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상을 휩쓴 쇼군, 1980 vs 2024
에미상 18개 부문 수상. 디즈니 플러스 <쇼군>이 엄청난 기록으로 미국 TV 역사에 발자국을 남겼다. 쇼군 이야기는 지난번에 한번 쓴 적이 있지만, 사실 나오자마자 보지는 않았다. 이 드라마를 늦게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여주인공에게서 고전적인 일본 미인의 느낌을 받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쇼군, 미국이 만든 '할복하는 일본인'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누가 뭐래도 2024년 <쇼군>의 주인공인 애나 사와이는 전통적인 일본 미인상이라기 보다는 하와이-폴리네시안 얼굴로 보였다. 이런 얼굴이 마리코 역을 맡는다는 것은, 왕년의 마리코 역을 연기한 시마다 요코에 대한 모욕이라는 느낌이 살짝 들 정도라...
혹시 영상이 궁금하신 분은 이쪽
아무튼 앞의 글, <쇼군(2024)>에 대한 글에서 제임스 클라벨의 베스트셀러 소설 <쇼군>은 1975년에 출간됐고, 미국에서 1980년 NBC 5부작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져 히트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1980년 버전의 미니시리즈, 그러니까 내가 1981년 종로 피카디리 극장에서 극장판으로 본 그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도대체 나는 그때 그걸 왜 보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1980년 12월25일자 매일경제 지면에는 베스트셀러 집계 단신이 실렸다. 국내 소설로는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이 1위, 국외소설로는 제임스 클라벨의 <장군>이 1위였다. 클라벨의 <장군>, 즉 <쇼군>은 일단 미국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고, 일본으로 역수입되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물론 미국에서는 진작부터 이걸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명목상의 주인공인 파란 눈의 사무라이 안진 역에는 리처드 체임벌린이 캐스팅됐다. 체임벌린으로 말하자면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잘 나가던 TV 스타 중 하나라고 불러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쇼군>으로 골든 글로브 TV 부문 남우주연상을 꿰찼고, 3년 뒤, 한국에서도 많은 시청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가시나무새>를 통해 다시 한번 같은 상을 차지했다. 오죽하면 공식 별명이 '킹 오브 미니시리즈'다.
당시 미국 TV에서 가장 핫한 장르는 '미니시리즈'였다. <달라스>나 <다이내스티>로 잘 알려진 이 장르는 짧으면 4부작, 길면 10부작 정도의 길이로 영화 못잖은 제작비를 투입해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볼거리를 제공했다. <쇼군>이나 <가시나무새>은 물론이고, 그 시절 한국 시청자들의 기억에 생생할 대표적인 미니시리즈들로는 남북전쟁을 그린 <남과 북>, 파충류 외계인의 지구 공격과 레지스탕스의 활약을 그린 <V>, 닉 놀테-피터 슈트라우스 형제를 스타로 만든 <야망의 계절>, 시드니 셀든 원작의 <내일이 오면> 등이 있었다.
극장용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조금 모자라지만, 일반적인 TV 드라마 배우들보다는 지명도에서 앞서는 배우들이 딱 이 장르의 주인공 감이었다. 한국 TV의 드라마 장인들도 이 장르의 영향을 받아 1990년대부터 '미니시리즈'라는 이름의 드라마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한국에선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다 보니 16부작이 기본 틀이 되었다. 그래도 핫한 배우들이 나오고, 보다 젊은 시청층을 겨냥하고, 일반적인 드라마보다 훨씬 큰 제작비를 투입한다는 면에선 같은 맥락 위에 있었다.
아무튼 체임벌린은 이 영역에서 가장 빛났던 배우다. 그는 대형 스튜디오들이 억대 예산을 투입할 만한 배우는 아니었다. 할리우드 빅 스타들이 총출동한 대작 <타워링>에도 출연했지만, 그의 역할은 꼴사납게 구명대에서 떨어져 죽는 악당 사위 역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TV에서는 에미상 남우주연상 후보로 4차례나 노미네이트되는 거물 대접을 받았다. 그 시절엔 TV 배우(한국식 영어로는 '탤런트'?)와 영화 배우사이에 매우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영화 <타워링> 출연진을 한 자리에 모은 사진. 위 사진의 배우들 이름을 7명 이상 댈 수 있다면 1950~70년대 대중문화에 대해 뭔가 한마디 해도 좋은 사람으로 인정한다. 왼쪽부터 스티브 맥퀸, 로버트 와그너, 페이 더너웨이, 윌리엄 홀든, 제니퍼 존스, 프레드 아스테어, 폴 뉴먼, 리처드 체임벌린, 로버트 본, 그리고... O.J. 심슨. 모두 다 설명하려면 각각 한 문단씩은 충분히 채울만한, 당대/전세대의 슈퍼스타들이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영화 <솔로몬 왕의 보물>과 그 속편(무명 시절의 샤론 스톤이 나온다)을 매우 재미있게 봤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가 아라미스 역을 맡았던 <삼총사>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영화 커리어의 실패는 좀 안타깝다. (여담이지만 그 많은 그의 TV 미니시리즈 주연작들 중에는 뒷날 영화로 리메이크돼 대박을 친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도 있었다. 이 오리지널 시리즈도 매우 재미있었던 기억.) 만년엔 커밍아웃을 하고 이런 톱스타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성 정체성(!)을 꼭꼭 감춰야 했던 아픈 추억을 털어놔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사실 세계 영화계를 기준으로 하면 체임벌린보다 도라나가 역의 미후네 도시로가 훨씬 더 슈퍼스타였을 것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몬>,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등 칸 영화제를 휩쓴 걸작들 덕분인데, 이런 명성에서 한국은 분명 예외였다. 철저한 일본 영화/음악에 대한 금수 조치 때문에, 아마 <쇼군> 당시 국내에서 이런 영화들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유학생들 외엔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비디오 테이프도 구할 수 없던 시절이다).
한국 관객들이 그나마 미후네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진주만 기습을 다룬 <토라 토라 토라>나, 알란 들롱과 공연한 <레드 썬> 등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왕년의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영화광들이 아니라면, 굳이 '자막 붙은 영화'를 볼 이유가 없었던 미국의 일반 관객들에게는 그냥 마토(Mato)나 별 차이 없는, '영어 못하는 동양인 배우'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쇼군>은 미후네가 한국 팬들에게 처음으로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53년생인 시마다 요코는 이때까지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톱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본도 '할리우드의 주목'에는 열광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이었고, 시마다 요코는 체임벌린과 함께 골든 글로브 미니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 덕분에 일약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일본 TV는 <쇼군>을 수입 방송하면서, 매회 시마다 요코를 기용, 시청의 편의를 돕는 '해설'을 제작해 덧붙이기도 했다.
그 뒤로도 미모와 지성(?)으로 주목받은 요코였지만 사생활에서 유부남과의 관계, 알콜 중독으로 인한 파산,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한 누드 사진집 발간, 만년엔 58세의 나이로 성인용 비디오 출연 등 파란만장한 사건사고를 기록하며 69세로 삶을 마감했다. 비운의 스타라 할만 하다.
아무튼 이야기는 다시 한국으로. 당초 일본에서도 1980년 11월 극장판이 먼저 공개되었고, 한국에서도 상영될 수 있을까에 대해 관심이 쏟아졌던 느낌이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가당치 않은 얘기였다. 1962년, 한국 정부는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영화 <콰이강의 다리> 상영을 불허한 적이 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들을 상대로 가혹행위를 벌이는 이야기가 한국인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는 이유에서였는데, 당연히 지식인들이 "그게 말이 되느냐"는 집단 항의에 나섰고, 결국 이듬해 상영이 허락되기도 했다.
그만치 한국 사회에서 '왜색'이라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범죄였다. 한국 영화에 한국 배우들이 일본 의상을 입고 일본인으로 출연하는 것은 허용이 되었지만(물론 그래봐야 왜구 역이나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왜군 역 들, 혹은 개화기 조선에 들어와 여기저기서 폐를 끼치는 낭인들 정도), 미국 혹은 다른 나라 영화라도 일본적인 느낌이 나는 영화들은 아예 수입사들이 처음부터 시도를 안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그 수많은 닌자 영화, 사무라이 검술 영화들이 한국에서 전혀 공개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런데 <쇼군>의 경우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980년부터 미국에서 드라마로 방송된 <쇼군>이 엄청난 화제작이라는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더니 1981년에는 수입추진중이란 이야기가 돌았고, 개봉이 결정된 뒤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시마다 요코가 내한해 영화를 홍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요즘 같으면 상식적인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 길이 없다.
그리고 1981년 12월26일,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물론 저때에는 저걸 <쇼군>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당연히 <장군>이지.
솔직히 수입업자들의 촉으로는 당연히 수입해서 상영관에만 걸리면 대박이 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다음으로 이 영화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한국 관객들이었을테니 말이다. 소설 <쇼군>은 물론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지식인의 필독서'였던 시절. 게다가 전 중장년층의 80~90%가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일본어 회화 가능자들(즉 은근히 일본 문화에 대한 향수가 어딘가에 남아 있는 분들).
물론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그리 듣던 만큼 대단한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는 좀 심심하기도 했고(대규모 전투신 같은 것도 전혀 없었고, 내가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수준도 아니었다는 얘기다), 일본의 쇼군 이야기라더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디 가고, 들어본 적도 없는 도라나가가 주인공이냐는 의아함도 있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일본 역사나 문화를 깊이 있게 접해 볼 기회가 없었던 젊은 관객(나다)들에겐 대체 영화 속의 정치 상황이 어떤 것인지, 마리코가 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지 등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리코의 실제 모델은 아케치 다마 혹은 호소카와 카라샤 라고 불리던 인물.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이다. 호소카와가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대역죄인의 딸이라 마땅히 죽었어야 할 몸이지만 이미 출가외인이고, 호소카와 가문은 아케치에게 동조하지 않고 맞선 공이 있어 '멀리 유폐' 되는 선에서 끝났다.
아무튼 그래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기독교에 투신하고, 뒷날 호소카와 가문이 도쿠가와의 편에 서자 이시다 미츠나리가 가라샤를 인질로 잡기 위해 군대를 보냈는데, 이때 포로 되기를 거부하고 폭탄에 불을 붙여 장렬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쇼군>의 마리코와 상당 부분 행적이 일치한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실제 모델이 있었는지, 아케치 미쓰히데가 대체 누구인지, 남편과는 왜 사이가 나빠졌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봤으니 당최 이해를 하지 못했다.)
물론 재미있게 본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당시 청춘/틴에이저 영화로 유명했던 문여송 감독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감상문을 보면, 마침내 금기를 뚫고 극장에서 일본 문화를 접하게 된 감회가 넘쳐 흐른다.
'마리코는 분명 블랙슨의 침실에 침입했다. 그러나 뒷날 간밤에 침실에 침입했던 여자는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보낸 하녀였다고 시침떼는 장면은 모든 관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쇼군에서 느낀 것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내가 늘 갈구하던 영화 에로티시즘의 한 단면, 어떤 기교를 다시 한번 생각케 했다. (1982. 2. 4. 동아일보)'
그랬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장면은 2024년에도 그대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재현되었다. 아무튼 그때 그 <쇼군>이 부활해 에미상을 휩쓰는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참... 감회가 새롭다. 어쨌든 왕년의 <쇼군>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이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