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좀 하다가/책도 좀 보다가

개취로 뽑아본 2022년 10권의 책

송원섭 2022. 12. 2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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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연말이 되면 정리를 해보곤 합니다만... 매년 반복되는 생각은 '아 내년에는 책 좀 더 읽자'. 

물론 실용서 종류를 필요에 따라 보긴 하지만, 그래도 막상 지나고 나면 참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시간순으로 2022년의 첫 책인지도? 이미 올해가 저물 때가 되어 가다 보니 아직 안 읽은 분이 거의 없을 듯도 하지만, 혹시 아직 안 읽은 분들이 있다면 늦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살짝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한 여성 과학자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로 시작하다가 한 유명 어류학자의 성공담, 그리고.... 반전에 반전이 존재하는, 그러면서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놀라운 책.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2023년에는 반드시 읽어 보시길.

 

2.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본래 장편보다는 단편을 좋아하는 편. 프랑스의 <파리 마치>가 자신들의 잡지에 연재된 세계 유명 작가의 단편들 중 베스트를 추린 단편집. 이선 캐닌의 <궁전 도둑>과 제임스 설터의 <방콕>, 두 편만으로도 제값을 하는 책입니다. 물론 오래 전에 읽었지만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도 걸작. 누군가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두고 '불면증에 대한 가장 뛰어난 은유'라고 말했던 기억이 새삼.

이런 단편집은 시간 날 때마다 사탕 까 먹듯 한편씩 읽는 재미가 쏠쏠하죠.

 

3. 일본인 이야기 1, 2

한일전은 무조건 이겨야 하지만 '진짜 일본'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정말 적은 나라 한국. 자칭 일본 전문가는 넘쳐나지만 센고쿠 시대와 임진왜란 시대, 혹은 메이지 유신기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역시 대부분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에도 시대 일본이 엄격한 기독교 금지와 쇄국 정책 속에서도 난학의 전통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물을 꾸준히 가까이 하며 이미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것까지는 알지만, 거기서 좀 더 알고 싶으면 한국어로 된 좋은 문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같은 맥락에서 시라이 사토시의 <국체론>도 참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휴가 때 긴자나 오모테산도, 좀 더 나아가 지유가오카나 시모키타자와에서 쇼핑하는 것 이상으로 일본을 알고 싶은 분들이 읽으실 만한 책. 감동적입니다.

 

4. 고립의 시대

현대의 고독을 말한 사람은 많지만 그 고독을 이렇게 사회적/심리적/산업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분석한 책은 드뭅니다. 뭣보다 중요한 건 코로나가 끝난다 해서 사람들이 외롭지 않은 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외로움의 치유를 위해 사람들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혹은 그 해결을 위해선 어떤 일을 해야 할까...)에 대해 빛나는 인사이트를 주는 책. 거기다 나치, 트럼프, 아베의 성공을 설명해주는 외로움과 문명의 관계는 매우 설득력있습니다.

초반의 '뉴욕의 시간제 친구' 이야기부터 흡인력이 장난 아닙니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너무 폭이 넓다(너무 많은 것을 고독과 고립감으로 해석한다?) 정도인데 그건 각자 알아서 새겨 들으시길. 

 

5. 고양이에 대하여

어떤 주제에 대해 '정말 당신이 이 주제에 대해 뭘 알긴 알아?' 라는 식의 책을 매우 좋아하는 편입니다. 마찬가지로 애묘인들이 넘쳐 나는 시대. 과연 고양이 기르는 분들은 이런 것까지 알까.... 싶은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쨌든 고양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야생에 가까운 동물이라는 것(인류가 개를 길들인 기간이 고양이를 길들인 기간의 5~10배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아직 '애완' 보다는 '포획' 상태의 종이라는 것.... 등등. 필요에 의해서 읽은 책이지만 고양이를 키우시는 분이든, 아닌 분이든 매우 흥미로울겁니다.

 

6. 더 페이블

뭔가 우울하고 답답할 때를 위한 만화. 일본 전국구로 활약하던 살인청부업자에게 어느날 보스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오사카의 아는 야쿠자를 소개시켜 줄테니, 그 지역에서 당분간 숨 죽이고 살아라. 절대 티 내지 말고, 보통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야 한다." 반문이 허용되지 않는 절대 보스의 명령. 당연히 잘 수행하려고 하는데, 당연히 잘 안 되겠죠. 

문제는 한국에선 전자책으로밖에 발매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이 만화를 보기 위해서라면 전자책 정도는 살만 합니다.

 

7.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

이 작가의 전작 <모두 거짓말을 한다>를 읽고 대실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사이트라고 할 수도 없는 잡담으로 가득한 책. 그런데 그런 기대를 뺀 상태에서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으니 재미와 상상이 솔솔. '데이터 사이언스 어디까지 왔나'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현대인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물론 오락성도 매우 뛰어납니다.

한마디로 '아주 구라가 좋은' 책. 구라 속에서 쓸만한 이야기를 걸러낼 수 있는 사람에겐 참 유용한 책.

 

8. 감각의 미래

'아니 이런 책을 이제서야 보고...?' 라고 하셔도 할 수 없는, 이미 고전이 된 책. 소위 말하는 인지과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너무나 뛰어난 가이드. 흔히 우리가 오감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감각들을 뇌가 어떻게 처리하는가에서부터 그 각각의 감각을 현대 첨단 과학은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대체하고 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점검할 수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인간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세상(즉 메타버스 세계)에서 인간의 감각기관과 뇌의 '착각'은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각종 실험과 새로운 기술을 통해 설명하는 대목.

물론 이 책이 나온 뒤에도 놀라운 발전이 현재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겠지만, 역시 그건 각자 알아서 보충해 가시길. 제 수준에서는 이 정도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9. 폴리나

바스티엥 비베스. 우연히 그림 한 장을 보고 빨려들듯 읽게 된 책. 회색의 사회주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폴리나가 츤데레의 끝에 있는 발레 선생님을 만나고, 재능을 인정받고.... 그렇게 자기 인생의 춤을 추게 되는 이야기. 쓸쓸하지만 군데 군데 훈훈하고, 그 어떤 젊었던 날을 되새겨보게 하는 만화.

만화가 두 편이나 올해의 책으로 뽑힌 것은 그만치 '진지한 책'을 안 읽었다는 반증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 지금 저 표지에 나온 정도의 제한된 선으로,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인간의 감정을 빠짐 없이 표현해 내는 걸 보고 있으면 저절로 중얼거리게 됩니다. '비베스는 천재다'. 물론 이 책을 보고 나면 <염소의 맛>도, <내 눈 안의 너>도 읽게 됩니다. 당연히. 

 

10. 크래프톤 웨이

'아 얘가 그 쪽으로 가더니 이런 책을... ' 이런 생각 하시는 분들도 많을 듯. 사실 책을 선물받고 거의 1년 지나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읽을수록 흥미진진. '개발, 디자인, 마일스톤, KPI, MAU' 이런 이야기를 배제하고 보면 이 이야기는 하나의 현대 영웅서사더군요. 그런데 주인공은 2/3가 지난 다음에 등장하고, 책의 초반부에 대의를 위해 뭉친 군웅들의 운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 이건 스포일러라 차마 말할 수가). 소설적인 과장, 무협지적인 윤색 없는 담담한 서술이랄까. 

많은 이들은 역사가 그냥 숫자와 도표의 연결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남들의 성공담은 그냥 우상향의 그래프라고 생각해버리곤 하지만, 실제로 역사를 들여다 본 사람들은 어떤 위대한 업적도 우상향 직선으로 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걸 알려주는 좋은 책, 좋은 서술. 많은 면에서 공감하고 감동.

 

11. 위어드

많은 뛰어난 분들이 극찬하시기에 속으로 의아했던 책. 아니 고등교육을 받은 진보적인 서구 남성들이 인류 문명을 이끌고 있다는 게 대체 뭐가 신기한 일일까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책의 데이터 활용은 매우 놀랍습니다. 특히 한국에 대한 부분. 어떤 분야에서는 대단히 개인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정직성("당신이 유일한 증인인, 친한 친구의 범법 사실을 감춰주기 위해 당신은 위증을 할 수 있는가")에서는 최하위인 나라. 과연 이런 나라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이거다 싶은 답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아무튼 읽고 나면 뿌듯해집니다. 

 

12.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13세기 남송의 화가 이숭이 그린 <고루환희도(骷髏幻戱圖)>를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 상징성의 깊이에 감탄하게 됩니다. 해골은 작은 해골로 아이를 유혹합니다. 그 아이를 말리는 다른 아이는 누구며, 해골의 뒤에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러다 보면 과연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오래 전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잠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미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부박한 것인가 하는 것은 대략 2000년 전에 확인된 것인데,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걸까. 당신이 함부로 커피 한잔에, 소주 한잔에, 가벼운 실패 후에 '인생 뭐 있니'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 온당한 일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는 책.

고루환희도는 이렇게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