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좀 하다가/드라마를 보다가
오징어게임이 처음 터졌을 때
송원섭
2023. 12. 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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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오징어게임>이 처음 나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 썼던 글입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읽어봤는데 별로 틀린 말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그때 온갖 호들갑이 쏟아져 나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 나올 때 썼던 글이라 생각하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아무튼 그 뒤로 K-콘텐트의 물결이 세계를 휩쓰는 걸 보게 된 지금, 다시 읽어볼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 1970년대 초 쯤이라고 치자. 서양인 서넛이 아시아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다 길을 잃어 인적이 드문 변두리로 빠졌다. 어두컴컴해서 겁도 슬슬 나고 배도 고픈데 저 앞에 영자로 된 레스토랑 간판이 보인다.
그런데 기대 이상이다. 잘 닦아진 커틀러리 하며, 리모주 자기 그릇들이 예사롭지 않더니, 거북이 알 수프에서 브랜디에 담근 메추라기, 농어 구이까지 제대로 된 프렌치 정찬 코스가 나오는 거다. 다들 놀라는 가운데 어디서 좀 먹어봤다는 친구가 말한다.
“수프와 메인은 좋았어. 하지만 제빵기술은 아직 부족해. 치즈도 두가지밖에 나오지 않고, 이렇게 쿰쿰하지 않은 까망베르는 어린이용이지. 뭣보다 와인리스트는 손을 봐야 할 거 같아.”
그러자 다른 친구 하나가 말한다.
“무슨 소리야. 뉴욕이나 파리에서 이 가격에 이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으면 우리는 내일부터는 이 식당에 다시는 예약을 못 하게 될거야. 그리고 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이 음식이 어떻게 나온 건지나 알아? 이 도시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아? 여기가 홍콩이나 도쿄라도 되는 줄 알아?”
2. <오징어게임>에 대해 입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요즘. 굉장히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모두 <오징어게임>에 열광하는데 왜 한국 사람들만 여기저기서 재미없다, 잘 못 만들었다 말이 많은 건가요?”
한때는 <기생충>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을 매국노로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일 기세더니(물론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살려주세요), 이젠 <오징어게임>이다. 세계인이 열광하는 콘텐트에 토를 다는 행위는 마치 여동생이 선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얘 눈이랑 코랑 다 성형한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분들이 적지 않다.
올림픽 금메달에서 ‘전 세계 넷플릭스 1위’까지, 국위선양, 환호, 좋다. 다만 해외에서 <오징어 게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일단 이 콘텐트가 너무 짧은 시간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고, 이방인 평자들은 이 콘텐트를 ‘어떻게 보아야 할 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붐은 여기저기서 징후가 보인지 오래지만 이렇게 큰 화제가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직은 신기하고 낯설다는 뜻이다. 좀 익숙해졌다 싶은 순간, 드디어 외국에서도 ‘비평’이 시작되고 있다. 알리 캐릭터가 엉클톰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부터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많지만, 이런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3. 가장 답답한 것은 ‘<오징어게임>의 분석을 통해 K-콘텐트의 성공 원인을 분석’ 하려는 시도다. 이건 전봉준이나 나폴레옹의 캐릭터 분석을 통해 동학혁명의 실패 원인이나 19세기 초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 원인을 파악하려는 시도와 비슷해 보인다.
개인적인 의견: K-드라마는 이미 충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상품을 내놓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대대적인 노출의 기회, 즉 쇼윈도의 존재였다. 이 경쟁력의 배경에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비해 매우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어 온 창작의 자유가 있었다. 일부 제한된 분야, 즉 섹스와 폭력에 대해서는 상당 수준의 금기가 작용했지만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그런 제약을 일시에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있으면 늘 하던 대로 천, 지 인으로 나눠 서술하고 싶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이 정도만.)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이라는 나라를 레스토랑에 비유하자면 현재의 K-콘텐트는 훌륭한 디저트다. 디저트만으로도 명성을 떨칠 수 있지만 메인디시까지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때가 진정한 성공의 시작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P.S. 그럼 앞으로는? 당연히 잘 되겠죠. 이웃 나라 중에 K-콘텐트를 온 국력을 다해 응원하고 있는 나라도 있는데, 당연히 잘 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건 <펜트하우스>가 넷플릭스에 올라가면 어떤 반응을 얻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