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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 납득이 안 가는 걸까요. 미실의 퇴장을 하루 앞두고 방송된 MBC TV '선덕여왕'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진흥왕이 남긴 조칙이었습니다. 문제의 문서가 대단한 비밀무기인 양 덕만은 문서를 땅속에 파묻고, 비담은 고민하고, 미실은 문서가 없어진 걸 보고 안색이 변합니다. 그리고 비담은 문서는 없었다고 보고합니다.

이 대목에서 상식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과연 이 문서는 그렇게 큰 폭발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서가 공개되면 세상의 판도가 바뀔까요? 제작진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지난주, 이 문서의 정체가 예고편을 통해 밝혀지면서 계속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대체 덕만은 저 문서를 어떻게 사용하려고 한 것일까.

그리고 이번 주, 그 해답이 공개됐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납득은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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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흐름에 따라, 각 인물의 입장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덕만의 입장:

소화는 죽기 전에 덕만에게 문서를 전해 줍니다. 문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조칙: 신라의 적인 미실을 척살하여 대의를 바로 세우라(詔勅: 新羅之敵 美室刺殺 而? 正立大義)' 그리고 '무신년 3월'이란 날짜가 쓰여 있고, 옥새가 찍혀 있습니다.

자, 일단 이 문서가 '진흥왕이 쓴 것'이라는 것이라는 보장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쨌든 옥새가 찍혀 있으므로, 왕명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칩시다. (사실 저 문서에서 알 수 있는 건 진흥왕의 한문 실력이 형편없다는 겁니다. 기초 문법에 맞게 쓰려면 '刺殺 新羅之敵 美室 而? 正立大義'라고 써야 합니다.)

만약 미실이 권세를 잡고 있을 때 이 문서가 공개된다면, 미실에게는 꽤 큰 타격이 될 것입니다. '진흥왕의 유지의 계승자'라는 미실의 권위의 한 축이 무너지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서를 공개하는 쪽도 죽음을 각오해야겠지만, 어쨌든 미실에겐 대단히 위험한 문서임에 틀림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덕만이 이 문서를 공개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은 바로 공개추국입니다. 백관들이 덕만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진흥제의 유지를 배반한 것이 바로 미실'이라고 공개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공격입니다. 하지만 덕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문서를 땅 속 깊이 파 묻었죠.

정작 덕만이 이 문서를 꺼내드는 것은 미실로부터 궁성을 회복하고, 대야성에 진을 친 미실과 일전을 준비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엔 미실의 위치에 상당히 큰 변화가 있었죠. 어제까지 위국령에 따라 정부 수반이었던 미실은 이제 반란의 수괴가 되어 있습니다.

이미 반란의 수괴란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여기에 진흥왕의 유언으로 다시 한번 미실을 신라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죽을 죄+ 죽을 죄'를 해 봐야 한 사람이 두번 죽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서를 공개할 가장 좋은 시기를 휙 넘긴 덕만은 뒤늦게 '이 문서만은 쓰지 않으려 했는데....'라며 비담에게 문서를 파 오라고 심부름을 보냅니다. 이건 뭘까요? 그 문서를 덕만이 쓰는 것은 반칙이란 뜻입니까? 몰래 훔쳐 온 문서이기 때문에 그걸 빌미로 미실을 공격하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뜻일까요?

(아마도 제작진이 생각한 이유는 다른 이유일 겁니다. 그건 다음 단락에서 얘기합니다. 한번에 다 해버리면 재미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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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담의 입장:

비담은 덕만의 심부름을 떠나 붉은 비단보 속에 들어 있는 진흥왕의 조칙을 열어 봅니다. 거기에는 '신라의 적인 미실을 척살하여 대의를 바로 세우라'고 쓰여 있습니다. 물론 쓴 사람이 누구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를 보고 비담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알아내 버립니다. 첫째. 이 글을 쓴 사람은 진흥왕이다(대단합니다. 심지어 연도도 엉망인데 그걸 알아내다니...). 둘째, 이 글을 받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조칙을 실행하지 않고 미실에게 바쳤다.

자, 여기서 비담의 두뇌는 계속 돌아갑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이 조칙이 덕만에게 전달되고, 덕만이 이 조칙을 공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각지의 귀족과 장군들이 '오오, 그동안 우리는 미실에게 속아왔구나. 미실은 이미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적으로 지명돼 죽었어야 할 몸이었구나! 그래!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덕만공주님께 달려가자! 가서 미실을 쳐부수고 신라를 바로 세우자! 야호' 하고 소리칠까요?

...라고 생각한다면 참 순진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미실은 진평왕을 구금하고, 위국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궁을 점거하고, 회의석상에서 대신을 함부로 죽이고, 화랑들을 닥치는대로 고문해 죽이고, 덕만공주 체포령까지 내린 상황입니다. 그리고 나서 상황이 뒤집혀 도성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도망쳐 남서쪽의 한 성에 웅거하고 있습니다. 네. 설명이 너무 길었나요?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반란의 수괴이자 내란의 주모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졸들이 미실을 따르는 건 모두 '미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이고 진평왕이야말로 왕 자격이 없는 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사실은 미실에게 아직 승산이 충분하고, 미실이 있는 힘을 다 발휘하면 서라벌의 왕과 덕만(얼마 전까지도 미실 앞에서는 쥐새끼같은 존재들이었던 자들이죠. 풍월주 유신? 서현? 웬 듣보잡들?) 따위는 한방에 날아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난(!)에 가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말했지만, 서라벌에 진평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 한, 이미 미실은 '반란의 수괴'입니다. 충분히 죽을 죄입니다. 여기에 '진흥왕도 미실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된다 해도 죽을 죄에 죽을 죄를 보탠 들, 그냥 죽을 죄 이상은 될 수 없습니다. 즉, '진흥왕의 조칙 따위는 이미 소용 무'인 상태입니다.

하지만 비담에겐, 그리고 '선덕여왕' 제작진에겐 이런 상식 따위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담은 갑자기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함께 의문을 갖게 됩니다. 대체 똑똑하기로 소문난 우리 엄마 미실이, 왜 있어 봐야 불리할 뿐인 이 문서를 그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해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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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실의 입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걸 보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앞부분, 난을 일으키기 직전 모드로 갔을 때 이 문서는 설원에게 있었습니다. 미실이 설원에게 이 문서를 맡긴 것은 '이 문서를 공개하면 나는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당신에게 나는 목숨을 맡긴 셈이다. 그만치 나는 당신을 신뢰하며, 나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난을 일으키면서 미실은 다시 그 문서를 회수합니다. 그리고 설원에게 "우리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비담입니다"라는 요지의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만약 이번 난이 실패하면, 이 문서를 비담에게 전하고, 비담으로 하여금 나를 죽이게 해서 큰 공을 세우게 하고, 그럼으로써 덕만의 치하에 나, 미실의 후손을 남길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계산을 위해 미실은 염종으로 하여금 비담을 서라벌에서 먼 곳에 묶어두게 하고, 당장 난이 진행되는 동안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못하게 합니다. 글쎄... 과연 난이 진압된다면 그 대혼란 속에서 무슨 수로 비담에게 그 문서를 전하고 무슨 수로 다른 사람 말고 정확하게 비담에게 죽게 될지도 참 궁금하지만, 아무튼 그런 건 어떻게든 가능하다고 칩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한 것은, 천재 비담은 진흥왕의 조칙을 보는 순간, 거기에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배려가 담겨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버린다는 점입니다. 뭐... 제작진의 배려겠죠.



4. 소화의 입장

소화는 이 문서를 갖고 '미실에게 해가 되고, 비담과도 관계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말만 하고, 비담이 미실의 아들이라는 걸 덕만에게조차 말하지 않습니다.

이 문서가 왜 비담과 관계가 있을까요. 이 문서때문에 미실이 진지왕에게 접근해 비담을 낳아서? 즉 비담이 태어나게 된 계기가 이 문서 때문이라서? 그리고 이 문서가 공개되면 비담이 역적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그런데 이건 모두 '세상 사람들이 비담이 미실의 아들이라는 걸 다 안 다음의' 문제라는 겁니다. 심지어 소화 자신도 덕만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은 비밀을 대체 누가 안단 말입니까. 이것이 가장 어처구니없는 답답이 소화의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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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실을 지지하던 지방 군단장 A씨의 입장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분을 위한 마지막 설명입니다. 비담이 문서를 덕만에게 정상적으로 전달하고, 궁성을 차지하고 있는 덕만이 대야성의 미실 토벌을 위한 지방군의 동원령을 내리면서, 칙서 하나를 공개합니다. 칙서에는 (반복하기도 귀찮다) '미실을 죽여라. 나 진흥왕' 이라고 써 있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정상인 A씨의 머리 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래? 그런데 왜 덕만공주가 그 문서를 갖고 있지?'
상식인인 A씨에게는 대체 왜 그런 문서가 남아 있는지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 문서를 받은 게 설원이고 설원이 냉큼 그 문서를 미실에게 바쳤는지 말았는지 그가 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조칙이 실현되지 않았는데 그 문서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그 문서를 갖고 있다면 왜 이제사 공개하지?'
이 대목에서 덕만공주에게 살짝 의심이 갑니다. A씨는 사실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어느쪽으로 붙어야 하나. 미실이 더 세 보이긴 했고, 미실에게 그동안 받은 것도 많은데 또 보니 미실은 궁성에서 쫓겨나 대야성에 있다고도 합니다.

'저 문서가 진짜긴 진짜야?'
A씨는 바로 얼마 전, '공주가 난을 일으켰으니 체포하라'는 문서에 당당하게 옥새가 찍혀 공개됐던 것을 기억합니다. 옥새가 찍힌 문서라는 건 권력을 쥔 쪽에선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죠. 진흥제가 미실을 죽이려 했는지 말았는지, 내 눈으로 원본을 본 것도 아니고 그깟 문서 쯤이야 궁성을 장악한 쪽에서는 백개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네. 지금 A씨에게 중요한 건 '그 문서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덕만은 이 문서의 진위를 어떻게 천하의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답은 '없다'입니다. 현재는 21세기 아니고 7세기입니다. 기자회견을 할 수도 없고, 문서를 스캔해서 인터넷에 올릴 수도 없습니다. 또 국과수에 문서의 필적 감정을 요청할 수도 없고, 문서에서 진흥왕의 DNA가 나오는 지 알 수도 없습니다. 문서가 최소한 30년이 됐다는 과학적 감정도 할 수 없습니다.
덕만이 할 수 있는 건 '그런 문서가 있다'고 선포하는 것 뿐이고, 사람들은 그걸 믿고 싶으면 인정하고, 믿기 싫으면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럼 이 상황에서 A씨에게 정말 중요한 건 뭘까요.

'그런데 대체 누가 이길 상황이지?'
빙고! 중요한 건 이겁니다. 만약 미실이 이길 상황이라면 그깟 문서 따위는 '간교한 덕만공주가 만들어 낸 것'으로 쳐 버리면 됩니다. 반대로 공주가 이길 상황이라면 '아 그래! 우리는 그동안 미실에게 속아 왔다! 자! 정의의 군사를 일으켜 역도 미실을 치자!'고 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대체 그놈의 문서가 뭐라고 이 난리란 말입니까. 정 뭐하면, 진흥왕의 유서 같은 건 백개라도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 그게 양심에 걸리면, '진흥왕의 손자이며 신라의 왕인 진평왕'의 이름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킨 신라의 적 미실을 처단하라'는 조칙을 내리면 어떻습니까. '미실은 진흥왕의 조칙으로만 죽일 수 있다'는 무슨 특별법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이런 식이기 때문에, 현재 '선덕여왕'이 비틀거리는 이유는 역사 왜곡이 아니라 제작진의 억지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긴, 까짓 거 어떻습니까. 오늘 밤 미실의 장렬한 최후를 지켜보면서 그냥 감동 한 번 해 주면 그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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