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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코트의 '로빈 후드'가 개봉되기 전부터, 해외 리뷰들은 좀 시끌시끌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로빈 후드 얘기냐!"는 얘기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마그나 카르타'라는, 많은 사람들이 '그거 게임 이름 아냐?'라고 묻는 1215년의 대사건이 여러 리뷰에서 등장하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로빈 후드 이야기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항변하고 있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의 스펙터클을 '글래디에이터'에 비교해 비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 이 영화는 형편없는 졸작일까요?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밤늦게 본 영화 '로빈 후드'는 그냥 몇마디 말로 무시하기엔 충분히 볼만한 가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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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 사자왕 리처드의 십자군 원정에 속해 있던 궁수 로빈 롱스트라이드(러셀 크로)는 어찌 어찌 하다가 리처드의 전사를 지켜보게 됩니다. 리처드의 휘하 기사인 로버트 록슬리로부터 자신의 칼을 고향의 아버지에게 전해 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받게 된 로빈은 어찌 어찌 하다가 로버트 록슬리의 대역을 연기하게 됩니다.

로버트의 고향인 노팅험에는 로버트의 아버지 록슬리 경(막스 폰 시도)과 아내 마리온(케이트 블랜칫)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편 리처드의 왕위를 이어받은 동생 존 왕은 실정과 무리한 세금 착취로 민심을 잃어가고, 이를 틈탄 프랑스 왕 필립은 존의 측근인 고프리(마크 스트롱)를 통해 잉글랜드 정복의 야심을 불태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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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존의 로빈 후드 이야기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시점입니다. 전통적인 로빈 후드 스토리에서 로빈 후드가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것은 리처드가 유럽 어딘가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12세기 말의 어느 시점입니다. 즉 '존 왕이 리처드의 몸값 지불을 명분으로 사방에 행정관(sheriff)들을 보내 닥치는대로 세금을 걷어들이며 포학질을 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스토리의 엔딩은 충신들의 노력으로 리처드 왕이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해피엔딩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로빈 후드 자신은 여자 수도원장의 음모에 따라 독을 먹고 죽게 되죠.)

하지만 이번 리들리 스코트의 '로빈 후드'는 아예 리처드의 죽음부터 이야기가 시작해버리니 이건 전혀 다른 얘기가 될 것이라는게 분명해집니다. 게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로빈의 앞에는 만민 평등사상을 그 시대에 구현해 낼 혁명가로서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낱 궁수로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던 병사가 잉글랜드의 지방 영주들을 규합해 대헌장 Magna Carta를 이끌어내는 시대의 영웅으로 변신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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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주장하는 것은, 이 영화가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로빈 후드 영화와 스토리의 프리퀄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만 일단 이렇게 시대가 달라져 버리고 나면 이건 역시 이 뭥미...라는 반응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황당함을 느끼게 되는 첫번째 순간입니다. 각본가 브라이언 헬겔런드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짝퉁 '마틴 기어의 귀향(혹은 '서머스비')' 스토리는 뭔가 실소를 자아내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관객 중에 전통적인 로빈 후드 이야기에 밝은 사람이 그리 많을 리가 없으니(영/미권 관객이라면 너무나 친숙한 얘기겠지만 한국에도 뺑덕어미가 심청전에 나오는지 콩쥐팥쥐에 나오는지 헷갈리는 사람들이 널린 세상이니 이게 그리 큰 흉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한국이나 온 세계의 관객들에겐 그러려니 할 일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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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래의 로빈 후드 이야기는 고작해야 수십명의 셔우드 숲 산적 패거리가 노팅험이라는 한 동네의 지방 행정관 혹은 영주와 벌이는 활극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갑자기 영화에서는 한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과 정치 이야기로 변신합니다. 이에 대한 어색함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과연 로빈 후드는 마그나 카르타의 주역이었을까요? 물론 그거야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필립 왕의 잉글랜드 침공 같은 것은 일단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경은 도버 해협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리처드가 죽은 것은 1199년, 존 왕이 프랑스에게 결정적으로 패전한 것이 1214년, 그리고 마그나 카르타에 사인한 것이 1215년입니다. 그리고  1214년의 결정적인 패전으로 잃은 영토가 바로 북부 프랑스의 부르타뉴 지방인 것입니다. 그러니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헤이스팅스 절벽에서 한판 대결을 벌이는 것은 당나라와 연개소문이 대동강 강가에서 싸우는 것 같은 생뚱맞은 장면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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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이것 역시 절대 다수의 관객들에게는 흠잡힐 일이 없는 사건인게 분명합니다. 많은 관객들은 '어쨌든' 영국과 프랑스가 싸우니 프랑스는 바다를 건너 와야 실감이 난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진짜 약점은 너무 빨리 휙휙 변하는 주인공 로빈 후드라는 캐릭터입니다. 그냥 잘 싸우는 군인이자 동료들에게 야바위 놀이나 하던 로빈이 너무 눈 깜짝할 사이에 시대의 깨인 정신이자 대군을 이끄는 명장으로 변신하기 때문입니다. 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며칠 사이에 당대의 검객으로 변신하는 견자를 탓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까짓거 어차피 영웅이 되고 말 것, 시간 끌지 말자는 거라면 좀 우울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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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충분히 즐길 거리를 제공합니다. 가장 큰 미덕은 이 영화가 자신들의 배경이 12세기의 영국/프랑스 지역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런던의 영국 왕실은 배가 도착해 문이 열릴 때까지 리처드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깁니다.

하지만 더 옛날을 다룬 한국 사극에서는, 전장이 도성에서 사흘 거리든 나흘 거리든, 도성에 앉은 주인공들은 너무나 쉽고 간편하게 전장의 사정을 꿰뚫고 있습니다. 유능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무심한 작가가 핸드폰이 있고 무전기가 있는 20세기와 당시를 혼동하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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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리들리 스코트가 충실하게 재현해 주는 그 시대의 전장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감동을 자아냅니다. '글래디에이터'의 첫 신이, 수적으로는 훨씬 많았던 튜튼족이 왜 제대로 훈련받은 로마군에게 정복당했는지를 당시의 전술과 고증을 통해 충실히 보여준 명장면이었다면, 이번 '로빈 후드'의 도입부는 12세기 기준의 공성전을 신나게 보여줍니다.

아울러 이 시기로부터 300년 동안 유럽의 전장에서 잉글랜드군을 강군으로 소문나게 했던 장궁(longbow) 부대의 위력도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본격적으로 이 장궁부대를 활용한 것은 100년 정도 지난 뒤의 에드워드 흑태자Edward the black prince이지만, 이 시대부터 그 단초가 있었다는 건 충분히 그럴싸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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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마지막 해변 전투에서 사정거리 300m에 달하는 장궁부대가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그 틈으로 기병이 돌진해 기선을 제압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장궁대를 이용하는 전투의 모범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300'은 기본적으로 만화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이런 장면들의 가치가 다시 한번 부각될텐데, 아쉽습니다.

한마디로 스코트가 보여주는 전쟁은 그저 시작만 했다 하면 우리편과 적이 엉망으로 뒤섞여 개싸움을 보이는 한국 사극의 전투 신이나, 전투의 상리를 무시하고 무슨 짓을 하건 우리 편이 이기는 '반지의 제왕' 류의 판타지 전투 신과는 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 시대의 무기와 그 시대의 상식으로 남자들이 신명을 다해 싸우는 방식을 훌륭한 연출가가 반칙 없이 재현해 낸, 충실함이 느껴지는 장면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오우삼의 '적벽대전'의 어처구니없는 전투 신들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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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 영화가 스토리나 주인공의 설정, 전개 방식에서 상당한 약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런 박진감 넘치는 신들은 다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펙터클이 글래디에이터만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뭐든 크고 화려하면 장땡이라는 식의 수준 낮은 시선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빈 후드'는 개인적으로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극중 비중이 아주 크지는 않지만 리틀 존이나 터크 수사처럼 이미 유명 캐릭터가 되어 버린 로빈 후드의 조연들까지 제대로 살려 낸 감독의 시선은 이 스토리에 대한 애정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점을 다시 느끼게 해 줍니다.

(물론 여주인공 캐스팅은 대실망이지만 말입니다. 피터 잭슨에 이어 스코트까지 이렇게 실망스러운 선택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십자군 전쟁에 시달리던 로빈이라면 누군들 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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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그런데 설마 '로빈 후드 2: 마그나 카르타' 같은 작품이 나오진 않겠죠.^^

P.S.2. 케이트 블랜칫이나 메릴 스트립의 외모에 대해 실망하는 얘기를 할 때마다 '어머 눈도 높으셔라 그정도면 환상적인 미녀 아닌가요'하는 댓글을 다는 여자분들이 있는데, 이제 지겨워서 한줄 붙입니다. 죄송합니다. 블랜칫보다 한 천배쯤 예쁜 마누라와 살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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