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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MBC 스페셜-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는 오랜만에 보는 잘 만들어진 스타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그동안의 소위 '스타 다큐멘터리' 들이 스타의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간판을 내걸고서 실제로는 가장 바깥쪽 표피조차 뚫지 못하는 제한된 모습을 보여준 반면, 이번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는 꽤 충실한 제작기간,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 다각도에서의 접근 등으로 인물 다큐멘터리의 표본 역할을 해 냈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개구리 삶은 물'입니다. 아버지 박성종씨의 말이었죠. "개구리가 좋다고 해서 개구리를 잡아 왔는데, 요리법을 몰라서 엄마가 그냥 삶으니까 내장 같은 데서 냄새가 심하게 났어요. 그런데도 얘가 군말 없이 그걸 먹더라구요."

양념도 하지 않은 개구리를 삶은 물의 냄새,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그만큼 박지성은 성공에 목말라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쯤해선 '대체 성공이 뭐길래...'라는 생각도 잠시 스쳐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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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 90%에게 '박지성'이라는 이름의 장편 극화는 2002년 월드컵 포르투갈전, 결승골을 터뜨리고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반짝 안긴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2002년 이전에도 박지성은 분명히 존재했고, 최선을 다해 뛰었습니다.

박지성을 가장 가까이서 본 건 2005년, 난데없이 팔자에 없는 축구 기자 생활을 하게 됐을 때였습니다. 그해 6월, 박지성은 월드컵 대표팀의 일원으로 우즈베키스탄-쿠웨이트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때 저도 취재단의 한 사람으로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 기간 중 박지성은 인터뷰를 두 번 했습니다. 기자들이 아는 박지성에겐 특유의 화법이 있습니다. 약간 무거운 내용을 물으면 "제 생각에는 ...... 라고 생각한다고 ..... 생각합니다." 혹은 "가장 중요한 것은 ......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난히 '생각'이라는 말을 한 문장에서 두 번 이상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아무도 웃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한국 축구의 지존이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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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박지성은 아인트호벤 소속으로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올랐고, 7월 이적 소문이 돌았습니다. 옮기는 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설이 처음 제기됐을 때, 축구를 맡은 경력이 긴 기자들은 "에이, 설마~~~"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지금도 축구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고, 당시에는 더더욱 몰랐던 저로선 맨유라는 팀에 대해서도 '베컴이 뛰던 명문 팀'이라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축구에 빠삭한 후배에게 물었습니다.

나: 박지성이 맨유 가면 주전 뛸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
후배: 거의 없죠. 형 같으면 긱스를 쓰겠어요, 박지성을 쓰겠어요?
나: 긱스...가 그렇게 잘 하냐?
후배: ...라이언 긱스 몰라요?
나: 몰라.

(이런 제가 EPL 주요 선수들을 알아 보게 된 것도 다 박지성의 덕입니다.^)

물론 지금도, 당시 축구 기자들의 "에이, 설마~~~"라는 말이 그리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지성 본인도 어제 MBC 스페셜에서 맨유에 처음 합류했을 때의 심정에 대해 "내가 놀러온게 아닌데, 선수로 온 건데, 구경꾼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그의 축구 인생은 결국 그 "에이, 설마~~~"를 현실로 바꿔 온 과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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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스페셜을 보다 보면 '참 저런 선수가 어떻게 2002년 무대에서 뛸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을 개최한다고 결정을 했으면 당연히 그 대표팀에 들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뽑혔을 겁니다. 그런데 박지성이 축구선수로서 걸어온 길은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문제의 개구리 에피소드가 나온 건 수원공고 이학종 감독이 "몸 불리라고 자주 집에 보냈다"고 말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아버지 박성종씨가 직장을 때려치고 '아들 잘 먹이기 위해' 정육점을 차렸다던 바로 그 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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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방송의 주요 내용은 "이렇게 최고의 선수인 박지성도 2002년 이전엔 국내에서 번번히 외면을 당했다"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박지성의 인복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학에 못 갈때 만약 김희태 명지대 감독이 현역이 아니었더라면, 김희태 감독과 절친한 허정무 감독이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아니었더라면(그럼 굳이 명지대와 문제의 연습경기를 할 이유도 없었겠죠), 2002년 대표팀 감독이 히딩크가 아니었더라면...

사실 세상에는 '실력은 있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재능이 있고 노력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어느 쪽에 인생의 진실이 있을까요?

어제의 'MBC 스페셜'은 거기에 대한 한 답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런 거죠. "천하의 박지성도 그의 능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그렇게 고전했다. 하지만 한 구석에서 쉼 없이 갈고 닦고 노력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실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단, 그건 그 노력의 정도에 달렸다. 어느 정도? 박지성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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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정상으로의 길이 그런 것이라면 정말 포기하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이날 다큐에서 박지성의 부모는 두 번 울더군요. 아버지는 2002년 월드컵 본선 직전, '대표팀에서 제일 먼저 퇴출될 선수'로 박지성이 꼽혔을 때'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는 '제대로 된 청소년기도 겪지 못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학창시절의 추억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아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박지성처럼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학창시절을 희생하고, 친구나 젊은 날의 즐거움은 뒤로 미루고, 개구리 삶은 물도 마시며 노력할 겁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보장이란 있을 수 없죠. 거기에 'MBC 스페셜'의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당신이 무엇이 된다는 보장이 없을 때에도 박지성처럼 노력할 수 있는가.' 당연히 박지성이라고 해서, 자신이 언젠가 맨유에서 뛸 수 있을거라고 알고 있었을리가 없죠.

물론 진정 박지성처럼 노력한다고 해서 다 박지성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학교에서도 왠지 공부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성적이 오르지 않는 친구들이 있죠. 노력을 실력으로 바꿔주는 재능이란 원래 불공평합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지난해 챔피언스리그 우승 결정전에 박지성을 제외시킨 데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불공평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런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것이 축구가 가진 잔인한 면이다.' 문득 인생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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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날 어머니는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려선 박남정과 똑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하던데... 사람들이 다 연예인 시키라고 했어요." 지금의 진중한 박지성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얘깁니다. 과연 박지성이 혹시 연예인이 됐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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