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좀 하다가/영화를 보다가

F1, 세상은 변했나, 변하지 않았나

송원섭 2025. 12. 2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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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F1의 사업권을 사들인 미국 회사 리버티 미디어는 의외로 F1이 미국에선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데 충격을 받고, 적극적인 마케팅 수단을 찾아나섰다.
 
 
그래서 2019년 시작된 기획이 넷플릭스 다큐 <본능의 질주 Drive to survive)>. 그 뒤로 시리즈도 승승장구, F1의 인기도 급상승. 코신스키도 영화 <F1> 제작에 <본능의 질주>가 미친 영향을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다. F1에서 보여줄 수 있는 카메라 앵글을 비롯해 거의 모든 비주얼 요소를 가이드로 보여준 셈인데, 어찌 보면 이런 면에선 영화 공짜로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레이서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은 참 많이도 나왔다. 할 얘기도 이미 다 했다. 남자의 고독, 질주 속에서 느끼는 실존감, 팀메이트간의 갈등, 특히 백전노장 드라이버와 신예 후배의 갈등, 차의 성능인가 드라이버의 실력인가, 의리와 명분... 주인공만 바뀐 똑같은 플롯의 영화들이 쌓여 있다. 물론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니까. 그리고 사실 영화라는게 원래 그런거 아닌가. 느와르는 안 그렇고, 로맨틱 코미디라고 크게 다른가.

스티브 맥퀸의 <르망(1970)>과 이브 몽탕의 <그랑프리(1966)>를 좋아한다. 두 캐릭터 모두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장 드라이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후배들과 경쟁하고, 달린다.
 
지금은 매우 식상한 얘기지만 이런 영화들에는 꼭 "대체 이렇게 목숨 내놓고 이걸 해야겠어요? 뭐때문에 시속 200마일로 달리는 미친 짓을 하죠?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떡해요?)" 라고 묻는 여성들이 나왔다. 그러면 노장들은 오만 폼을 잡고 말한다. "내겐 달리는게 전부야." 그렇다. 매우 유치하고 진부하지만, '달리는 것이 나의 존재 증명'이라는 그 시대의 과장된 진지함이 좋았다.

 

 
다행히도 코신스키의 <F1>에는 같은 질문을 던지는 여성 캐릭터가 없... 나오긴 한다. (웨이트리스가 비슷한 질문으로 브래드 피트에게 "돈은 중요치 않아요"라고 말할 기회를 준다.) 대신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그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기계를 만든다. 멋지지 않은가. 이것이 2025년이다.
 
사실 <F1>을 신나게 보고 나왔는데, 정작 <F1>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영화 자체가 그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F1의 규칙 같은건 나도 모른다. 아무튼 브래드 피트는 멋지고, 보고 있으면 저절로 응원하게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지만, 영화란 건 원래 이런 거였고, 이랬어야 했다.
 
P.S. 파트너 돈 심슨이 살아있던 시절, 다들 아시다시피 1990년 제리 브룩하이머는 레이싱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바로 톰 크루즈의 <폭풍의 질주>. <F1> 속편에선 톰형과 빵형이 '왕년의 라이벌'이었던 것으로 놓고 데이토나나 르망에서 '마지막 대결'을 위해 만나보는건 어떨까. <탑건 매버릭> 감독이기도 한 코신스키는 이미 이런 구상을 해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