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양 살다가 확

진정한 궁극의 빙수란?

송원섭 2010. 8. 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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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저는 찬 음식 마니아입니다. 냉면, 냉모밀, 막국수, 차가운 생맥주, 얼음 뜬 김치말이 국밥 같은 것들이 제가 열광하는 음식들입니다. 그리고 여름 한철로 모자라서 한겨울에도 이런 음식을 찾아 어슬렁대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올해 평소보다 훨씬 무더운 날씨와 정부의 에어컨 틀지마라 정책 때문에 더욱 각광받고 있는 것은 바로 빙수입니다. 뭐 그깟 빙수에 무슨 품질 차이가 있을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잘 만들어진 빙수와 그렇지 않은 빙수 사이에는 그냥 커피와 세글자 커피 사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지금부터 보셔야 할 겁니다.



서울 시내에서 꽤 유명한 빵집의 빙수입니다. 모양새는 그럴싸하지만 실속은 전혀 없습니다. 싸구려 통조림 팥과 연유, 딸리 젤리... 이런 모양의 빙수는 먹고 나면 싸구려 단맛이 입안을 텁텁하게 하고, 갈증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그 집에서 파는 빵과 빙수의 레벨 차이가 이렇게 현격하다는 데 놀랐습니다.

일단 좋은 빙수와 그냥 그런 빙수 사이의 가장 큰 벽은 얼음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삭빙이냐 쇄빙이냐의 차이죠. 여기에 대해서는 전에 써둔 글이 있습니다. 다시 뭐라고 주절주절 하느니 그걸 보시는게 제일 나을 듯 합니다.



제목: 빙수론(氷水論)


내 삶에 차가운 음식이 세가지 있으니 그것이 냉면이고, 빙수고, 차가운 맥주다.

일찌기 한방에 밝은 지인이 "당신 체질에는 찬 음식이 안 어울린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좋아하는 음식은 맨 찬 음식인 것을 어쩌랴. 항상 냉면집에 가면 사리를 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빙수 한 사발'의 유혹에 번번이 넘어가며, 무한정 마시는 주당은 아니지만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에는 그저 무릎을 꿇고 만다.

빙수의 마수에 처음 걸려든 것은 국민학교 2학년때쯤 된다. 집 바로 골목 건너에 반 가건물 형태의 떡볶이 집이 생겼다. 처음 생긴건 이른 봄이었던 것 같은데, 여름이 되자 그 집 벽에는 '팥빙수 개시'라는 벽보가 붙었다. 30원.

누나 손에 이끌려 빙수를 시켰다. 에펠탑 비스무레한 기계에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얼음이 얹혔고, 재봉틀처럼 큰 바퀴가 돌았다. 맘씨좋은(?) 아줌마는 한번 갈아서 수북히 쌓인 얼음을 손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한번 얼음을 갈아 얹었다. 그 위에 단팥이 세 술, 잘게 썬 젤리가 세 술, 서울우유 깡통에 담긴 연유가 휘휘 뿌려졌다. 아줌마는 빨간 병에 든 빨간 물을 찔끔, 녹색 병에 든 녹색 물을 찔끔 하더니 그릇에 숟갈 두개를 꽂아 내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기하게도 이 추억을 그대로 되살린 듯한 이미지가 있더군요. 사진 출처에 양해를 구해보려 했습니다만 저 사이트는 이미 없어졌길래 그냥 퍼 왔습니다.^)


오오.

오뎅을 처음 먹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온몸을 휩쓸었다. 입안 가득 퍼졌다 사라지는 이 냉엄하고도 달콤한 맛이라니.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팥알 몇개가 뜬 그릇 바닥을 아쉬움 가득한 숟가락으로 박박 긁고 있었다.

가정용 빙수기 따위는 나와 있지 않던 시절이라 나는 잔돈만 생기면 떡볶이집으로 달려갔다. 몇번인가 설사도 하고 배탈도 났지만, 감히 그것이 빙수 때문이라고는 의심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원래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었다. 내가 만약 건강한 편이었다면 빙수 같은 건 당장에 못 먹게 됐을 거다.

단골이 되다 보니 아줌마는 2단으로 담던 얼음을 3단으로(두번 꾹꾹 눌러서) 담아 주기도 했고, 가끔 "이렇게 빙수에 환장한 놈 첨 봤다. 원없이 먹어 봐라"라며 냉면 사발에 얼음을 갈아 특제 빙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실 처음엔 마법의 빨간 병과 녹색 병에 맛을 내는 비장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것 좀 많이 넣어 달라"는 말에 히죽 웃으며 "이거 많이 넣으면 써서 못 먹어"라고 못을 박았다. 알고 보니 그건 그냥 색소였다.

그 뒤로 근 30년 동안 빙수를 먹어 왔지만, 빙수는 뭐니 뭐니 해도 팥빙수가 제격이다. 대체 과일 빙수라는 음식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맨숭맨숭하고 밋밋한 것은 빙수라는 이름을 달기에 부끄러울 뿐이다.

제대로 된 빙수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잘 갈린 얼음이다. 어떤게 잘 갈린 얼음이냐고? '맛의 달인'을 보면 일본 화과자의 이상은 바로 감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빙수에 들어가는 얼음의 이상은 함박눈이다. 눈이 되기 직전의 상태로 곱게 갈린 얼음이 바로 빙수의 이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 지방에서 빙수를 부를 때 빙설(氷雪)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빙수의 원형에 충실한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위 패스트푸드 전문점에서 파는 빙수들은 저 먼 아랫길을 면치 못한다. 거칠대로 거친 빙질 때문이다. 패스투푸드점의 빙수기들은 얼음을 깎아 눈을 만드는 삭빙(削氷) 의 형태가 아니라, 얼음을 부숴 가루로 만드는 쇄빙(碎氷) 의 형태다. 이렇게 만든 빙수는 사시미에 비교하자면 언 고기를 그대로 썰어 회를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팥이 중요한 재료라 해도 얼음 반 팥 반인 상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요즘은 어느 집이나 공장에서 나온 빙수용 팥 잼을 쓰기 때문에 팥 맛의 차별성은 없어졌다. 예전에는 팥의 단 맛이 부족할 때 연유로 보강하곤 했지만 요즘은 그냥 우유를 넣는 것이 보통이다. 우유는 초반 얼음이 녹기 전, 윤활제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해낸다.

그러나 빙수가 발달하며 아이스커피가 최고의 윤활제로 각광받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빙수는 이렇다. 잡다한 과일 칵테일이며 콘 플레이크 등은 일단 뺀다. 잘 갈린 얼음에 팥을 올리고 그릇 가장자리를 따라 아무것도 넣지 않은 차가운 커피를 슬쩍슬쩍 붓는다. 팥 위에 아이스크림을 작게 얹고, 아이스크림 대신 우유나 연유를 조금 흘려 두는 것도 좋다. 그 밖에 과일 등을 얹는 것은 맛 보다는 색깔을 맞추기 위한 것이므로, 칵테일 통조림보다는 생과일이 좋다. 하지만 과일을 먹자는 것인지, 얼음을 먹자는 것인지 주객이 전도되면 곤란하다.

최근엔 녹차 빙수라는 것도 여기저기 있지만 사실상 녹차(혹은 녹차 아이스크림)가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가 빙수의 맛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커피와 얼음의 조화 때문에 커피 빙수라는 것도 등장했다. 그러나 팥이 들어간 상태에서 커피를 추가하는 것은 훌륭한 맛을 내지만, 오직 커피와 과일, 흑설탕 등속으로만 맛을 낸 것은 역시 맛의 불균형이 두드러져 별 매력이 없다. 아, 물론 예외도 있다.

최근 먹어본 한 커피 빙수는 얼음을 갈아 어찌어찌 한 것이 아니라, 아이스커피를 얼려 통 얼음을 만든 다음, 그걸 갈아서 빙수를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초코 시럽과 소프트 아이스크림(우유는 이미 아이스커피에 충분히 들어간 상태였다)을 얹은 빙수 맛은 제법 일품이라 부를 만 했다. 역시 맛의 길에는 정도가 없다. 大道無門! (끝)




어린 시절엔 누구나 이렇게 하늘에서 내린 눈을 먹어 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물론 중국에서 핵실험을 한다는 소문 뒤에는 절대 못 먹게 하시는 부모님들이 꽤 많아졌죠^^). 그 맛을 어떻게든 되살려 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노력이 바로 오늘날, 빙수라는 음식으로 나타나게 됐다는게 제 의견입니다.

수많은 패스트푸드점이나 군소 제과점 빙수가 신통치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팥도 팥이지만 얼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드드득거리며 얼음을 잘게 부수는 기계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양질의 눈 같은 삭빙을 사용하는 빙수전문점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유명한 현대백화점의 밀탑 계열이 모두 그렇고, 제가 요즘 최고로 치고 있는 C4의 빙수가 그렇죠. 그밖에도 유명 호텔 가운데에는 눈꽃같은 얼음을 쓰는 곳들이 꽤 많습니다.

기계도 아직 팔고 있더군요. 26만원인가 합니다. http://www.dxmall.co.kr/



왕년에 많이 보던 기곕니다.^^ 이 기계를 전동식으로 개조한 기계도 해외에서 검색됩니다. 의외로 싸더군요. 200달러대?



딱 정해진 이름은 없고, 미국에서도 그냥 snow ice machine, 혹은 ice shaving machine이라고 쓰이는 듯 합니다. 뭐 이름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하지만, 어쨌든 얼음을 곱게 갈아서 뭉친 눈 같은 얼음 디저트를 먹는 건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뭐 서양에선 이런게 보통이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팥과 우유, 얼음의 조화가 얼마나 환상적인지 이미 일찍부터 꿰뚫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일본 중 어느 쪽에서 팥빙수의 원형이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재 널리 퍼져 있는 건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과일빙수'라고 불리는 빙수 가운데 심지어 팥이 전혀 들어가지 않고, 과일과 얼음만 들어간 것도 있다는 사실이 매우 끔찍하게 여겨집니다. 대체 그런 것을 어떻게 빙수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설레설레)



상해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초대형 팥빙수입니다. 만든 공력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잘 모르지만 일본에서도 어쩐지 관서지역이 관동지역보다 빙수에 대한 열정이 훨씬 대단하다는 느낌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조형미까지 강조한 느낌의 빙수가 흔히 보입니다.




제가 요즘 사랑하는 C4(압구정 미성아파트 건너편)의 밀크티 빙수. 실날같은 얼음에 달달한 밀크티를 붓고, 팥은 따로 내 옵니다. 팥의 당도가 약한 반면 얼음에 가미된 밀크티+연유의 당도가 높아 균형이 맞춰집니다. 얼음이라기보다는 눈으로 뭉친 솜사탕 같은 맛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좀 수정이 필요합니다. C4는 2011년 이후 하향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릇도 작아졌고, 가격은 크게 올랐고, 만드는 공덕도 예전같지 않습니다. 빙질은 여전히 좋지만, 권할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최근에는 빙수의 변형 음료(?)들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소 거친 얼음을 우유, 팥과 함께 갈아 굵은 빨대로 빨아 마실 수 있게 한 레드 빈 슬러시 (레드 빈 프라푸치노라는 이름도 본 듯 합니다) 같은 경우는 빙수의 약점인 휴대성을 해결한 훌륭한 상품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맛의 세계에는 제한이나 고집이 있어선 안됩니다. 한번 최고의 맛집이었다고 해서 변화나 발전 없이 그대로만 머물러 있어선 곤란하겠죠. 빙수의 세계에서는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맛이 등장할지 기대됩니다.


P.S. 조선호텔 컴파스로즈의 빙수. 재료며 우유를 섞어 직접 얼린 듯한 얼음이며, 역시 직접 만든 팥이며 흠잡을 데 없는 명품이지만 재료에 비해 얼음의 양이 너무 적었다는게 약간의 아쉬움입니다. (참고로 저는 얼음만 리필해달라고 했습니다.^) 맛은 보장할만 하지만 가격은 후덜덜.^^

아예 삭빙기를 하나 사 버릴까 생각중입니다. 전동형도 300달러 이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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