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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연예인들의 무식함'이 소재로 동원되곤 합니다. 일찌기 '무한도전'에서 여섯 멤버들은 지식, 체력, 순발력 등에서 대한민국 최저 수준임을 표방(물론 재력에서는 절대 아니지만^^)해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1박2일' 역시 마찬가지. 수시로 등장하는 퀴즈 코너를 통해 멤버들의 지적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했죠.

물론 실제로 연예인이 무식하냐, 아니면 방송용 연출이냐를 떠나 이런 설정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한국 시청자들의 구미에 맞았던 듯 합니다. TV에 나와 수억원을 버는 연예인들이, 어린 시청자들조차도 '뭐야, 저런건 나도 아는 건데'라고 말할 만한 문제를 틀릴 때, 사람들은 묘한 우월감과 함께 쾌감을 느끼는 듯 합니다.

사실 연예인 개개인에게도 이런 '캐릭터 구축'은 매우 유효합니다. 잘생기고 고교시절 전교 회장까지 했다는 이승기가 어설프게 문제를 틀릴 때, 그렇게 해서 생긴 '허당' 이미지는 너무 모든걸 다 갖춰 자칫 얄미울 수도 있는 이승기를 국민 남동생으로 키워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JTBC의 금요일 새 예능, '아이돌 시사회'는 이런 기존의 프로그램들과는 좀 다릅니다. 사실 그동안 TV에 나오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머리 빈' 캐릭터를 통해 시청자들과 친숙함을 쌓아 왔다고 할 수 있죠(지금은 여신들이 되어 있는 소녀시대도 데뷔초에는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해 엄청난 오답을 대고 '어 왜 답이 아니에요?' 라며 배실배실 웃고 있었습니다). 방송가에선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시청자는 자신들보다 똑똑하게 보이는 연예인에게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돌이 나오는 시사 퀴즈쇼'를 표방하는 '아이돌 시사회'는 아이돌 멤버들이 기를 쓰고 서로 정답을 맞추기 위해 나서는 프로그램입니다. 예능인들이다 보니 '방송 분량'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보니 한번 경쟁심에 불이 붙으면 무섭게 달려드는 것 역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특징이죠.

(물론 호승심이 바로 실력으로 이어지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재미있는 겁니다. 의욕만 앞서고 실력은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 정말 폭소를 자아내는 아귀다툼이 벌어집니다.)


사실 - 제가 내부자이다 보니 - 이 프로그램의 컨셉트를 들었을 때 머리에 떠오르는 MC는 딱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작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역시 그 MC를 기용하더군요.

바로 김구라입니다.


지상파 데뷔 초기, '면죄부' 문제로 논란이 일었던 김구라는 거친 막말 진행으로 한동안 비판 여론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그 공격성을 적절히 조절하는 방법을 익혀 나가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실 그냥 거칠기만 했다면 김구라 스타일은 애시당초 지상파에서 퇴출됐을 겁니다. 하지만 김구라의 공격성에는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시원하다'고 표현할 요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나 같으면 저기서 당연히 저런 걸 물어 볼텐데' 라든가 출연자가 좀 심하게 가식적이거나 상투적인 대답을 할 때 '또 저딴 소리야?'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죠. 이런 경우 시청자의 마음속에 떠오른 저런 생각을, 아주 적나라하게 던져 주는 역할은 대개 김구라가 맡았습니다.

물론 김구라의 재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건 면박을 줄 때입니다. 예를 들어, (시스타 효린이 '눈치없이' 나오자 마자 문제를 맞췄을 때) "'붕어빵'에선 여덞살 짜리도 문제를 돌릴 줄 아는데, 이건 뭐 초짜들을 데리고 하려니..."  같은 멘트가 적재적소에서 터집니다.

이번 '아이돌 시사회'에서도 김구라는 아이돌 멤버들의 비위를 맞춘다든가, 방송을 품위있게 보이게 한다든가 하는 쪽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일단 한수 위의 지적 능력과 입심으로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쪽을 택했죠.

그런데 걸그룹 시스타를 비롯한 첫회 출연자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첫회 방송 내내 김구라는 '어라? 제법인걸?'하는 표정을 더 자주 짓게 됐습니다. (물론 원래 웃기는 것이 직업인 김태현, 김영철이나 아예 '백지 캐릭터'로 방향을 굳힌 해금이는 제외...)

사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과연 아이돌은 박원순 시장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만약 모른다면 '어른들'은 혀를 찰 일이죠. 그런데 아이돌 멤버들의 눈에는 박원순 시장과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비슷한 사례 하나. '배우 리처드 기어의 얼굴을 맞히라'는 문제인데, 일단 '리처드 기어'라는 배우의 이름에 출연자들은 당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아니 어떻게 리처드 기어를 몰라?'하고 혀를 차실 겁니다. 하지만 충분히 모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저 자신부터 '아니 어떻게 리처드 기어를 모르지?'라는 생각이 들어 저희 부서의 신입사원 후배를 불렀습니다. 참고로 1986년생, 서울대 졸업반입니다.

나: 너 혹시 앤서니 퀸이라는 배우 아냐?
그: 아뇨, 모르겠는데요.
나: 안소니 퀸이라고 하면 아냐? 혹시 그런 배우가 있다는 건 아니?
그: ...전혀 들어본 적 없는데요.
나: 그럼 혹시 아랑 드롱은 아니?
그: ....아뇨.

이런 상황이라면, 1990년대생 아이돌 멤버들이 리처드 기어를 모른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닌 듯 합니다. 뭐 직접 관련은 없을 수도 있지만, 1980년대 초반생인 다른 후배와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나: (신작과 고전 영화에 대해 대화 도중)...그래도 고전 영화들은 다시 보면 재미있지 않냐?
후: (무시하지 말라는듯) 저도 옛날 영화 좋아해요.
나: 전혀 안 그런 것 같은데?
후: 아녜요. 저 요새도 옛날 영화 TV에 나오면 계속 보고 그래요.
나: 그래? 그런데 네가 말하는 옛날 영화 중에서 '제일 오래된 옛날 영화'는 뭐냐?
후: (당당하게) 백투더퓨처요.

참고로 '백 투 더 퓨처' 1편은 1985년작입니다. 뭐 저 후배들에게 공감하실 분들이 당연히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뭐 그렇다는 얘깁니다.


사실 이날 방송을 통해 시스타의 다솜에 대해 다시 보게 됐습니다. 예쁘고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날 성적으로 봐선 대단히 지적이고 또렷한 면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어디 가서 '아이돌 계의 브레인'으로 대접받을 만 하다는 느낌입니다. (네. 다솜은 박원순 시장도 알고, 공지영 작가도 알았습니다.)

아무튼 이런 재주있는 아이돌들과 김구라가 만났을 때,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신생 채널의 신생 프로그램이라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좀 더 입소문을 타고 나면 저희 채널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로 자리잡을 듯 합니다.

첫회를 못 보신 분은 이쪽 다시 보기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공짭니다.
http://home.jtbc.co.kr/Vod/Vod.aspx?prog_id=PR10010019&menu_id=PM10010033


(이날 가장 웃겼던, 김영철이 분노했던 장면.) 개그맨 김영철과도 한참 세대차가 나는 아이들. 김영철과 심현섭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이 프로그램이 세대간의 다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부모님과 자녀들이 '야, 니들은 정말 저런 것도 몰라?' '아빠는 그럼 %%% 알아요?' 하는 대화를 나누며 격차를 좁힐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군요.


P.S. 본방은 금요일 밤이지만 일요일 오후 1시10분에 재방송도 한다는군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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