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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rious Basterds, 이하 '바스터즈')'을 보면서 설마, 설마...? 하신 분들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결정타가 터졌을 때, 뭔가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당연히 '선덕여왕'이 떠올랐습니다.

현대사든 고대사든, 뭔가 실제 일어난 일을 토대로 서사물(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을 만들 때에 작가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는 여러 갈래로 갈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중에는 '바스터즈...' 처럼 아예 역사를 싹 무시하고 자기가 갈 방향으로 가 버리는 작품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막 달리기는 마찬가지인데, '선덕여왕'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해선 안되는 걸까요? 창작자의 권리는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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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참 특이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어의 욕으로 사용되는 저 단어의 스펠링은 basterd가 아니라 bastard죠.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개새끼들'이 아니라 '개세끼들'인 겁니다. 단순히 1977년 영화와 구별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장난을 치고 싶었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바스터즈'는 엄청나게 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긴 이야기 때문에 간략하게 요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대한 정돈해서 얘기하자면 이렇습니다. (물론 최대한 모르고 보시는게 더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별로 원치 않는 분들은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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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미군의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는 유태인으로만 구성된 8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독일 점령지역 프랑스에서 독일군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특공대를 운영합니다.

나치에 의해 온 가족을 잃고 파리에서 신분을 감추고 살고 있는 쇼샤나(멜라니 로랑)는 우여곡절 끝에 극장을 운영하게 되는데, 어쩌다 그 극장에서 나치 고위 장성들과 핵심 요인들이 모인 가운데 나치만을 위한 영화 시사회를 갖게 됩니다. 쇼샤나는 이를 복수의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한편 영국군도 영화전문가 윌콕스 소위(마이클 파스빈더)를 보내 이 극장을 폭파하는 특수 작전을 수행하려 합니다. SS의 수사전문가 란다 대령(크리스토퍼 월츠, 발츠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은 이들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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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티노의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펄프 픽션'에 열광하고, '킬 빌'에 환호했겠지만 안 그런 분들도 많았을 겁니다. 물론 그의 작품에도 높낮이는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포 룸'이나 '데스 프루프'는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의 작품 중 최고봉은 '펄프 픽션'과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이번 영화는 그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뭣보다 첫 장면부터 타란티노 특유의 장난기가 뿜어나오죠. 영화 '알라모'의 주제가였던 'Green Leaves of Summer'가 깔리는 가운데 지평선 멀리서 농가를 향해 달려오는 독일군의 오토바이가 보입니다. 오토바이가 아니라 몇필의 말이었다면, 그냥 그대로 마카로니 웨스턴의 도입부일 겁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나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찾는 건 바보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런 액션 없이 대화만으로 서스펜스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그의 솜씨에서, 진정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을 느끼는 것은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특히 영화 도입부, 란다 대령이 프랑스인 농부를 신문하는 장면에서 서서히 높아져가는 긴장감과 공포는 마치 관객이 직접 심문당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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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만으로 사람 긴장시키기' 기법은 영화 여기저기서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그 대화 끝에는, 제법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관객을 바보로 만드는 기상천외의 결말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관객의 기대는 더욱 부풀어 오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소 잔인하다고는 하지만 그 잔인함이 영화의 재미를 해치지는 않습니다.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데이빗 보위의 'Cat People'과 온 사방에 깔려 있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들을 배경으로 온 관객들을 롤러코스터에 올려놓고 주무르는 타란티노의 솜씨는 이번에도 절대 실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소감은 여기까지. P.S. 이후는 나머지는 제목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포일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감상을 위해선 건너 뛰셔도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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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최고의 배우라면 역시 란다 대령 역의 크리스토퍼 발츠를 꼽아야겠지만, 브래드 피트의 연기도 만만찮게 빛을 발합니다. 벤자민 버튼으로서도 훌륭하다고 칭찬할 만 했지만, 역시 그가 가장 빛날 때는 건달 비슷한 계열의 연기를 보여줄 때입니다.

그 외의 배우들은 - 어쩌면 타란티노의 장난감 노릇을 한 - 뭐라 말할 부분이 그리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들도 자기 몫은 다 했습니다. 배우로서든, 장난감으로서든. (이젠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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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영화의 결말입니다.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타란티노는 지금껏 관객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멍- 하니 저 세상으로 날려버립니다. 마치 영화 속에서 '곰 유태인' 역을 맡은 일라이 로스의 방망이로 후려치듯 말입니다.

이런 결말에 환호하면서 '선덕여왕'이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고 짜증내는 건 이율배반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그리고 '타란티노'라는 브랜드에서부터 이 영화는 '자, 지금부터 우리는 무슨 짓이든 맘대로, 막 나갈테니 알아서 하게'라고 선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영화에서의 일탈은 그 자체로 관객을 즐겁게 하는 한 방식인 셈입니다. 이 영화가 현실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는 건 '맨 인 블랙'을 보면서 외계인이 어디 있냐고 성을 내는 거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선덕여왕'은 나름 진지한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굳이 홈페이지로 찾아가서 '신라의 혼을 되살리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나름 숭고한 기획의도를 다시 찾아 읽지 않아도, 이 드라마가 '화랑들이 등장하는 만화같은 풍경'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제가 '선덕여왕'이 잘못 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선덕여왕'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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