잘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그랬고, 만화도 영화도 아닌 김성근 감독의 신화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와 존경을 보내고 있는 것 역시 이런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플레처가 계속 예로 드는 찰리 파커와 조 존스의 전설도 '누군가를 끝까지 쥐어짜 죽을 힘까지 다 발휘하게 하지 않으면 천재성은 쉽게 발현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을 뒷받침합니다. 일본 만화에서 주인공이 한번 '각성'에 이르기 위해선 온갖 시련을 죄다 극복해야 하는 것처럼.

 

물론 아무리 쥐어 짜도 그 방면으로 별 특출한 재능이 보이지 않는 학생을 누군가의 욕심에 의해(이 '누군가'는 부모, 교사, 가족, 친지, 심지어 그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미친듯이 쥐어 짜 봐야 그 결과가 해피엔딩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 역시 자명합니다. 다만 그 누군가가 그 자신이라면 - 즉 자기를 남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미친 짓으로 보이는 고된 수련의 길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 그 자신이라면, 그리 길지 않은 인생에서 그만치 자신을 쏟아 부을만 한 목표를 갖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위 사람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재능이 보잘것 없는 것이고, 그 부문에서 큰 성취를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영화 '위플래쉬'의 플레처와 앤드루는 둘 다 행복한 편입니다. 비슷하게 미쳐 있으니 말이죠. 이 둘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원하는 바가 같고, 원하는 바를 위해 가려고 하는 길도 같습니다. 앤드루 역시 기회가 온다면 언젠가 또 다른 플레처가 될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도 자명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쨌든, 앤드루나 플레처 같은 사람을 '정당하다고' 옹호하는 작품은 절대 아닙니다.

 

아무튼 아닌 경우도 있겠으나, 대개의 경우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천재를 낳게 하는 것은 가혹한 훈련과 경쟁의 결과라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위플래쉬'의 영화적 성취는 탁월합니다. 영화 전편에 나오는 드럼을 모두 직접 연주했다는 마일스 텔러의 노력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은: 꼭 보세요.

 

 

 

P.S.1. 이 영화와 더불어, '세상은 꼭 1등만을 위한 것은 아니야. 평범한 재능의 사람들에게도 이 세상은 충분히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야'라는 따뜻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개의 가치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게 오히려 문제죠.

 

P.S.2. 영화의 결말은 제 생각엔 해피엔딩인 것 같습니다만,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도 많은 듯. 글 저 아래에 데미언 차젤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가 끝난 뒤 두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붙여 놨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P.S.3.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곡들은 이미 존재하는 명곡들입니다. 듀크 엘링턴의 '캐러밴'. 그 유명한 조 존스의 드럼 솔로입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한번 보시죠.

 

 

 

그리고 행크 레비의 '위플래쉬'. 역시 전설적인 섹소폰 연주자 돈 엘리스의 1973년 오리지널 녹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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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데미언 차젤 감독은 이 영화의 엔딩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부러 번역은 하지 않았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사실 아니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영화를 본 뒤에 읽어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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