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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스파이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를 '첩보물'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하지만 그 안에서도 '누가 배신자인가' 혹은 '누가 진짜 스파이인가'를 찾는 이야기는 그 안에서도 별도의 장르로 분류될 정도로 인기 높은 소재입니다. 조직 내에 잠입해 우리편을 가장하고 있는 첩자를 영어로 두더지(mole)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장르를 두더지사냥(molehunt)라고 흔히 부르죠. 영화의 제목이 <헌트>인 것 역시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영화가 케빈 코스트너의 <노 웨이 아웃>같은 거라면 당신은 옛날 사람... 네? <무간도>요? ;;)

<헌트>는 이 장르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이면서 탁월한 독자성을 갖춘 작품이고, 감히 말하자면, 한국 영화계가 이 장르에서 지금껏 만들어 낸 영화들 중 최고작으로 꼽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제를 다룬 한국 영화에서 평균적으로 등장해 온, 너무나 밋밋하고 평면적인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불만이었던 관객이라면 <헌트>를 통해 그 갈증을 씻어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캐릭터가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으로 보입니다. 

겉으로는 수트를 차려 입었지만 속은 일상처럼 서로 죽고 죽이던 칼잡이들 그대로인, 무사들의 시대를 <헌트>는 실감나고 설득력있게 그려냅니다. 

영화는 전두환 정권의 집권 3년차인 198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웅평 귀순, 소련 전투기에 의한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 그리고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등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져나온 파란만장한 그 해입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 수호의 핵심이던 중앙정보부를 전두환 정권이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했지만 여전히 대외 첩보와 민간 사찰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던 시절이죠. 정권은 바뀌었지만 "당신들 누구야?" "남산에서 나왔다 이 새끼야!"는 그대로이던 그 때.

하지만 <헌트>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전두환, 노신영, 이웅평 같은 인물들의 실명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거나 아예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테러의 무대도 미얀마에서 태국으로 바꿔 버리고 사건의 내용도 '국가 원수 시해 음모'라는 핵심을 제외하면 실제 사건과 사실상 일치하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창작의 세계로 멀리 가 있죠.

아무튼 잠시 줄거리.

독재 정권 3년차의 안기부. 국내팀 담당 차장 정도(정우성)와 해외팀 담당 차장 평호(이정재)는 워싱턴에서 대통령 살해 음모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처리 과정에서 심하게 대립합니다. 서열상으로는 평호가 윗사람이지만, 과거를 생각하면 결코 편치 않은 사이.

특히 안기부 내부의 최고 기밀 정보들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조직 상부는 내부 첩자를 파악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이들 두 사람이 상대방을 견제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조사에 착수한 두 사람은 모두 상대방에게서 석연찮은 증거들을 발견해 냅니다. 

그렇게 해서 두 라이벌의 대결 속에서 '과연 누가 첩자일까'를 풀어가는 고전적인 구조.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시저> 후반부에서 그 전형을 만들어 놓은, 두 라이벌 사이의 치열한 치고 받고를 중심으로 한 플롯의 핵심은 결국 두 사람 사이의 기울지 않는 균형인데,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의 증언대로 이정재 감독의 솜씨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에서의 연출은 사실 배우로서의 연기와 따로 떼 놓고 생각하기가 힘들죠. 두 배우의 대결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화면 가득한 풀샷을 이겨내는, 잘 늙은(?) 두 남자의 투샷은 매우 아름답고 만족스럽습니다. 정우성 역시 농익은 연기가 그만입니다. 



이정재 감독은 시나리오 수정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들었는데, 그 완성도가 놀랍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두 남자는 그저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선을 그을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이란 면에서 감탄을 자아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도 한국의 1980년대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파악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흑과 백, 양 극단 사이에 두터운 회색 층이 있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북한이나 미국이라는 변수들까지 감안하면 계산은 매우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그 뒤, 3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의 관찰자들은 처음엔 흰색이나 희뿌연 회색으로 보였던 수많은 점들이 당시에는 선명한 검은 색이었던 점들보다 더 검게 보이게 되곤 하는, 기묘한 변화를 목격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가 커버하고 있는 시대는 그런 시대였고, 오히려 주인공인 두 남자는 그런 시대에 나름의 신념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인지, 혹은 그 '배신'과 '충성' 사이의 어느 쪽이 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영화는 분명 흥미진진한 오락 영화지만,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무튼 누군가 <헌트>에 대해 '먹물들이 더 좋아할 영화'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는데, 제가 어쩔 수 없는 먹물 취향이라면 그것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당시의 정치 상황이나 복잡한 생각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적이면서 또 동지이기도 한 두 남자의 경쟁과 협력(?) 이야기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감히 커티스 핸슨의 <LA 컨피덴셜>에 비견할 만한 멋진 영화가 드디어 한국 영화사에도 등장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놓치지 말고 보시길. 

 

P.S.1. 올 여름,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했는데, 정작 최고의 캐스팅을 감춰둔 건 이 작품이었습니다. 유재명 주지훈 황정민 정경순 조우진 박성웅 등 어지간한 영화의 주연급 배우들이 거의 제대로 된 대사 한마디 없는 역으로 스쳐가듯 등장합니다. 감독님의 캐스팅 실력 실로 대단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베스트는 진짜 귀순용사같았던 그 분. 

P.S. 2. 저분의 귀순을 환영하기 위해 그해 4월 여의도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130만명이 몰렸다고 하는데, 그 130만명 중 한명이었다는 옛 기억이 문득.... (비가 부슬부슬 오던 그날, 10KM는 걸은 듯. 절대 자진해서 가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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