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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만 관객 동원을 향해 가고 있는 '전우치'를 뒤늦게 봤습니다. 최동훈 감독에 대한 신뢰야 여전했지만 연말연시엔 도무지 짬이 나질 않더군요. 기대대로 영화는 재미 만발. 제작비를 물 쓰듯(그래 봐야 '아바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쓸 수 있게 된 최감독이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 걸 다 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도사 전우치'라는 이름은 많은 사람들이 초등학교 시절에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홍길동만큼 친숙하지는 않지만 암행어사 박문수나 홍의장군 곽재우 정도로는 익숙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튼 전우치는 홍길동 못잖게 도술과 해학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다만 홍길동과 차이가 있다면, 이 전우치는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이죠. (홍길동 역시 홍길동이란 도둑이 조선 중기에 있기는 했습니다만, 소설 속 홍길동과는 스펙이 너무나 다릅니다)

실존인물 전우치가 궁금하신 분은 바로 맨 아래로 가시기 바랍니다. 일단 영화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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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의 수장 표훈대덕이 잡아 놓고 있던 요괴들이 어리숙한 세 제자 신선들의 실수로 풀려나고, 이들을 제압하고 있던 보물 피리(만파식적?)가 함께 사라져 인간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시대는 조선 중기. 세 신선은 당대 최고의 도인 화담(김윤석)을 찾아가 요괴를 잡고 피리를 찾아 줄 것을 요청하죠. 한편 천관도사(백윤식)의 제자 전우치(강동원)는 부적을 사용하는 재주를 이용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온갖 장난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합니다.

우연히 요괴와 싸우던 전우치의 손에 피리가 들어가고, 화담은 피리를 찾아 전우치와 스승 천관도사가 살고 있는 선경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어찌어찌하다가 전우치는 요괴와 한 편으로 몰려 그림 속에 봉인된 채 50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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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동훈 감독이 만들어 낸 전우치는 고대소설 '전우치전'보다는 '서유기'의 손오공에 가깝습니다. 말썽꾸러기 도사 전우치가 500년 세월을 봉인당했다가 새로운 시대에 풀려나 엎치락 뒤치락 코믹 액션을 펼치는 설정은 누가 봐도 손오공 이야기에서 따 온 것이죠. 중간에 벼슬을 주어 전우치를 달래자는 신선들의 이야기 역시 제천대성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어쨌거나 이 영화를 꿰뚫는 정서는 전복의 미학입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전우치가 2009년의 서울 한복판에서 액션을 펼치는 것(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청계천과 한강, 남산타워 등 서울 시내의 볼만한 장소들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화 전체가 서울의 홍보 역할을 하고 있죠)부터 이 전복은 시작됩니다.

전우치가 도술을 뽐내다 화담 서경덕에게 제압당하는 원작의 설정과는 달리 여기선 조선시대의 명 유학자로 이름을 날린 화담이 악당 중의 악당으로 등장하죠. 게다가 보쌈을 두려워해야 할 과부(임수정)는 오히려 20세기풍의 낭만적인 연애를 꿈꿉니다. 제자리에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최감독이야말로 전우치보다 더 악동인 셈이죠.^ 모조리 자리를 바꿔 놓고, 마지막엔 초랭이의 정체(?)까지 뒤집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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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늘 얘기하는 거지만 '전우치'의 경우에도 영화를 볼만하게 만드는 건 현란한 특수효과가 아닙니다. 한 순간도 '저기서 왜 말도 안되게 저기로 넘어가?'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는 탄탄한 구조와 속도감 높은 편집입니다.

사실 주인공 강동원은 물론이고 김윤석이나 임수정, 염정아, 도사 3인방 역의 주진모 송영창 김상호 등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 할 일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쉴새없이 펼쳐지는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배우 하나가 '인상적인 장면'을 뽑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 '배우들이 낭비됐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걸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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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서도 김윤석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하나를 살려 내는 솜씨를 보입니다. "더 살아 봐야 아무 것도 없단다." 대단합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당연히 강추작입니다. '어린이용 영화가 아닐까' 주저하셨던 분들, 어서 극장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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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제목에 대한 책임입니다. 실존인물 전우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정확한 생몰연대는 밝혀진 데가 없지만 조선 중기에 실제로 활동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출신지에 대한 기록은 황해도, 개성, 평안도 등으로 다양합니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61권에 따르면 전우치는 '순오지'의 저자로 알려진 홍만종의 '해동이적(海東異蹟)'이라는 책에 한국 선도의 대표적인 인물 38인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중에는 한라선인, 지리선인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도사들도 있지만 토정 이지함이나 남사고처럼 예언가로 후세까지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있고, 김시습 강감찬 서경덕 곽재우 등 도술을 썼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들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또 이기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도 '명나라 세종 연간(16세기 중엽)에 해서(황해도) 사람 전우치가 도술로 역병을 치료하고 사람들을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밖에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죽은 뒤에도 나타났다는 기록 등이 여기 저기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전우치의 시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 / 秋晩瑤潭霜氣淸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 / 天風吹下紫簫聲
푸른 난(鸞)은 오지 않고 하늘 바다 넓으니 / 靑鸞不至海天闊
서른 여섯 봉우리에 가을 달은 밝도다 / 三十六峯秋月明

당대의 문장가인 허균이 '그의 시를 읽으면 시원하다'고 소개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행동거지가 남다른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듯 하며, 이런 실재 인물을 배경으로 후세 사람들이 '전우치전'이라는 고대 소설을 남긴 듯 합니다. 다만 소설 속의 전우치는 실제의 행동보다 훨씬 과감해져서 임금을 희롱하기도 하고 군사를 지휘해 군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마음을 달래는 영웅으로 묘사되는 데에는 차이가 없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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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도입부의 나레이션에서 '신선 표훈대덕'은 아마도 신라시대의 명승 표훈대사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싶은데, 굳이 고승에게 붙이는 칭호인 '대덕'을 신선에게 붙인 것도 이상하고, 그 다음에 '미관 말직의 세 신선'이라고 한 것 역시 대체 왜 신선을 미관 말직이라고 부르는 지 알 수가 없더군요. 왕년의 명 논술 강사 최동훈 감독의 손이 간 작품 치고는 이런 부분이 좀 의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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