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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이상하게 잠이 잘 안 오더군요. 불면증이었나봅니다. 아무튼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는데 웬 아저씨가 풀죽은 표정으로 턱을 괴고 머리맡에 앉아 있었습니다.

뭐 늘 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더군요. 이름을 물으니 형종이랍니다. 다른 분들은 전부 빙의로 찾아왔는데 왜 이렇게 직접 찾아왔느냐고 물으니 "남들은 잘 되던 모양인데 왜 난 안 되지?"하며 오히려 반문을 하더군요.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빙의도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분도 뭔가 드라마에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받아 적어 봤습니다. 대신 빙의 상태가 아니라서 인터뷰 형식이 되더군요. 진짜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인지도 궁금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별로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김남길 인터뷰가 아니라 비담 인터뷰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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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 결정적인 건 아니지만, 앞선 '빙의' 시리즈를 보시는게 더 이해가 빠르실 듯.

 

 



그리고 비담과의 인터뷰입니다.

- 당신의 성은 무엇인가.
"당연히 김씨다. 그런걸 왜 물어보나. '선덕여왕'에 나온 사람 중 김씨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되나."

- 그럼 이름은 정말 비담인가?
"이름이란게 뭔가. 남들이 자기를 그렇게 부르면 그 이름이 내 이름 아닌가? 다들 나를 비담이라고 부르니 나는 자연스럽게 비담이 됐다."

- 문득 '꽃'이란 시가 생각난다. 그렇게 얘기하니 갑자기 당신의 이름이 비담이 아니라 춘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시 같은 걸 알 사람으로 보이나."

- 하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흠... 초기의 나 말인가, 말기의 나 말인가?"

-그래도 그 드라마에서 당신은 비교적 캐릭터가 균등하게 유지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초기의 나는 약간 이중인격적인 캐릭터였다. 한마디로 선악을 초월한 캐릭터였지. 인간적이라기보단 동물에 가까웠다. 즐거우면 웃고, 좋으면 좋고, 대신 누군가 비위를 거슬리면 그 자리에서 검으로 베어 버리는 인물이었다. 머리가 좋긴 했지만 그건 순간적인 대처였기 때문이다. 초반의 비담이라면 오랫동안 고민하고 계획을 짜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할 인물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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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렇다. 그렇게 상황에 따라 휘딱휘딱 변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염종이 스승을 죽인 범인인 걸 알고도 다음 순간 염종을 살려 주는 행위가 가능한 거다. 그런데 후반으로 가면서 이상하게 성격이 왜곡됐다."

-어떻게?
"지나치게 머리를 많이 굴렸다. 한마디로 생각이 많아진 거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그렇게 되지 않나?
"하긴 그럴수도 있겠군. 아무튼 이번 기회를 빌어 작가들에게 고마운 점은 첫째, 내 역할에 미남 배우를 캐스팅해 준 것이고 둘째, 나를 검술의 명인으로 그려 준 점이다. 솔직히 내가 그 시절에 검을 잘 썼다면 화랑이나 장군으로 출세했겠지. 나는 본래 무인 기질은 없다."

-그럼 고맙지 않은 점은?
"칼을 잘 쓰는 대신 너무 머리가 나쁘게 그렸다. 일국의 상대등을 지낸 나를 그렇게 무식한 놈으로 그리다니. 거기다 귀는 왜 그렇게 얇은가. 누가 무슨 말만 하면 획획 돌아서고... 측근들에게 내가 정말 저렇게 변덕이 심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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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당신은 대체 왜 난을 일으켰나.
"아니 그렇게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도 모르겠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당신은 선덕여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한 걸로 알고 난을 일으킨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신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 선덕여왕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물론 나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나."

-극중에서 당신의 마음 속 소리는 "내가 신국이 되어 너를 차지하겠다"는 걸로 나오던데. 대체 그럼 그 대사를 듣고 감동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 수많은 시청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거 농담이다. 설마 그런 말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난을 일으켜 성공해서, 내가 왕이 된다 치자. 폐위된 여왕을 내가 마누라로 삼을 수 있겠나? 설사 여왕이 항복하고 내 마누라가 되어 살겠다고 한다고 치자. 우리 편들은 가만히 있을 것이며, 여왕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편은 또 가만히 있겠나?"

-그럼 대체 왜 난을 일으킨 건가?
"그렇게 모르겠다면 얘기해주지. 나는 독재를 막기 위해 싸운 거다."

-독재?
"그렇다! 진흥제 사후 진평-선덕 2대에 걸쳐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살하려고 시도한 독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싸운 거다. 우리 신국은 본래 화백회의라는 간접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였다. 어떤 군주도 자기 독단으로 나라를 이끈 적이 없다. 그런데 선덕여왕과 그 후계자로 사실상 지목된 김춘추가 아예 민주주의의 싹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내가 죽고 나서 진덕여왕때 김춘추는 집사부를 설치하고 화백회의를 무력화한 다음 권력을 자신이 독차지했다. 내가 우려하던 일이 바로 실현된거다."

-그건 당신을 만들어 준 작가의 생각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작가들에 따르면 이 드라마에 나오는 화백회의는 소수 귀족들의 이권을 대면하기 위해 존재하던 부패한 기관이던데.
"하하. 그건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7세기 신라에 덧씌우다 보니 일어난 코미디다. 화백회의에서 참가자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걸 오늘날 국회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면 속없는 사람들이 '현실 정치에 대한 은유'라면서 칭찬을 해 대더라. 바보같은 짓이다. 그럼 물어보자. 화백회의가 없어지고 왕 혼자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좋은 점은 뭔가? 국회가 공전하면 아예 국회를 없애는게 나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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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은 독재자라기보다는 민본정책을 실현하려 한 사람으로 그려졌다고 볼...
"그래서 사람들은 이율배반적이라는 거다. 극중에서 덕만도 우리 어머니를 존경한다. 왜? 똑똑해서 혼자 다 알아서 했기 때문이다. 자기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적당하게 죽이고 처리해가면서 말이다. 말하자면 유신 체제나 다를 게 없다."

-유신이라니... 김유신 말인가?
"아니. 그 유신 말고. 그 왜 총 맞고 죽은 대통령 있잖나. 내가 보기에 드라마에 나온 우리 어머니의 모델은 바로 그 사람인 것 같다. 별로 인기는 없는 것 같던데, 희한하게 시청자들은 다들 미실 좋다고 난리더라."

-음... 아무튼 왕의 독재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볼 때 '왕권 강화'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국정이 효율화되어 그 이후 신라의 통일 사업에 국력이 집중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효율이 좋으면 지금도 대통령인가 뭔가를 뽑아서 임기도 한 30년으로 하고, 국회 같은 건 없애 버리면 되지 않나? 독재자가 반드시 유능하고 똑똑할 거란 보장이 있나? 당신들은 요즘 '견제가 없는 독재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고 배우는 것 같던데."

-별걸 다 안다. 죽고 나서 공부를 꽤 많이 한 것 같다.
"한번 죽어 봐라. 죽고 나면 남는게 시간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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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듣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 아무튼 그렇다 치고, 그럼 당신은 화백회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인가?
"그렇다."

-덕만을 좋아한 건 아니고?
"물론 덕만을 사랑했다."

-그럼 대체 왜 난을...
"나는 덕만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다. 신라를, 신라의 민주주의를 더 사랑했을 뿐이다."

-표절이다.
"알고 있었나? 사실 그 이야기도 덕만에게 들은 거다. 어려서 읽은 플란다스의 개인가 하는 책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고 하더라. 브루터스가 뽀빠이를 죽이고 나서 그런 말을 했다고..."

-플란다스의 개가 아니라 플루타크 영웅전이겠지. 그리고 뽀빠이가 아니라 케사르다.
"그게 뭐 중요하겠나. 아무튼 우리는 국왕의 전제에 도전한 민주 열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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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7세기 신라에서 민주주의 얘기 하는 건 좀 어색하다.
"뭐가 어색한가? 드라마 나도 열심히 봤는데 덕만이 미실과 6분토론인가 뭔가 하면서 '시대정신(Zeitgeist)' 어쩌고 하더라. 그럼 내가 민주주의 얘기하는 건 이상하고, 덕만이 19세기 철학자 헤세의 용어를 쓰면서 얘기하는 건 괜찮냐?"

-...헤세는 소설가고 시대정신을 말한 철학자는 헤겔이다. 그리고 헤겔보다 괴테가 더 먼저 그 말을 썼다. 인터넷만 보지 말고 책을 좀 읽지.
"미안하다. 인터넷으로 보는게 훨씬 편하고 빨라서... 아무튼 왜 나한테만 7세기 사람이 될 걸 강요하나? 나도 21세기식으로 멋지게 나오고 싶다. 독재자 덕만에 저항하다 죽은 낭만주의자 비담, 얼마나 멋진가."

-아니 그게 무슨 사극인가.
"...그럼 지금까지 '선덕여왕'이 사극인줄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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