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오사, 남신들의 성전을 박살내는 여신 이야기
<매드 맥스: 퓨리 로드>의 프리퀄 <퓨리오사>는 문명의 종말을 맞은 호주 대륙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경작이 가능한 땅, 녹색의 낙원에서 시작한다. 열살 남짓한 소녀 퓨리오사는 엄마(찰리 프레이저)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어느날 우연히 그곳을 발견한 디멘투스의 졸개들에게 납치된다.
녹색의 땅을 지키는 전사들, 부발리니 중 하나인 엄마는 퓨리오사를 구출하기 위해 추격에 나선다. 물론 딸도 딸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녹색의 낙원의 위치를 알게 된 졸개들을 해치워야 했다. 폭주족의 리더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는 과일이 열리는 땅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다. 이렇게 시작된 퓨리오사의 기구한 팔자가 어찌 어찌 진행되어 엄마와 떨어진 소녀가 시타델의 사령관 퓨리오사가 되었는지를 그려내는 영화.
주인공은 당연히 퓨리오사지만 그 밖에 눈에 띄는 여성 캐릭터는 거의 없다. 퓨리오사의 엄마와 엄마 친구를 빼면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은 정도.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매드 맥스: 퓨리 로드>에 이은 여성 중심의 서사라는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남성 캐릭터들은 최상위 서열의 지도자들에서 말단 전사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뇌라고는 없는, 지배욕와 파괴, 탐욕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들이다. 공생을 위한 의지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곧 현실이 될 것 같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지구에서 그나마 어떻게든 생명을 이어가려 노력하는건 여성들 뿐이다. 지식인의 흔적은 '히스토리언'이라는 존재로 남아 있긴 한데, 거세된 환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조지 밀러는 이 영화를 통해, 인류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순수한 폭력과 광기, 공포가 지배하는 세계를 미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아드레날린과 욕구불만으로 꽉 차 있는 올림푸스나 발할라 풍의 남신/영웅들을 조소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런 맥락에서 그 대표자인 디맨투스 역을 '토르' 크리스 헴스워스가 맡은 것은 너무나 적절한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헴스워스의 열연이 펼쳐진다.
(가스타운에 벽화로 그려진 워터하우스의 '물의 님프들' 또한 이 남신들이 주도해 온 신화 비꼬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퓨리오사>에 매우 만족하지만, 아쉽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잘난 전작 <퓨리 로드> 때문이다. 아냐 테일러 조이도 인상적인 열연을 펼치지만 그 역시 샤를리즈 테론의 그림자 안에 있다.
하지만 <퓨리 로드>만으로 알 수 없었던 주인공들의 동기들, 특히 녹색의 땅에 대한 퓨리오사의 열망과 좌절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는 매우 성공적인 프리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퓨리오사>가 없이 <퓨리 로드>만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퓨리오사>를 만들어 준 조지 밀러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시타델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의 두 축, 가스타운과 총알농장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고 무엇보다 두시간 반 내내 쏟아지는 광기어린(!) 폭력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퓨리 로드>에서 최강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빨간내복'이 나오지 않는 점은 아쉬우나, 시타델의 전투 트럭이 공중에서 공격하는 옥토보스의 부하들에 맞서 싸우는 전투 장면의 박진감은 결코 전편에 뒤지지 않는다.
이제 79세인 조지 밀러는 과연 얼마나 더 이런 괴물같은 영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imdb에 따르면 이미 여섯번째 매드 맥스 시리즈 제작에 들어간 것 같은데(톰 하디의 차기작 중에도 이 작품이 거론되고 있다), 문득 조지 밀러 버전의 트로이 전쟁 이야기나 <코난 더 바바리안> 같은 것이 보고 싶어졌다.
P.S. 과연 <퓨리오사>를 보고 나서 <퓨리 로드>를 다시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두편 다 안 봤다고? 서둘러라. 인생은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