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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이 영화를 굉장히 재미 없게 보았어야 정상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저는 원신연 감독의 전작 '구타유발자'를 매우 불쾌하게 봤습니다. 게다가 한국산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영화에 대해 심각한 불신을 갖고 있습니다.

김윤진의 연기력 또한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연기를 볼 때면 '싱글벙글쇼'의 진행자 김혜영씨의 목소리를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즉 '기본적으로 오버하는 목소리'라는 생각이죠.

뭘 해도 자연스럽지 않고,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셰익스피어 극을 대극장에서 공연한다거나 할 때에는 이런 과장된 스타일의 연기 방식이 반드시 필요할 지도 모르지만, 배우의 털구멍까지 다 보여주는 HDTV나 스크린에서 이런 배우는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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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긍정적인 자세로 돌아서게 됐습니다. 최소한 영화의 80%까지는 극찬을 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는 한국 영화지만 그 가운데서 예외 취급을 받아 온 미스터리 스릴러 - 물론 '범죄의 재구성'같은 극소소의 예외가 있긴 합니다만 - 장르에서 이 정도의 작품이 나온 건 대단히 반가운 일입니다.

줄거리. 승소율 99%라는 명 변호사 유지연(바로 김윤진입니다)은 어느날 운동회 판에서 딸을 잃어버립니다. 평범한 유괴가 아니죠. 범인은 돈 대신 사형이 확실시되는 흉악범을 풀어 내 달라고 요구합니다.

어쩔수 없는 상황. 유지연은 어린시절의 친구인 비리 경찰 김형사(박희순)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추적해나갑니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하죠. 어쩌면 재판을 기다리는 범인이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우선 칭찬할 것은 영화의 한 80%지점까지 쉴새없이 관객들을 독려해서 목적지로 몰고 가는 원감독의 힘입니다. 물론 김형사가 지나치게 유능하다는 점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하나 하나 드러나는 증거들은 매우 흥미롭고, 귀찮은 부분들을 과감하게 쳐낸 결단력도 좋았습니다.

저는 유괴 사실 확인 - (경찰에 신고 - 경찰 출동 - 범인의 전화 - 돈가방 전달 게임) - 범인의 비웃음과 진짜 목적 공개에 이르는 과정에서 (   ) 안의 부분을 거의 1분 내외에 압축한 부분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법정 장면에 있습니다. 아마 이 영화 제작진은 한국의 형사 재판을 단 한번도 방청해보지 않았거나, 한국의 사법제도에 대한 묘사에 아무런 열의가 없는 사람들일겁니다. 하긴 관객 중에도 진짜 법정에 가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테니, 미국 법정 드라마에 나오는 검사와 변호사들처럼 대강 그려도 뭐랄 사람이 없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한국 법정에서는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검사와 변호사의 불꽃튀는 배심원 설득 경쟁 같은 것은 절대 볼 수 없습니다. 한국 법정은 방청객을 위한 쇼 무대가 아니라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전문가인 판사 사이의 숙의가 이뤄지는 곳이죠. 물론 이때문에 사실대로 그리면 절대 재미있지 않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중학교 2학년만 되어도 충분히 알만한 내용의 '국민 기초 법률 상식'-이를테면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을 마치 새로운 관점인 양 들고 나와 변론을 풀어가는 유지연 변호사의 역량을 보면 도대체 저 변호사가 어떻게 99%의 승률을... 이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배운 관객'이라면 충분히 흥분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오광록의 증거 제시 장면은 '말 안 되기'의 극치입니다. 한국 법정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다가는 무죄로 풀려날 사람도 사형 판결 날 겁니다.





이 영화에 대한 비판 중에는 '지나치게 할리우드 영화를 흉내내고 있다'는 것도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와 설정이 비슷한 작품은 한둘이 아닙니다. 조니 뎁 주연의 1995년작 '닉 오브 타임'은 범죄자들이 조니 뎁의 딸을 납치한 뒤 풀어주는 대가로 유력자를 암살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뭐 더 비슷한 영화도 있죠.



'주어러'는 악의 화신인 알렉 볼드윈이 유명 마피아 보스 재판의 배심원이 된 데미 무어에게 "안에서 배심원들을 설득해 보스를 풀어주지 않으면 아들을 데려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때부터 무어의 설득력과 리더십이 불을 뿜기 시작하죠.

하지만 이런 줄거리의 유사성보다...



일단 제목에서부터 '세븐 데이즈'에선 '세븐'의 냄새가 풍깁니다. 어두침침한 실내, 음침한 메시지 전달, 소포로 전달되는 절단된(?) 물건, 그리고 바람부는 갈대밭에서 이뤄지는 마지막 시퀀스는 이 영화가 '세븐'에 대한 오마주라는 걸 내놓고 보여줍니다.

뭐 잘된 작품을 따라하는 걸 흠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영화가 자기만의 독특한 색채로 포장할 수는 없는 일이죠. 나쁘지 않습니다.




이 분의 연기는 처음에 얘기한대로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특히 앞 부분에 딸과 욕조에서 노는 장면 같은 데서는 어떻게 해도 엄마와 딸의 그림이 나오질 않더군요. 그냥 '엄마와 딸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정도.





반면 이 영화 최고의 소득은 이 분입니다. 이름조차도 생소했던 배우가 이제는 한국 영화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면 좀 과장일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영화에서의 박희순은 훌륭했습니다. 내년쯤 이런 저런 영화제에서 조연상 후보로 거론될 수도 있겠더군요.

(어쩐지 NRG의 이성진을 연상시키는 용모.^^)






그리고 흑개 형님과 현무가 나와서 이건 뭔가 태왕세븐기...^^

아무튼 결론적으로 '한국 사법제도에 대한 지나친 지식(^^)'만 없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원신연 감독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도 살짝 생기더군요. '구타유발자'로 입은 내상이 충분히 회복되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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