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좀 하다가/영화를 보다가

어쩔수가 없다, 아마도. 이제는 정말로.

송원섭 2025. 12. 2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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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쩔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한편으론 웃기면서 한편으론 곤혹스러운’. 이것이 이 영화를 대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가 아닐까. 아마도 이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기억될 <고추잠자리>씬을 보면서 딱 그런 생각을 했다. 한편으론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은.
 
이 다크한 코미디가 얼마나 대중적일지가 솔직히 궁금하다.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을 묘수풀이로 즐기는 관객들에겐 대단히 만족스러운 영화일 듯. 참고로 사과나무도 나오고, 뱀도 나온다.
 
 
2. 벌써 10몇년 전의 일이다. 한 지인의 지인이 출판사를 냈다며 건네 준 책에는 이런 추천사가 적혀 있었다. ‘박찬욱: 내가 가장 영화로 만들고 싶은 원작’...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야, 역시 재미있었다.
 
 
3. 소설 제목은 엑스(AX). 해고된 중년 가장이 재취업을 시도한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하고, 주인공은 자신이 특화된 영역의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 나와 비슷한 경력자들을 제거하면 되겠네? 그래서 실업자 아저씨는 킬러로 급변신을...
 
 
4. 대략 이런 이야기. 당연히 원작과 똑같지는 않다. 제지회사 베테랑 엔지니어 유만수(이병헌)는 사랑하는 미인 아내(손예진)와 두 아이, 두마리의 개, 자기가 태어나 자란 숲속의 집(어려서 집안이 망해 쫓겨났다가 성인이 되어 되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식물들로 가득 찬 온실까지, ‘다 가졌다’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영화 도입부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이제부터 주인공이 나락으로 향한다는 이정표다.
 
 
5. <어쩔수가 없다>. 제목은 너무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 일해 혼자 먹고 살 수가 없다. 반드시 어떤 부분은 남에게 의지해야 한다. 남이 해주는 일은 어딘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한국에서 그 부분을 지적할 때 가장 많이 돌아오는 말 중 하나가 ‘어쩔수 없다’다.
 
사실 영화 앞부분에서 미국인 임원의 대사는 “Sorry, no other choice”였던 것 같은데,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어쩔수가 없다”는 아마도 “It is what it is”, 아니면 “That’s the way it goes. It was the best I could do”에 더 가깝지 않을까.
 
 

6. 그리고 구조는 노예들이 서로를 적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건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부터 유지해 온 스탠스가 아닌가. 그때도 송강호는 신하균에게 말했다. “사실 너 착한 놈인거 안다. 그러니까… 죽이는거 이해하지?” 이건 내가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이 구조가 너를 죽이는 거야. 그러니 나를 탓하지 말아줘. 나도 어쩔수가 없어. AI도 나오고, 이야기의 외피는 새롭지만 그 속살은 소설 원작이 나온 시절의 시각을 지나치게(?)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건 아닐지.
 
(물론 차이가 있다면, '그 시절'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선택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과 문명의 흐름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 버려서 누구도 '어쩔 수 없이' 이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어쩔수가 없다' 인지도.)
 
 
7.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가 <기생충>보다 늦게 만들어진 이상, 비교는 필연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디언 분장의 손예진은 아마도 관객에게 보내는 ‘인정할게. 자, 됐지?’의 사인일듯. 암튼 비슷한 문제에 대해 두 감독이 제출한 두 장의 답안지를 보는 느낌이다.
 
 
8. 전체 제작비에서 대체 출연료만 어느정도일까 싶게 캐스팅이 환상적이다. 차승원 이성민이 이 정도 비중의 역할로 출연하는 영화라니.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짧다. 이병헌의 능력을 굳이 얘기하는 건 이제 사족일 뿐이고, 궁금한 건 박찬욱 감독과 손예진의 조합이었는데, 결과는 감동적이었다.
 
 
9.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올드보이> 이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처음으로 ‘죄’만 있고 ‘벌’은 없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벌이 있다면... 레슨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엔딩의 이병헌 혼자 있는 장면은 혹시 박찬욱 감독이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이유는…)
 
 

10. 어쨌든 얼른들 가서 보세요. 보고 더 얘기합시다. 떡밥은 천지.

예를 들어 영재인 딸인 어딘가 AI를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악보를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표기하는 아이. 놀라운 재능이 있지만 인간 부모들과는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아이. 어딘가 미심쩍은 눈으로 인간 어른들을 보고 평가하고 있는 아이. 결국 그 '아이'와 어떻게 미래를.... (정말 돈이 많이 든다. 제대로 키우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