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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혜성처럼 등장한 '슈렉'은 현재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판도를 만든 작품으로 꼽을 만 합니다. 상대적으로 신생 제작사였던 드림웍스는 '슈렉'의 대성공을 통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디즈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애니계를 지배하는 양대산맥으로 자리를 굳힙니다.

하지만 드림웍스는 이런 일등공신인 슈렉을 처음 만들어진지 9년만인 2010년, 단종시키기로 결정합니다. 4편째에 '슈렉 포에버(Shrek Forever After)'라는 제목을 붙이고, 여기에 '최후의 장(Final Chapter)'라는 구호를 덧붙인 것입니다.

물론 '13일의 금요일' 시리즈처럼 아예 제목에 Final Chapter라는 말을 넣고도(시리즈 4편에 해당합니다) 그 뒤로 다섯 편이나 더 시리즈를 이어간 양심불량의 사례도 있지만, '슈렉' 시리즈에 관련된 사람들이 그런 몰염치한 행위를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대체 지난 9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슈렉'은 그저 상업적인 성공 뿐만 아니라 업계의 판도를 바꿔 놨고, 또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습니다. 외모지상주의라는 인류 불멸의 숙제에 냉엄한 문제제기를 하는 한편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히트작과 잘 알려진 동화의 세계를 동시에 비트는 발랄한 패러디로도 신바람을 냈습니다. 한마디로 '슈렉'은 단순한 히트작이 아니라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라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는 장르에서 어떻게 하면 승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범 역할을 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성공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을 그냥 버려둘 바보 제작자는 없을 겁니다. 당연히 '슈렉2'가 만들어졌고, 역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슈렉' 시리즈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작품은 이 '슈렉2'입니다. 이는 1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긍정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1편의 장점은 그대로 계승하고 요정 아줌마와 그 아들인 프린스 차밍의 악역도 빛을 발했습니다. 슈렉을 미남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설정도 그럴싸했죠.

Shrek $267,665,011 5/16/2001
Shrek 2 $441,226,247 5/19/2004
Shrek the Third $322,719,944 5/18/2007

하지만 3편에서 2편의 흥행은 재현되지 못합니다. 물론 1편보다는 3편이 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대략 이 시리즈의 팬들 사이에도 '최악은 3편'이라는 합의가 이뤄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건 세월이 지나며 익숙함이 식상함으로 바뀐 경우일 수도 있고, 아이디어의 고갈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3편은 과연 이 시리즈가 장수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중대한 의문을 던졌습니다.



특히 시리즈가 세 편까지 나오면서 '슈렉' 시리즈의 상징 같았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누구나 다 아는 동화의 비틀기'같은 의미는 저 멀리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1편과 2편에서 온갖 동화들의 요소를 다 뽑아 먹은 뒤로 3편에서는 전설의 아서왕을 연상시키는 아서(주로 아티라고 불리죠)까지 등장시켰지만, 그 한 편의 영화가 많은 관객들에게 '이건 좀 한계에 온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데 충분했습니다. 


오히려 '슈렉 포에버'는, '슈렉' 제작진이 '좋은 마무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뭉치자'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3편에 워낙 혹평이 쏟아졌던 터라, 딱 한편만 더 만들어서 좋은 인상을 남기자는 듯한 느낌이었죠.

그래서 4편은 '만약 슈렉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과제를 던집니다. 슈렉이라는 주인공이 없었다면 나머지 주요 등장인물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4편은 슈렉이 세 꼬마 괴물(오우거)의 생일잔치를 준비하느라 생활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는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과거의 평화롭고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 없던 삶이 그리워진 슈렉은 분통을 터뜨리는데, 바로 여기서 럼펠 스틸스킨이라는 사기꾼 마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슈렉에게 과거의 단 하루를 준다면, 자신은 슈렉에게 자유로운 하루를 주겠다며 계약서에 사인하게 합니다. 당연히 슈렉은 사인을 하는데, 그 만만하게 생각했던 '하루'가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4편은 여러 면에서 3편보다 훨씬 나은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슈렉과 동키, 장화신은 고양이의 유머는 여전하고 특히 뚱뚱해진 고양이는 훌륭합니다. 또 새로운 악역인 럼펠 역시 신선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수근의 더빙 버전을 보는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도 느꼈지만, 상영관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ㅠ)


반대로 1편과 2편을 지배했던 신선한 비판정신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4편의 주제는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라'는, 아주 기존 사회 질서에 충실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슈렉에게 '이제 가장이 됐으니 철이나 들라'고 족쇄를 채워주는 꼴이랄까요. 보수화된 슈렉이라니, 이런 슈렉은 이제 끝내는게 맞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딱 좋습니다.
 
'동화 속 세계'의 이미지나 할리우드에 대한 패러디는 싹 사라져 있다는 점도 못내 아쉽습니다. 기왕 4편으로 시리지를 마무리할 거라면 백설공주나 라푼첼, 후크 선장도 한번쯤 다시 모습을 보일법 했는데 말이죠.

어쩌면 '슈렉' 시리즈가 4편으로 끝을 맺게 된 건 제작진의 완벽주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슈렉' 시리즈 1편과 2편은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대략 3-4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의 아이디어가 투입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연작 영화들이 이보다 훨씬 못한 내용으로 시리즈를 이어가곤 하는데, 이 제작진은 '천하의 슈렉 시리즈가 그런 꼴로 연명하는 건 절대 볼 수 없다'는 듯한 강경한 자세를 보여주는 셈입니다.

(장화신은 고양이, 슈렉, 동키, 피오나..)

4편의 미국내 흥행은 아마도 시리즈중 가장 적은 2억3천만-4천만달러 선에서 끝날 것으로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꼴찌라는 것이지 전체 영화시장에서 보면 훌륭한 대박 히트작입니다. 이런 폭발력을 가진 시리즈를 딱 4편에서 끝내겠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결단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길게 써놓긴 했는데 그래서 결론이 뭐냐는 분들, '슈렉 포에버' 무척 재미있습니다. 굳이 3D로 만들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 2D냐 3D냐의 선택은 제작비에서 10%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고 합니다. 즉 실사 영화와는 달리 '그럴바엔 몇푼 더 써서 그냥 3D로 만드는게 낫잖아?'라는 상황인 것이죠.

LA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슈렉 4D'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슈렉' 제작진은 이미 3D 경험이 있고, '슈렉 포에버'의 몇몇 장면은 4D에 최적화되어 있기도 합니다. 다만, '슈렉 포에버'가 아니라 이후의 '슈렉5'건 '슈렉6'건(혹시 나온다면), 어떤 새로운 작품도 '슈렉'의 1편과 2편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거란 건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P.S. 그렇다면 이제 드림웍스의 새로운 간판이 될 '쿵푸 팬더'는 과연 몇편까지 시리즈를 이어 갈 수 있을까요. 어쨌든 '슈렉'의 전례는, '쿵푸 팬더' 역시 '구질구질하게 질질 끄는' 속편 제작은 절대 없을 거란 점을 보여주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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