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절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일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의 초 성수기에 누구나 다 가는 휴양지로 휴가 떠나기'였습니다. 여행을 좋아하긴 하지만 여행지에서, 특히 고국에 있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동포 여러분과 함께 복작대는 건 딱 질색인 터라 이런 여행은 절대 금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어찌 하다 보니 이 기간 중에 딱 이런 곳으로 가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느낀 점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 괌 PIC 리조트를 골드카드를 이용해 다녀왔습니다. 참고로 설명드리자면, 괌 PIC 리조트는 총 700개가 넘는 객실을 자랑하는 대형 리조트입니다. 이 리조트에서 골드카드라는 것을 이용하면, 관내에 있는 레스토랑을 모두 추가 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고(물론 일부 추가비용이 발생합니다), 또 각종 레포츠 시설 등 '40여종의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리조트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모든 식사와 편의와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자, 지금부터 막 다녀온 이 상품의 장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써 두는데, 분명히 장점들만(?) 거론할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 휴가 내용을 들어보고 '바로 내가 찾던 휴가지'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정말 끔찍한 휴가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러 여행사가 PIC 골드카드팩 4박5일(표현에 따라 3박5일) 상품을 내놓고 있는데 구성 내용은 거의 똑같습니다. 2-3시간 정도 소요되는 시내 관광이 기본으로 포함돼 있고, 나머지 투어는 대개 옵션입니다(물론 옵션이 기본으로 포함된 상품도 있죠).

1. 시차가 없는 여행에서 강제로 시차를 만들어 체력을 점검할 수 있다.

괌과 한국은 1시간 차이입니다. 거의 시차는 없는 편입니다. 그런데 인천공항 출발 시간은 오후 9시대, 도착시간은 현지 시간 새벽 1시대입니다. 호텔에 가면 새벽 2시가 넘습니다. 자연히 둘쨋날 일정에 무리가 갑니다.
돌아오는 일정은 더욱 환상적입니다. 새벽 4시대에 괌 공항을 출발하고 오전 8시대에 인천에 도착합니다. 새벽 2시경에 출발하는 항공편도 있습니다. 이 쪽은 참 인간적입니다.
새벽 4시 출발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새벽 1시30분에 호텔에서 출발합니다. 다행히 그 시간까지 체크아웃은 연장되지만, 그때까지 자기도 그렇고 안 자기도 그렇습니다. 공항에 가 보면 여기저기서 선잠이 깬 어린이들이 짜증을 내며 울어댑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이런 극악의 항공 스케줄을 이용해야 하는지 참 의문입니다. 목요일 밤에 출발해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금요일 하루만 휴가를 내서 4박5일짜리 휴가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매우 유용하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겐 끔찍한 체력과 인내력의 시험대일 뿐입니다.


2.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식사시간. 특히 어린이를 동반하고 있다면 끼니마다 식당 선정이 고민일 수 있을 겁니다. 호텔 관내에 5개의 레스토랑이 있지만, 사실 메뉴는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좌석만 500개는 되어 보이는 초대형 부페 레스토랑에 풀어 놓으면 아이들은 매 끼니 프라이드 치킨이며 아이스크림을 실어 나르며 신나게 식사를 합니다. 가끔 냅킨에서 걸레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휙 던져 버리고 먹으면 됩니다.
물론 소수의 어른들은 이런 식사가 좀 불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가끔은 현지식도 맛보고 싶을 것이고, 특별한 메뉴도 궁금할 듯 합니다. '그럼 왜 골드카드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 합니다. 맞습니다. 대단한 실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가족 여행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이 호텔과 이 여행방식을 채택한 수많은 사람들의 같은 욕구는 '온 가족이 가서 아이들끼리 풀어 놓아도 안심할 수 있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았던 것일 듯 합니다. 솔직히 풀어놓을 아이들이 없어서 저는 이 부분에서 공정한 평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풀어놓는 것이 안심이라는 건 아마 분명할 듯 합니다. 갈 데가 뻔해서 아이가 없어져도 10분이면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수영장은 어린이 키높이라 아이들과 놀고 있는 아빠들의 등짝은 벌겋게 익어갑니다. 대부분 호텔에서 30달러에 파는 상의 수영복을 사서 입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족 여행'을 위한 공간이라 그런지 어른들을 위한 배려는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기야 휴가 날짜부터 모든 것을 자녀에게 맞추는 한국의 어른들에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4. 짧은 휴가기간에도 고국에 머무는 듯한 착각을 준다.

가끔 외국인이 보이고, 안전요원들이나 식당에서 서빙하는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는 게 신기합니다. 모든 필요한 내용이 한국어로 해결됩니다. 식당에는 반드시 김치가 있습니다.
부페 식당에서는 생맥주가 무제한 제공됩니다. 아이들은 자는지 부페 식당이 문 닫는 시간까지, 맥주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있습니다.
고국에서 치열한 경쟁을 경험해야 할 아이들을 위해서도 교육의 장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40여개의 부대시설을 갖춘 거대 리조트'라는 설명과는 딴판으로 수영장 및 관련 시설은 정말 좁습니다. 물도 얕아서 낮에는 수영장 수온이 뜨끈뜨끈합니다. 거의 온탕에 들어간 기분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수영장 관련 시설을 보고 느낀 실망감이 가장 컸습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서울 시내 수영장과 다를게 없습니다.
무엇보다 선베드나 옥외 찬물 샤워 시설 등은 동남아권의 일반적인 특급호텔에 비해, 그리고 이 호텔의 수용 인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합니다. 선베드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아침식사 전에 나와서 타올을 걸쳐놓고(도서관에서 자리 잡듯) 경쟁을 해야 합니다. 자리 빼앗길까봐 심지어 식사 때에도 타올을 선베드에 남겨 놓고 가야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5. 전혀 인상적이지 않은 고가 옵션을 통해 해외여행에 대한 내성을 키운다.

밀림 탐험에서 마사지까지 7-8가지 옵션이 제시됩니다. 그중에서 어쩌다 드림크루즈라는 옵션을 선택했습니다. 내용인 즉 환상적입니다. '돌고래 출몰지역으로 배를 타고 나가 돌핀와칭을 할 수 있고, 바다낚시와 스노클링을 즐길 수 있다. 또 즉석에서 참치회를 맛보는 순서도 마련돼 있다'
네. 이 내용을 '직접 바다에 나가 낚은 참치를 그 자리에서 회로 떠서 먹는다'고 이해한 건, 그렇게 읽은 사람이 잘못입니다. 절대 착각하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게 됩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그날 바다에 나가서 먹은 건 참치가 아니라 냉동 연어였습니다.

45인승이라는 배에 약 40명이 탑니다. 좌석이 없어서 절반 가량은 서서 가야 합니다. 배는 신나게 시동을 걸고, 푸른 바다를 달립니다. 항구는 동그란 만 한복판에 있고, 배는 신나게 저 멀리 보이는, 대양으로 나가는 만의 입구를 향해 갑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게 바로 그 만의 입구입니다. 여기까지의 풍경은 그만입니다.)

하지만 입구까지 거의 다 가서 가이드는 "오늘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 만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돌고래 서식지까지 갈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햇살은 살인적으로 쨍쨍 빛납니다. 대체 이 날씨가 멀리 나갈 수 없는 날씨라면 과연 언제 나갈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다시 만 안으로 들어온 배는 미리 표시해 둔 부표에 밧줄을 묶고 정선합니다. 늘 머물던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물 쪽에서는 낚시대를 드리우고, 고물 쪽에서는 스노클링이 시작됩니다.
들어가 보니 산호초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서 공장 굴뚝이 연기를 뿜고, 더 가까운 곳에서는 거대한 크레인이 뭔가를 짓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스키장 콘도가 뻔히 보이는 곳에서의 산장체험인 셈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탔던 배와 동형의 배)

뭔지 모르겠지만 물 속은 부유물이 가득합니다. 물고기도 꽤 보이긴 하지만 가시거리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과연 잡으면 먹어도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낚시로 어획고를 자랑할만한 큰 물고기는 아예 눈에 띄지 않습니다.
물질을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씩 배로 올라오면 그때부터 음료수와 맥주 캔이 제공되고, 미리 준비해온 냉동 훈제 연어가 제공됩니다. 기분은 내란 뜻이겠죠. 그리고 배는 출발했던 항구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두 시간 반 정도 배 위에서 보내는 비용이 85불. 1인당 10만원이 넘습니다. 피서지를 잘못 선택한 벌금 치고도 꽤 비싼 편입니다. 갑자기 이 절반 가격이었던 피피섬의 깨끗한 바다가 떠오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6. 국제화시대를 맞아 미국 본토 방문의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괌은 미국 영토이고, 괌 거주민들은 미국 시민권자들입니다. 또 괌은 미군의 주요 주둔 거점이기도 하죠. 이때문에 유명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들에 비해 문턱이 꽤 높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괌은 15일간은 미국 비자 없이도 입출국이 자유롭지만, 미국 비자가 있는데도 가져가지 않은 사람(대개는 비자가 있는 여권과 현재 사용하는 여권이 다른 사람들이죠)은 "왜 (미국 영토를 방문하면서)비자를 휴대하지 않느냐"는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진 촬영과 양손 지문 채취는 기본. 손님을 신주 모시듯 하는 다른 동남아 관광국가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입니다.
출국 때. 심야 시간이라 그런지 안전검사대는 단 두 개만 오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가는 출국자들은 이 시간대에 몰려 있기 때문에 대기 시간은 꽤 깁니다. 신속한 출국 처리로 방문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다시 들르게 하려는 노력 같은 것은 전혀 엿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관광지로서의 자세가 아닌 거죠.


결론적으로 그리 유쾌하지 않은 정책, 방문자의 편의가 고려된 것인지 의심스러운 항공 스케줄, 꽤나 좁고 낙후된 시설(다른 리조트는 가보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가격에 비해 별 경쟁력 없는 식사, 그리고 사기에 가까운 옵션 투어 등은 여러 여행사에서 제공하고 있는 괌 PIC 상품을 구매한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는가를 자꾸 의심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손님이 넘쳐 나서 걱정이라면 전혀 개선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하늘은 파랗고, 바닷물 색도 유혹적이었지만 저라면 다시는 비슷한 조건으로 이 섬이나 이 리조트를 방문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p.s. 사실 저는 평소에 아예 여행사 투어라는 걸 안 가는 편입니다. 비용이 좀 더 들고 귀찮아도 직접 품을 파는 편이죠. 그리고 대략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 예상도 했지만, 부모님과 조카가 있어서 동참한 것 뿐입니다. 가족 모임은 좋았지만, 상품으로서의 이번 여행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와 같은 조건 - 평소 단독 여행을 좋아하고 아이가 없는 분들 - 의 분들이라면 괌 PIC 골드카드 투어와 같은 여행은 그리 만족하기 힘들 거란 얘기를 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잘 즐기고 오신 분들은 다음에는 또 다른 곳을 가서 비교해 보시는 것도 좋겠죠. 이곳이 마음에 드셨던 분들을 폄훼할 의도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이 글을 읽고 불쾌하실 이유도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바보가 그 좋은 데 가서 뭘 제대로 못 즐기고 왔구나 하고 저를 비웃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메인 화면에 걸리는 바람에 예상대로 저의가 의심스러운 분들(뭐 여행사 관계자들일 수도 있겠죠^^)의 악플이 달리기 시작하는군요. 수고들 하세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