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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의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미리 몇 글자 써 놓고 가도 좋을 듯 하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하지만 막상 뭔가 글을 쓰려고 하는데도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멈춰 버리는 듯 하는 경험을 하게 되더군요.

1949년생. 내년이면 환갑.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중요한 다른 일정도 있었지만, 이 공연을 뒤로 미루고 할 만한 일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형님'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멋진 공연으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 주셨습니다.

아마도 앞으로의 제 인생에서 2008년은 '빌리 조엘의 공연을 본 해'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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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역사를 정리할 때 흔히 50년대는 엘비스 프레슬리, 60년대는 비틀즈, 70년대는 엘튼 존/ 빌리 조엘, 80년대는 마이클 잭슨의 시대로 정리하곤 합니다. 틀린 말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차트상으로 볼 때는 분명 참이 아닙니다. 엘튼 존이나 빌리 조엘은 나머지 세 아티스트에 비해 빌보드 싱글/앨범 차트 1위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빌리 조엘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한 앨범은 4장(52nd Street, Glass Houses, Storm Front, River of Dreams)이지만, 싱글 히트곡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곡은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Tell Her about It, We Didn't Start the Fire의 단 세 곡 뿐입니다. 어덜트 컨템퍼러리 차트는 내놓는 족족 석권했지만 전체 싱글 차트에서는 그렇게 위력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아티스트들 중 홀 앤 오츠 등과 비교해도 초라해지는 성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숫자들은 단기간에 압도적인 성적을 내지는 않았다는 것일 뿐, 20년간의 앨범 활동 기간을 통틀어 본 전체적인 앨범 판매량으로 따지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전미 음반산업협회(RIAA) 자료에 따르면, 빌리 조엘은 생애 통산 미국내 앨범 판매량에서 약 8천만장을 판 것으로 나타나 종합 6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약 6천만장으로 집계되는 마이클 잭슨(17위)보다 많습니다. 전 세계 판매량을 합치면 1억장을 훨씬 넘겠죠.

BEATLES, THE 170
BROOKS, GARTH 128
PRESLEY, ELVIS 118.5
LED ZEPPELIN 111.5
EAGLES 100
JOEL, BILLY 79.5
PINK FLOYD 74.5
STREISAND, BARBRA 71
JOHN, ELTON 70
AC/DC 69

(사실 가스 브룩스야 미국내 인기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개인적으로는 AC/DC의 경우가 정말 놀랍습니다. 저 정도로 많은 앨범을 팔았다니.)

역시 RIAA 집계에 따르면 단일 앨범으로도 빌리 조엘의 '베스트 1, 2집 합본(물론 맨 처음부터 합본으로 나왔습니다)'은 2100만장이 팔려 역대 미국 내 히트 앨범 6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9 EAGLES/THEIR GREATEST HITS 1971 - 1975 EAGLES ELEKTRA
27 THRILLER JACKSON, MICHAEL EPIC
23 LED ZEPPELIN IV LED ZEPPELIN ATLANTIC
23 THE WALL PINK FLOYD COLUMBIA
22 BACK IN BLACK AC/DC EPIC
21 GREATEST HITS VOLUME I & VOLUME II JOEL, BILLY COLU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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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빌리 조엘의 가치는 단기간의 1, 2위에 있는 게 아니라 두고 두고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 셀러 가수로서의 힘에 있다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혹자는 그의 성공을 가리켜 미국 라디오 방송사들이 록에 적응하지 못하는 성인 청취자들을 겨냥하고 의도적으로 그를 '키워낸'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뭐 그렇게 '키워내서' 이 정도의 스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1971년 데뷔해 1973년, 두번째 앨범에서 'Piano Man'을 내놨던 빌리 조엘은 1993년 "더 이상 새 앨범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클래식 연주자로서의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신곡을 내놓지 않았을 뿐, 공연을 통해서는 팬들과 계속 만났습니다. 1999년 12월31일의 밀레니엄 콘서트는 물론이고 총 24회에 걸친 엘튼 존과의 조인트 콘서트 '페이스 투 페이스(Face to face)'는 전 세계를 흥분시킵니다. 일본에서도 몇 차례 '페이스 투 페이스'의 공연이 있었는데, 대체 왜 한국에서는 이 공연이 유치되지 않는가에 분통을 터뜨린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어 2006년부터는 전미 순회 공연이 이뤄졌고, 잘하면 한국에도 올 수 있겠다고 기대를 부풀게 하던 즈음에 마침내 한국 공연 계획이 발표됐습니다. 날짜가 하필 11월이어서 실내(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로 들어가야 했지만, 조금만 빨랐다면 엘튼 존이 했던 잠실 종합운동장 메인 스타디움도 채울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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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일 오후 7시20분쯤 조엘 선생은 7명의 백밴드와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의 기본 멤버에다 퍼커션과 두 명의 브라스 주자가 있었습니다. 피아노는 - 당연히 포함.

공연을 보다 보면 이 백밴드의 활약에 감탄하게 됩니다. 한가지만 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색소폰 주자는 'Stranger'의 앞부분 휘파람 라이브를 맡기도 하고, 여성 퍼커션 주자는 백보컬을 겸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본 중에 가장 다재다능한 밴드가 아닐까 합니다.

이날의 공연 목록은 이랬습니다.

1. Angry Young Man
2. My Life
3. Honesty
4. Zanzibar
5. New York State of Mind

6. Allentown
7. Stranger
8. Just the Way You Are
9. Movin' Out
10. Innocent Man

11. Keeping the Faith
12. She's Always a Woman
13. Don't Ask Me Why
14. River of Dreams
15. Highway to Hell (AC/DC)

16. We Didn't Start the Fire
17.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18. Big Shot
19. You May Be Right

여기에 앵콜로 Only the Good Die Young 과 Piano Man까지 총 21곡. 숨가쁘게 흘러간 100분간이었습니다. 당연히 30년을 기다렸던 골수 팬들이 운집했을테니 첫곡부터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피아노 전주만 듣고도 함성을 울려댔으니 말입니다. 'Honesty'나 'Just the Way You Are'처럼 국내에서 인기 높은 곡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죠.

 
(15일 서울 공연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피아노 위의 생수병만 머그 잔으로 바꿔 놓으면 정말 구별을 못 할 지경이군요.^^)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River of Dreams에서 We Didn't Start the Fire까지 세 곡의 열광. River of Dreams에서는 앞으로 뛰쳐나온 관객들을 저지하려던 질서유지요원에게 빌리 조엘이 화를 내면서 잠시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있었고, 아무튼 그 열띤 분위기가 그대로 온 관객을 벌떡 일어서게 했습니다. 조엘이 기타리스트로 변신하고 스태프 중 하나(?)라는 거구의 호주 남자가 AC/DC의 Highway to Hell을 멋지게 불러 제끼는 깜짝 이벤트도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짜여진 각본대로 앵콜이 진행됐고, 누구나 알고 있었던 마지막 앵콜 곡인 Piano Man이 흘러나오면서, 대형 스크린에는 Piano Man의 가사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필 선생이 잠실벌을 노래방으로 만들듯, 조엘 선생은 체조경기장을 다시 한번 노래방으로 만든 순간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습니다.

묘하게도 그 순간은 '토요일 저녁 오후 9시(Nine O'clock on a Saturday)' 즈음이었고, 온 관객이 한 마음으로 Piano Man을 따라 불렀고, 가사가 Pretty Good Crowd for Saturday에 이르고 조엘이 슬쩍 관객들을 바라보자 센스 있는 관객들은 일제히 함성을 내질러 자축했습니다.

긴 노래도 어느덧 끝나 가고 있었을 때 조엘 선생은 반주를 끊고, 관객들에게 이날의 공연을 함께 마무리할 기회를 줬습니다.

Sing Us a Song, You're a Piano Man,

Sing Us a Song, Tonight.

We're All in the Mood for a Melody,

You've Got Us Feeling Alright.

마지막 네 소절이 관객들의 생 목소리로 울려퍼졌습니다. 다시 한번 목이 메어 옵니다. 이 노래를 듣기 위해, 그의 피아노와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위해 기다렸던 긴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까요.

 


p.s. 당연히 그렇지만 - 어느 곡 하나 버릴 게 없는 명곡들의 나열인데도 아쉬움은 남았습니다. 못 들은 명곡들,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And So It Goes'나 'Longest Time', 'I Go to Exterme', 'Lenningrad'나 'Goodnight Saigon' 같은 노래들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아, 물론 'Uptown Girl'은 기대도 안 했습니다만.

And So It Goes의 뮤직비디오는 퍼올 수가 없어서 King's Singers의 리메이크를 가져왔습니다. 이 버전도 훌륭하지만 빌리 조엘의 원곡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원곡은 http://kr.youtube.com/watch?v=eELB6NxrZ7A


I Go to Extreme을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부르는 80년대 조엘의 모습입니다.




p.s. 이제 인생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엘튼 존과 빌리 조엘이 내년 일본에서 페이스 투 페이스(F2F) 공연을 재개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죠.

두 명의 슈퍼 피아노 맨이 만나 벌이는 피아노와 노래의 혈투. 생각만 해도 흥분됩니다. 일본까지 오는 김에 한국에도 한번 들러 주길 바랄 뿐입니다. 아니면 휴가라도 내야겠죠?

1998년 도쿄에서 있었던 F2F 공연의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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