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좀 하다가/영화를 보다가

서울의 봄, 세상에 영웅이 있음을 보여준 영화

송원섭 2023. 11. 2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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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꽤 오래 전, 육사 출신인 한 현역 장교와 대화를 나누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내가 다닐 때, 선배들 중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압도적인 다수가 김오랑 중령을 꼽았다. 최소한 육사 출신이라면 죽을 자리에서 그런 의기를 발휘하는 게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라며, 그래도 세상이 그리 무심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 중령으로 진급한 김오랑 소령은 12.12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부관으로, 사령관 체포에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영화 <서울의 봄> 속 정해인.) 

김오랑 중령

 

2. <서울의 봄>은 영화적으로 더없이 훌륭한 영화지만, 영화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다 제쳐 놓고, 한국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차음부터 끝날때까지 쫄깃한 긴장 속에서 스크린에 집중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김성수 감독은 <아수라>에 이어 한단계 더 올라선 모습으로, 지난 2년간 한국 영화계에 일었던 노장 감독 무용론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특히 숨막히는 편집은 정말.... (대체 얼마나 많은 장면들이 사라졌을지 궁금하다^^)


영화는 약간의 과장과 미화는 있지만 1979년 12월12일을 충실히 재현한다. 5.16 당시 전두환이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벌인 쿠데타 지지 가두행진 이후, 자칭 하나회 일당은 박정희의 비호 아래 군부 내의 친위세력으로 각종 특혜를 받으며 육성됐다. 그러던 그들은 10.26으로 박정희가 죽자 위기감을 느끼고, 수사권을 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 수호를 위해 뭉쳤다. 워낙 눈에 띄게 행동하는 바람에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결국 이 견제에 대한 반응이 12.12였던 셈이다. 

3. 그 시절을 모르는 분들이 보시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은 이야기:

혹자는 정승화 총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 역시 박정희 집권기에 누릴 것 다 누린 군내 엘리트들이고, 만약 12.12가 없었다면 그 그룹이 권력을 계승했을테니 결과적으로 군부 집권 연장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12.12는 상명하복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군 내에서 하극상과 무력 남용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사건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부정할수 없다. 무엇보다 12.12를 통해 무력 사용에 자신감을 느낀 이들 집단이 5.18이라는 비극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도 저 집단에게 면죄부를 줄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뒷날 "전두환 그룹의 핵심 장군 중 하나가 12.12 이후 전두환을 대상으로 역 쿠데타를 하겠다며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영화 <헌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한마디로 이 집단은 의리조차도 없었다는 얘기다.

4. 12.12의 교훈 중 하나는 어떤 시스템도 사람을 넘을수 없다는 진리다. 서울 시내에 있는 수경사령관의 직할 병력은 청와대 경비병력인 30단과 33단인데, 만약 이 두 부대의 지휘관이 직속상관인 수경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면 수경사령관은 사실상 휘하 병력이 없는 셈이 된다. 이것이 바로 12.12의 핵심이다.

물론 이 시스템이 발동하지 않을 때의 안전 시스템으로 수경사령관은 유사시 서울 주변에 있는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등 4개 사단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유사시'에 이 시스템 또한 기능을 잃었다. 그 부대의 지휘관들이 '괜히 나서서 독박 쓰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무명인사가 아니었고, 각급 지휘관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인연으로 엮여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않으면 나중에 어느 편이 이기든 자기 몸 하나는 챙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시스템이 2중 3중으로 쳐져 있어도, 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시스템 수호의 의지가 없다면 소용 없는 일임을 보여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직할병력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모두 소수의 정예병력이 궁과 도성을 장악하면서 싱겁게 끝났다. 항상 병사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선 지휘관이야말로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5.16 때도 소장 박정희를 제외하고 실질적인 주역들은 모두 영관급 장교들이었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무력하게 체포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후임이자 12.12의 주역 중 하나인 정호용은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특전사 내에 사령관 경호를 최우선 임무로 하는 직할부대를 만들었다. 이것이 강철부대에 나오는 707 특임단의 시작이다.)

그렇게 막나가던 12.12 주체들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렸고,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함께 몰락했지만 한 행동에 비해 처벌이 무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다. 

 

5. 특히 한국사에서 12.12와 가장 비슷한 사건은 1453년의 계유정난이라고 생각한다.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키되 목적은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척결하고 국가 보위의 중책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고, 애당초 멈출 생각도 아니었다. 

난을 맞은 김종서와 병조판서 조극관은 시스템상으로는 전 조선의 군권을 쥐고 있었으나 수도 복판에서 고작 수백명의 반란군에 맞서 싸울 직할 병력은 단 한명도 확보하지 못했고, 그저 국왕의 칙명에 따라 누가 반란세력인지를 지명받으려는 시도밖에 하지 못했다. 도피에 나선 김종서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입궁'이었다.

물론 그 왕은 금세 수양의 수중에 들었고, 겁박 속에 안평과 김종서 황보인의 음모라는 수양의 주장에 동조했다. 하루 아침에 최고 권력자 김종서는 역적이 되었고, 참살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감히' 수양이 자신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종서는, 체포시에도 수양의 수하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채 "걷기 힘드니 가마를 가져오라"고 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방심이란 무엇인가.

6.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20중 바리케이트는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지만(급조된 100여명의  '장태완 부대'는 실제로는 출동하지 못했다) 영화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참모총장을 무단으로 구금하고 대통령 추인을 얻은 패거리들이 이틀 뒤 자신들만의 축하 잔치를 벌이는 광경(전두환-황정민은 유명한 <떠나가는 전삿갓>을 부른다)은 이 영화의 본질이 느와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복 대신 군복을 입었을 뿐, 범죄조직이나 다를게 뭐냐는 시각이 선명하다.

영화 속 수십명 장성들의 모습은 배우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찌질함을 연기하는 바람에 더욱 큰 분노를 일으켰다. 육본 벙커에서 벌어지는 몇몇 장면들은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당시 육본에 모인 장성들, 그리고 30단에 있던 반란군 수뇌부의 행동거지는 모두 당시 현장에서 봤다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노재현 국방장관 역을 연기한 어떤 배우는 정말....

7. 정우성은 인생 캐릭터의 호연. 어떤 배우라도 맡고 싶어 했을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다.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영웅에 대한 영화다. 타협과 보상의 유혹에 맞서 원칙을 고수하려 한 사람. 따뜻한 바지락 된장찌개를 먹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불의를 그냥 두고 볼수 없었던 사람. 그런 영웅이 세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과거 TV 드라마를 통해 김동현과 김기현 배우도 장태완 장군 역으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이제 이 다음 세대는 정우성을 통해 그 모습을 기억하게 되겠지. 

P.S. 깜짝 웃음 포인트도 여러 군데. 국방장관의 "나 많이 찾았니?", 노태우의 "믿어주세요", 그리고 전두환 부인 역 배우의 외모가 공개되는 순간.

그리고 저 포스터 중간의  Everything Changed that night 은 혹시 That night changed everything 이라고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