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좀 하다가/영화를 보다가

세계의 주인, 주인이의 세계.

송원섭 2025. 12. 2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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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굉장히 비슷비슷한 영화평이 여기저기서 잇달아 올라오고 있다. '왜 좋은지 어떻게 설명을 하고 싶은데 설명을 하려들면 바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설명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세계의 주인>. 여고생 주인은 어린이집 원장인 엄마, 마술사를 꿈꾸는 초딩 남동생과 살고 있다. 태권도를 좋아하고, 봉사 모임에도 나가고, 남자친구와 키스도 좋아하는, 활기차고 씩씩한 주인. 어느날 같은 반 남학생 수호가 서명운동에 참여할 것을 부탁하는데, 주인은 정색을 하고 거절한다. 아니 충분히 찬성할만한 일인데 왜?
 
 
영화의 전반은 수수께끼를 내고, 후반은 그 수수께끼의 답을 준다. 의아했던 것들이 풀려 나가면서, 관객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게 하는 묘한 영화. 미스테리는 해결되고, 웃음이 화면 가득 차오르지만 당신은 영화를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악은 분명 존재한다. 악이란 너무나 알아보기 쉬워서, 마주하는 자가 유혹에만 넘어가지 않으면 피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는 물론이고, 실제 세상에도 악한 인간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만, 일단 악행이 저질러지고 나면, 어떤 식으로 단죄를 하든 '그 뒤의 삶'이라는 것은 고스란히 피해자에게 넘어온다.
 
 
그 악행의 흔적, 악행이 남긴 것은 지우개로 지우거나 욕실세제로 박박 닦아내릴수 있는게 아니다. 그럼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태양 아래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악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약한 자들을 보호할수 있을까. 한번 무너진 것은 어떻게 다시 일으킬수 있을까. 그리고 그 무너진 것을 다시 쌓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윤가은 감독은 답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재능 못지 않게 배우들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솜씨가 놀랍다. 영화 시작 후 30분이면 '음. 저 배우와 저 배우는 상당히 오버액션을 하네'라는 생각이 드는데, 1시간30분쯤 되면 그 오버액션도 연출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한국 영화에서 보기드물게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휘몰아치는 힘이 느껴지는 영화. 상영관이 적은게 안타까운데 어떻게든 찾아서 보시길 권한다. 내 마음이 얼마나 굳어 있나 볼수 있는 자가검진 세트로도 사용 가능.

 

P.S.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윤가은 감독의 영화 몇 편을 찾아 봤는데, '남동생'이라는 존재의 특이한 역할이 공통점으로 드러나는 걸 보았다. 윤 감독은 남동생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관계일지가 궁금했다. (지인을 통해 '남동생이 있다'는 것까지는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