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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호평 일색인 영화를 볼 때면 '흥, 어디 얼마나 잘 만들었나 보자' 같은 심정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보고 있으면 이런 투지가 뚝 부러지는 느낌을 주곤 합니다. 한마디로 전의를 빼앗아 버리는 영화들이죠.

사실 픽사(PIXAR)의 애니메이션을 두고 잘 만들었느니, 걸작이라느니 하는 수식어를 쓰기를 포기한 지 이미 오랩니다. 아마도 단일 제작사 이름만으로 영화를 볼지 말지를 정하라고 한다면, 이 회사만큼 신뢰도가 높은 이름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싶습니다. 굳이 '토이 스토리'며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며 '인크레더블'을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겁니다.

물론 초창기라면 몰라도, 현재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돈을 쓰지 않고 단지 아이디어나 땀방울만으로 만들어진 건 절대 아닙니다. '니모를 찾아서'의 제작비가 이미 9400만달러, 이번 '월 E'의 제작비는 1억8000만달러나 합니다. 더구나 '월 E'에는 나름 유명 배우들을 성우로 쓰지도 않았으니(사실 쓸 필요가 없었죠. 컴퓨터 목소리를 낸 시고니 위버 정도?), 정말 '그림만 그리는 데' 들어간 돈 치곤 엄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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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화면에서 돈 냄새가 나는 '다크 나이트'의 제작비가 1억8500만달러(공식적으로 그렇습니다), 역시 돈 깨나 쓴 '미이라 3'가 1억4500만달러입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하나 만드는데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10배나 되는 돈이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월 E'가 준 좌절감은 '다크 나이트'보다 훨씬 컸습니다. 사실 '미이라 3' 정도라면, 저 정도 돈 - 약 1500억원 정도 - 이 들어온다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마 그보단 훨씬 잘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같은 영화라면, 같은 돈을 준다 해도 한국에서 만들기는 쉽지 않을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엔 단시간에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다크 나이트'를 '죽었다 깨나도 만들 수 없는 영화'라고 표현한다 칠 때 '월 E'는 '두번 죽었다 깨나도 만들 수 없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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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E는 텅빈 지구를 지키고 있는 청소 로보트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혼자 남아 인간은 커녕 생명체라곤 바퀴벌레 한마리 뿐인 지구를 청소하고 있죠. 그런데 그는 - 원래 그랬는지, 뭔가가 잘못됐는지 -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아마도 원래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던 어느날, 외계로부터 이브(EVE)라는 성질 사나운 친구(여성형으로 느껴집니다)가 찾아옵니다. 뭔가 사명을 갖고 지구에 온 건 분명한데, 월 E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것 처럼 이브는 어느날 갑자기 말을 않게 되고, 역시 어느날 갑자기 외계에서 온 거대한 우주선에 의해 떠나갑니다. 여기서 월 E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겠죠. 그렇게 해서 대모험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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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대다수 관객들은 '저렇게 한정된 수단으로 이토록 풍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니'라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보시다시피 월 E와 이브는 모두 얼굴이 없습니다. 있다면 간신히 표현되는 눈 정도죠. 그런데도 월 E는 별 용기 없는 수줍은 찌질남을, 이브는 똑똑하고 도도하며 세련된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물론 이건 애니메이션의 발전이기도 하지만, 관객의 발전-혹은 적응-이기도 합니다. 정교하게 설명하려면 더 오래 걸리겠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원시 사회에 고립돼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영화를 봐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영화를 쉽게 이해하는 건 그만큼 우리가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에 적응해 있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월 E'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애니메이션인 사람은 그만큼 놀라운 경험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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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디자인과 연출에 대한 놀라움은 이들 주인공 뿐만 아니라 더욱 단순하게 디자인 된 조연 캐릭터들에게서도 각각 독자적인 '성격'이 살아 숨쉬는 듯 묘사된다는 데서 배가됩니다. 월 E가 우주선에서 만나는 작은 청소 로봇 모(MO)의 경우가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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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사용 역시 달인의 솜씨가 돋보입니다. 노래하지 못하는 주인공들을 쓴 대신 1969년작인 할리우드의 고전 뮤지컬 영화 '헬로 돌리'가 사용됩니다. 감독 앤드류 스탠튼은 "소심한 남자가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나가는 이야기기 때문에" 이 뮤지컬을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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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사용된 노래는 'Put On Your Sunday Clothes'와 'It Only Takes a Moment' 두 곡입니다. 그러고 보면 '월 E'에선 '장밋빛 인생'을 부른 루이 암스트롱도 '헬로 돌리'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연출이나 음악도 그렇지만 픽사 애니메이션 최강의 카드는 바로 최상의 유머 감각이죠.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탄탄한 스토리의 힘은 웃다가도 무서워질 정돕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선장과 오토(AUTO)의 격투 장면에서 갑작스레 흘러나오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였습니다. 당연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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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만 말해선 잘 모르실 분들이 꽤 있겠군요. 일단 '월 E'를 보시고, 그 다음에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해 조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월 E'에 나오는 오토의 눈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할(HAL)의 눈이 매우 닮았습니다. 아마도 큐브릭에 대한 오마주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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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양한 이미지의 차용은 '월 E'가 할리우드의 백년 역사가 만들어 낸 걸작 중 하나로 꼽힐 수 있는 것은 그 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걸작들의 가르침을 쉽게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은 어느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탄탄한 플롯에서부터 설계를 시작하는 노하우 말입니다.

지금도 '상업영화'를 우습게 보면서 '돈만 더 있으면 얼마든지 뽀대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보셔야 할 영화가 바로 '월 E'같은 영화입니다. 그나자나 이런 디지털 캐릭터들의 명연기를 보고 나면 반성해야 할 배우들도 한둘이 아니겠군요. "이봐, 얼굴에 눈밖에 없는 디지털 캐릭터를 써도 너보단 연기 잘 할 것 같은데 어때?" 이런 말이 곧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할리우드의 몇분의 1 가격으로 비슷한 수준의 액션을'을 셀링 포인트로 잡고 있는 분들이 부디 하루 빨리 '월 E'같은 영화를 보고, 뛰어난 스토리의 개발이야말로 더욱 투자가 시급한 부분이라는 점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렇게까지 주절주절 떠들었는데 '그래서 재미있다는 얘기냐'고 물을 분은 없겠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어야만 영화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아니라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돈만 많다면 '재미 없으면 극장 표값 물어주겠다'고 호기있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 영홥니다. (물론 돈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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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브의 디자인에서는 너무도 애플의 냄새가 짙게 풍깁니다. 이 묘한 느낌은, 월 E가 왕년의 뮤지컬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재현하는 장비가 iPod이란 데서 확신으로 바뀝니다. 아무리 스티브 잡스가 PIXAR와 인연이 두텁다고 해도 이 정도면 돈 한두푼으론 해결이 안 될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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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2. 그나자나 날로 우주선 속 인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저로선 참 뼈저린 영화기도 하더군요.^^ 누가 트집 잡을때마다 '미래형 몸매'라고 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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