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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선덕여왕' 제작진은 퀴즈놀이에 푹 빠진 듯 합니다. 저번에는 '사다함의 매화'로 낚시질을 하더니 이번에는 유신과 보종의 비재 대결에서 신라(新羅)라는 국호의 세번째 의미(?)를 묻는 문제로 다음주 월요일까지 시청자들을 붙잡아 놓기로 결심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비밀이 다음주까지 지켜질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답은 이미 8일 방송된 드라마 속에서 전부 나와 있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답이 있어서 설마 이게 답일까 했던 분들, 여러분의 생각이 맞습니다. 정답은 삼국통일입니다. 그 밖에 무슨 답이 또 있겠습니까.

특히 주인공들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동안 죽방 이문식은 혼자 정답을 말하기도 했죠.




문노가 화랑들에게 낸 문제는 '지증왕 때 생긴 신라라는 국호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으며, 그 세 가지 의미는 화랑의 존재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 세 가지 의미를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무력의 양성, 신흥 세력의 육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는 다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번째 의미는 아무도 - 심지어 문제를 낸 문노까지도 -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낭도들이 답을 놓고 고민하는 장면. 죽방은 태연히 "신라면 새 그물이잖아. 화랑들이 그물이 돼 갖고, 그 그물에다 백제고 고구려고 다 쓸어 넣겠다는 거 아녀! 그물이 답이여!"라고 말합니다. 다른 낭도들이 "그렇게 쉬울 리가...?"하고 의심하자 "그래서 국선이시지, 그렇게 허를 찌르는거여"합니다.

죽방의 판단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답은 맞았습니다. 그리고 유신과 덕만이 거칠부가 숨겨 놓은 소엽도 표면의 미세한 글자를 들여다 보는 장면에서, 정답은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덟 자가 보입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군요.

회전을 시켜 보면 좀 더 확실히 보입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입니다. 해석하자면 '나라의 덕업을 새롭게 하여 천하를 받아들이다'라는 얘기가 됩니다. 즉, 나라를 잘 다스려 부강하게 하고 그를 통해 덕을 쌓아 사방으로 영토를 펼쳐 나가자는 얘기죠. 이 시기의 신라에서 다른 말로 바꾸면 삼한일통, 즉 삼국통일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개인적으로 '선덕여왕' 제작진에게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계속해서 그 궁금증을 증폭시키기 위해 이 감춰진(?) 의미를 '진흥왕의 불가능한 꿈'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이건 정말 어이없는 생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진흥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꿈꿨고, 거칠부가 편찬한 국사에 그 뜻을 담아 후세에 전하려 했으나 뒤를 이은 진지왕이 그 뜻을 잇기를 거부했고, 진지왕이 폐위된 뒤에도 미실과 세종이 짜고 그 뜻을 감추었기 때문에 지금(드라마 속의 시대)에 와서는 그 뜻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식으로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덕여왕' 제작진의 설정에 따르자면, 미실이 권력을 쥐고 있던 진평왕 때에는 왕도, 왕비도, 대신들도, 장군들도, 화랑들도, 아무도 '삼국 통일'이라는 대명제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아무도 이것이 국가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드라마지만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웃음이 나옵니다.

우선 당시 신라의 힘을 보겠습니다. 진흥왕 이후의 신라에게 있어 삼국통일이란 '불가능한 꿈'도 아니요, 어느 한 시대의 집권세력이 감추려 한다 해서 감춰질 정도로 불분명한 목표일 수도 없었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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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봐도 금방 드러나지만 진흥왕대의 신라는 이미 한반도의 핵인 한강 하구를 손에 넣었고 함경남도 지역까지 깊숙히 고구려의 영토로 침투하는 등 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한 나라입니다.

더구나 신라인의 스케일은 그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해 통일을 이루는 정도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흔히 '삼국통일의 염원이 담긴 탑' 정도로 알려진 황룡사 9층탑은 한 층마다 한 나라씩, 모두 아홉 나라를 병탄하겠다는 엄청난 야망이 담긴 탑입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 말갈, 7층 단원, 8층 여적, 9층은 예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9층의 예맥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겠다는 에너지를 뿜어내는 탑인 것입니다. 이 탑을 세운 것이 선덕여왕때라고 해서 이런 비전을 선덕여왕 혼자 갖고 있었다고 밀어붙이는 건 좀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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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미실은 "국가가 전쟁에 나서면 왕권은 강화되고 귀족들은 세력을 잃을텐데 무엇때문에 내가 세번째 의미(삼국통일)를 계승해야 하느냐"고 냉소하지만, 이것 역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그럼 대체 미실은 '삼국 통일', 다른 말로 '백제와 고구려의 정복'을 접어둔 채 어떤 주장으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굳히고, 화랑이라는 무장 집단의 발전을 정당화했을까요.  

요즘 같으면 '국방'과 '정복 전쟁'은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7세기에도 '주변국을 자극하지 않는, 그저 방어만을 위한 무력'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을까요. 어림없는 얘기입니다. 당시의 눈높이로 보자면 화랑과 상무정신의 존재는 정복 전쟁으로 이어질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진흥왕의 정신은 책 한권을 태우고 다시 쓰고 해서 가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흥왕의 의지를 표현하는 증표는 역사책 몇권보다 훨씬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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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네 군데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입니다. 진흥왕이 스스로 개척한 국토를 돌아보며 세운 세 군데의 비석만큼 팽창해가는 신라의 에너지를 잘 상징해주는 유물은 없습니다. 순수비가 뻔히 서 있는데 책 몇권을 조작한다고 이만한 국가적인 목표가 잊혀질 거란 생각은 참 안이합니다.

이 드라마의 설정대로라면 미실 일파는 반 통일세력이고, 그 이유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사리사욕에 빠져 국가적인 목표를 잃었다는 점이 미실 그룹이 타도되어야 하는 이유이고, 덕만은 이를 통해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명분이란 바로 삼국 통일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온 나라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다음 주의 '선덕여왕' 내용일 듯 합니다.

반통일적인 기득권 세력에 대항해 통일을 명분으로 내건 젊은 개혁세력 덕만. 용어는 그럴듯하지만 비유는 참 공허합니다. 용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끌어다 붙인 억지 춘향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걸 '작가의 메시지'라고 생각하겠죠.

저는 이미 몇달 전부터 '대체 미실과 덕만의 차이는 무엇인가, 덕만이 미실을 대신해야 한다면 그 명분은 무엇인가에 대해 드라마 제작진이 답을 내놔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이 드라마의 초점이 '대체 덕만이 미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도 좋은 명분은 무엇일까' 쪽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을 보며 내심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작진이 내놓은 답은 참 실망스럽습니다. 그냥 판타지 드라마로 남아 있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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