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좀 하다가/영화를 보다가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원작을 다시 보게 만드는.

송원섭 2022. 1. 16.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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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1)를 보고 나서 너무나 당연한 수순으로 1961년 판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극장에서는 몇몇 장면을 빼면 거의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고 나니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2. 아무래도 가장 큰 차이는 극의 핵심인 ‘1961, 뉴욕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백인과 푸에르토리코 출신 청소년들의 갈등에 대한 해석이다. ‘당시의 이 문제는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이슈였지만 지금 보기엔 60년 전의 과거다. 1961판에서 제트파는 샤크파에 비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월하다. 심지어 경찰도 노골적으로 제트파의 편을 든다. 그때는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2021년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제트파나 샤크파나 모두 곧 개발되어 없어질 지역(이미 영화 도입부에서 링컨 센터 건설을 위한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의 추방이 예정된 난민들이다. 2021판의 제트파에게 경찰은 노골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는데 너희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그렇지 못한 탓에 너희는 여기 살게 된 것"이라고 비웃는다.

이건 누가 봐도 21세기의 주제인 양극화와 젠트리피케이션의 시각이다. 개발은 부자들의 편의에 의해 이뤄지고, 그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너희의 형편이 나쁜 것은 다 쟤들 때문이라는 식으로 하층민들의 갈등을 부추긴다. 쟤들에는 때로 전라도 홍어가 들어가기도 하고 다문화, ‘멕시코 이민’, ‘예멘 난민이 들어가기도 한다. 극의 주제가 되는 갈등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가 더욱 강조된다.

3. 사실 흑인들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기는 했지만 미국이라는 이민자의 나라에서 인종, 혹은 민족간 차별은 미국을 건설한영국 식민지의 후손들, 즉 필그림 파더스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종집단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다. 영화로만 봐도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남북전쟁 시절까지도 같은 백인들끼리 먼저 온 쪽이 나중 온 쪽을 차별하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백인 중에서도 유럽 출신들 중 아일랜드나 이탈리아계 이민들에 대한 묘한 차별은 뿌리가 깊다. 1947년작인 그레고리 펙 주연 <신사협정 Gentleman's Agreement>을 보면 그 시절까지만 해도 유태인들이 미국 주류 사회에서 얼마나 배척받는 집단이었는지 참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세월이 흐르며 어느 정도 희석되어 과거의 유산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하지만 트럼프 시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자는 시도 덕분에 미국의 보통 사람들사이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못 사는 이웃들에 대한 편견이 여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리메이크는 스필버그의 오랜 꿈이었다고 하지만, 아마도 마음을 굳힌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싶다. 어느 시대나 외부로부터 유입된 인종 집단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것은 그 사회의 하층민들일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줄어드는 일자리의 경쟁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왜 안 그래도 없이 사는 힘든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게 만드나.” 이게 2021판의 핵심 메시지로 읽힌다.

아, 물론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러브 스토리라는 건 바닥에 깔고 하는 얘기다.

 

3. 스필버그는 대단한 용기를 낸 셈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작곡), 스티브 손드하임(작사), 제롬 로빈스(안무), 로버트 와이즈(감독)라는 불멸의 라인업이 만들어 낸 역사적인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은 제아무리 스필버그라고 해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어느 것이 더 리메이크하기 힘든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대답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을 듯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필버그는 원작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2021년판의 모든 캐릭터는 1961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소다 가게 주인인 중늙은이 닥이 여자로 바뀐 것 외에 주요 인물들은 모두 그대로. 아이스의 비중이 거의 사라지고 치노가 중요한 캐릭터가 되었지만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아울러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신들이 대폭 축소됐는데, 이건 이 관계가 궁금하면 1961년판을 참고하세요라고 해석하면 될 것 같다. 2021판은 누가 뭐래도 1961판의 연장선상에서 존재하고, 1961판에 대한 대단히 긴 프로모션 영상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원형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지? 궁금하면 1961판을 봐라는 식의.

물론 이런 시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특히 1961판을 전설로만 생각해온 세대에게 2021판은 새로운 해석이 아닌 독자적 텍스트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분들, 2021판을 오리지널로 접하게 된 분들의 생각이 매우 궁금하다. 그냥 지루한 옛날식 뮤지컬일 수도 있을테니.

4. 이런 젊은 세대를 포함해서 2021판에 대한 만족도는 누가 봐도 추억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같다.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2021판은 ‘Maria’, ‘Tonght’, ‘Somewhere’ 같은 클래식 넘버들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개인적으로 ‘Mambo’ 씬에서 울컥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극장이라는 게 있어 줘서 정말 고맙다는 생각도). 

아마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매우 중요한 국가 문화 유산인 미국 관객들에겐 그런 생생한 추억이 큰 힘을 발휘하겠지만, 그 밖의 나라 사람들에겐 매우 개인차가 클 수밖에 없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다른 영화들처럼 추천/비추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다.

볼 사람들은 이미 알아서 보러 가고 있을 것이고, 별로 당기지 않는 이들은 괜히 호평에 눈이 멀어 보러 갔다가 아 지루해하고 나올 수밖에 없을 듯. 그러니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당신은 이 영화가 당신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이미 알고 있다. 혹시 완성도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만듦새는 감히 누가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원작의 틀 안에서.

개인적으로 레이첼 지글러 캐스팅은 10,00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