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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이들 5초 가수 비판'이라는 리포트가 MBC 뉴스데스크에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도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아이들 가수들에 대한 '주류 언론'의 시각이 그리 곱지 않았다는 건 엊그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루 지나는 동안, 이 '5초 가수 비판'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것을, 정당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선 아무래도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꼼꼼이 다시 뜯어 봐도 뭔가 이상한 논리였기 때문입니다.



보도를 직접 보지 못한 분들도 있을테니, 보도의 주요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체 보도 내용은 이쪽에 있습니다.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663569_5782.html




그리고는 애프터스쿨의 사례가 제시됩니다.

8인조 걸그룹 애프터스쿨이 음악방송에 출연해 부른 3분짜리 노래입니다.
멤버들이 개인별로 노래한 시간을 재봤습니다.
리더인 가희가 18초, 메인 보컬 레이나가 13초, 정아는 6초, 주연은 가장 적은 3초.
멤버 하나가 빠져 일곱명이 노래를 불렀지만 솔로파트 시간은 3초에서 최대 18초였습니다.



일단 전제가 해괴합니다. 한 그룹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각각 개인이 부른 솔로 파트가 짧으면 '가수라는 말이 무색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일단 이 말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그건 우선 조금 두고 보겠습니다.

두번째, 배분 문제입니다. 3분짜리 노래를 8명이 정확하게 나눠 불렀다면 약 22초, 7명이 불렀다면 25초 정도씩이 나옵니다. 그런데 3분짜리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솔로들이 돌아가며 불러야 정상적인 노래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전주 빼고, 간주 빼고, 후주 빼고, 여러명이 함께 부르는 하이라이트(업계에선 '싸비'라는 말로 자주 불립니다) 부분을 다 빼고, 돌아가며 부르는 부분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많아 봐야 전체 노래의 60%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가희의 18초 등등은 오히려 인당 평균보다 많이 불렀다는 뜻도 되겠죠. 그러고 나면 대체 '가수란 말이 무색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최대한 이 보도에 호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런 얘기일 수도 있을 법 합니다. 이를테면 한 그룹 내에 '노래하는 멤버'와 '노래보다는 다른 쪽으로 기여하는 멤버'의 구분이 너무 확연하고, 그러다 보니 양쪽 멤버들 사이에 노래의 배분이 심하게 불균형을 이루고, 그래서 후자 쪽, 즉 노래보다는 미모나 댄스 솜씨로 기여하는 멤버들은 과연 가수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뭐 이런 뜻이라면 이것 역시 철지난 얘기긴 하지만, 어쨌든 전혀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 보도 내용을 보다 보면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최근 우리 대중가요판에는 이처럼 무늬만 가수라는 비아냥 섞인 소리를 듣는 초단위 가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가창력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제가 말한 '호의적인 해석'에 따른다면, 한 팀 안에서 노래를 잘 하는 멤버에게 그냥 무임승차하는 이상한 멤버들이 있다는 식으로 논리를 끌어 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보도는 내내 '혼자 부르는 시간이 초 단위이기 때문에 그룹 전체가 문제'이고 '이런 그룹의 창궐이 가요계의 문제'라고 몰고 가고 있습니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지금껏 나온 어떤 그룹에도 에이스에 가까운 멤버들이 있고, 그 멤버에게 가창 시간이 집중되어 왔다는 걸 모르는 것인지, 외면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슈프림스의 노래를 틀어 놓고 과연 다이애나 로스에 비해 다른 두 멤버들의 솔로 시간이 얼마나 긴지를 잘라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노래 시간이 짧으면 가수가 아니라는 생각은 어느 시대의 발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보도 하나로 메인 보컬 한 사람의 비중이 거의 2/3를 차지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은 가수로서의 자격이 없는 그룹이 되어 버린 거죠.

네. 오케스트라에서 40분 내내 졸다가 1분 둥둥둥 두드리고 나오는 팀파니 주자는 연주자도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논리의 혼란이 오자 아예 '댄스 그룹이 문제'라는 쪽으로 논리가 전개됩니다.

◀ANC▶
그런데 이런 가수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요?
◀ 기 자 ▶
팬들의 쏠림현상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리고 수익을 위해서 그 조류에 영합해야 하는 가요계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화면을 보면서 짚어보겠습니다.
우리 대중가요시장을 주도하고 있는건 10대와 20대 젊은 팬들입니다. 방송도 이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습니다.
기획사들은 젊은층의 기호에 맞출 수밖에 없고 그 해답을 아이돌 댄스그룹에서 찾았습니다.
자연히 노래실력 보다는 외모와 춤실력 거기다 개인기까지 지닌 이른바 엔터테이너가 각광받게 됐는데요
여기에 설 자리를 잃은 음반시장으로 수익구조를 다변화해야하는 기획사들의 현실적인 이해가 더해져 노래실력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됐다는 분석입니다.


물론 아이들 그룹이 국내에 처음 생겨나던 1996년 언저리였다면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만 해도 '붕어'라는 놀림에 맞대응할만한 그룹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2004년 데뷔한 동방신기는 처음부터 아카펠라를 시도하며 '누가 아이들 그룹이 노래를 못한대?'라며 정면으로 치고 나옵니다.

그 이후, H.O.T와 핑클을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세대들은 노래와 춤 면에서 전 세대에 비해 획기적인 기량의 발달을 보이죠. 다른 기량을 다 잘라 버리고 '노래 실력'만 놓고 보더라도 그 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이들이 데뷔하기 전까지 수년간 받은 엘리트 훈련을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얘기입니다.

사실 너무 허점이 많은 논리라서 무엇부터 공격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보도는 뒤로 가면서 '노래 실력=가수의 가치'라는 해괴하고도 1차원적인 논리에만 기대고 있습니다.

일찌기 70년대 포크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당대의 국민가수 송창식 선생은 지난해 연말에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요즘 그룹이라고 나오는 친구들을 우습게 보면 큰일나지. 옛날 가수들하고 비하면 실력이 월등해. 기본적으로 연습을 많이 하잖아. 물론 혼 같은게 실린 노래가 별로 없다는 건 좀 아쉽지."

그러니까 '노래 실력'이라는 기준도 분명 의심스럽습니다. 매끈한 음색과 엄청난 폐활량, 폭발적인 가창력 등으로 평가한다면 라이브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김장훈이나, 가끔씩 '노래 솜씨'를 보여주는 유희열은 가수라는 명패를 달 자격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뉴스데스크의 논리로 따지자면 밥 딜런은 정말 쓰레기일수도 있겠죠.




어쨌든 댄스 장르의 창궐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발달하는 걸 가로막고 음악 시장을 왜곡시킨다는 논리는 하도 많이 들어서 귀가 닳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 보도에서도 지적하듯, 한국 가요 시장이 10대 20대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도 맞지만 어느 나라나 대중 음악 시장은 10대나 20대가 주요 고객이고, 어느 나라나 10대나 20대가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문제는 10대나 20대가 아이들을 좋아하는게 아니라, 30대나 40대가 음악 시장에 전혀 기여하지 않고 있다는 거란 사실을 제발 좀 직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뻔한 얘기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10여년 전 10대 시절에 아이들 그룹을 좋아하셨던 분들, 이제는 한참 어른이 된 강타나 바다, 옥주현의 음악을 돈 내고 소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뉴스 만드는 분들, 기사 쓰는 분들, 음악 시장의 장르가 다양화되는 게 좋은 일이란 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댄스 음악이 잘 되기 때문에 다른 장르가 죽는다고는 하지 맙시다. 그건 그나마 아이들 그룹 덕에 먹고 사는 가요 시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얘깁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스포츠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프로 야구만 좋아하고, 다른 프로 스포츠를 외면한다면 '프로 스포츠의 균형 발전'을 저해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프로 야구가 한국 프로 스포츠를 교란하고 있다고, 그게 문제라고 보도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올림픽 종목도 아닌 '저질 스포츠'를 좋아한다고 야구 팬들을 매도해도 좋겠습니까? (선수 열한명이 쉬지 않고 90분 내내 뛰어다니는 축구에 비해)타자 한명이 때리는 시간이 전체 경기 시간의 1/9이 안 된다고 야구를 저질 스포츠라고 주장하면 어떨까요? 올림픽 전략 종목인 핸드볼이나 필드하키 경기장의 객석이 비는게 과연 야구 팬들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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