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좀 하다가/영화를 보다가

21세기 첫 25년의 영화 25편 (1)

송원섭 2025. 12. 21. 02:24
728x90

뉴욕 타임즈가 21세기의 첫 쿼터를 맞이해 영화 100편을 꼽았다. 

물론 내 취향은 아니다. 나같으면 절대 꼽지 않았을 영화들이 대량으로 끼어 있다. 그냥 '21세기의 첫 100대 예술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리스트였다. 예술영화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그냥 직접 꼽아 봤다. 2025년이다 보니 그냥 숫자를 맞춰 25편을 뽑았다. 꼽아 놓고 보니 개중엔 좀 뭔가 있어 보이는 영화도 있고, 심각한 사람들이 보면 피식 웃을 영화들도 있는 것 같다. 그냥 취향의 기억을 위해 정리해 본다. 모든 작품의 기준은 논리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욕하실 분은 취향을 욕하시길.

생각해보니 인생 참 짧다. 과연 20세기의 두번째 쿼터에서 내가 이런 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까. 약간 회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20세기의 마지막 쿼터에 대한 25편의 영화도 한번 골라볼까 싶다. 그래도 리스트 두개는 남겨 봐야지.

21세기가 2000년에 시작하는지, 2001년에 시작하는지는 좀 애매한 것 같은데, 그래도 꽂아넣고 싶은 영화가 2000년 작품이라 여기에 넣었다. 그럼 시작한다. 순서는 연도순. 

화양연화 (왕가위, 2000)을 꼽으려고 했는데 2000년은 21세기가 아니란다. ㅠㅠ

그래서 다시.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 2001)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피터 잭슨, 2001)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2)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무간도2 (유위강/맥조휘, 2003)

 

킬빌 (퀜틴 타란티노, 2003)
올드보이 (박찬욱, 2003)
피아니스트의 전설 (주세페 토르나토레, 2004)
쿵푸허슬 (주성치, 2004)
타인의 삶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타짜 (최동훈, 2008)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빗 핀처, 2008)
아이언맨 (존 파브로, 2008)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그을린 사랑 (대니 들뇌브, 2010)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스가르 파라디, 2013)
킹스맨 (매튜 본, 2014)


매드맥스: 퓨리로드 (조지 밀러, 2015)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2025)

 

줄이고 줄이다 영 아쉬워서 두편은 깍두기로 추가한다.


와일드 테일즈 (다미안 시프론, 2014)
스틸 라이프/삼협호인 (가장가, 2006)

이상 긴 리스트 끝. 

제목만 열거하고 끝내려니 뭐라도 한마디씩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순서는 연도순. 순위 아님.

화양연화 (왕가위, 2000)

정말 인생 최고의 순간은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 내가 지금 최고의 순간에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는 알 수 있을까. 먼 훗날, 지나고 난 뒤 석상의 귀에 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 뿐이라면, 인생은 너무나 슬픈 것이 아닐까. '유려하다'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슬로모션,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만옥의 치파오,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몇몇 사람들과 반대로 과도하다 싶은 1인 샷들. 내용을 떠나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오래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그런데 사실 21세기는 2001년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어쩔수 없이 <화양연화>는 제외.

1.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 2001)

바즈 루어만이 그동안의 영화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쏟아부은, 그의 영화 세계 종합편. 인도 영화인들은 '인도 사람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발리우드 영화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것은 마치 '한국인이 제작하지 않은 K-POP'을 연상시킨다)'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고 한다. 모든 장면들이 현란하고 아름답지만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은 탱고와 어우러진 '록산' 신. 데이비드 셔젤이 <바빌론>으로 해보려 했던 것들을 이 영화는 모두 뛰어넘고 있다.


2.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피터 잭슨, 2001)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피터 잭슨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시기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할 듯. 물론 그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잘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스스로 이야기 속에 폭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그려낸 성과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명배우들이 열연했지만, 이 영화 시리즈에서 딱 한 장면만 뽑으라면 2편에 나오는 '로한의 봉화' 장면. 지금도 빅 스크린에서 이 장면을 보고 온 몸에 소름이 끼쳤던 순간이 생생하다.


3.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2)

지옥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신이 있다면 이런 도시를 세상에 남겨두어도 좋은 것일까. <시티 오브 갓>을 보면서,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 가치, 보람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 뒷날, 그가 <두 교황> 같은 영화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 강렬하고 또 강렬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오고 20여년, 세상은 점점 더 '신의 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도.


4.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우리는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슬픔과 상실과 분노를 자아내는 힘을 악이라고 부른다. 악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떠난 적이 없었고, 우리는 그것을 기를 쓰고 단죄하려 하지만,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일부이며, 우리는 잠시 그것을 잊으려 노력할 뿐이다. 그런 인간들의 이야기 중 <살인의 추억>은 단연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5. 무간도2 (유위강/맥조휘, 2003)

<대부>가 만들어 진 이후, 범죄집단과 그 가족을 그린 영화로 <대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품은 없다. <무간도2>는 1편에서 만들어진 인물의 구도(경찰에 잠입한 마피아와 마피아 속에 잠입한 경찰) 위에 <대부>의 가족 플롯을 덮어 씌운 탁월한 작품. 1편도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2편은 그 구도에 그리스 비극의 장중한 운명을 얹은 걸작이다. 물론 그 뒤에는 3편이라는 어이없는 작품이 있어 이 영화를 트릴로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역대 어떤 홍콩의 갱스터 무비보다 뛰어난 작품.


6. 킬빌 1,2 (퀜틴 타란티노, 2003)

자신이 보고 자란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타란티노의 핏빛 광시곡. 장난기조차도 엄숙하게 연출하는 이 작품을 과연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최고다.


7. 올드보이 (박찬욱, 2003)

박찬욱은 항상 죄와 벌을 말한다. 그런데 그 벌은 누가 내리는 것인가. 신이? 신을 대신해서 인간이? 아니면 그냥 인간이 인간의 판단으로? 어떻게 결정하든, 그 벌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궁금한 것. 과연 오대수의 뒤편에서 흔들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8. 피아니스트의 전설 (주세페 토르나토레, 2004)

<시네마 천국>을 앞세운 토르나토레의 20세기를 사랑했고, 크게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21세기에도 그는 놀라운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스타메이커>, <언노운 우먼>을 지나 <베스트 오퍼>와 <피아니스트의 전설>중 어느 것을 꼽을까 고심하다가 선정한 것이 <피아니스트의 전설>. 배에서 태어나 평생 모든 경험이 배 안에서 이뤄진 남자. 과연 그를 배에게 내리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단과 행동에 대한 위대한 영화.


9. 쿵푸허슬 (주성치, 2004)

주성치를 모르는 사람도 없었지만, 영화 좀 본다는 사람 중에 '주성치 영화를 보는 사람'을 비웃지 않는 이도 드물었다. 그러나 <소림축구>와 <쿵푸허슬> 이후에는 이 콧대높은 소위 영화 마니아들은 여래신장 맞은 두꺼비 꼴이 되었다. 순도 높은 주성치 스타일의 루저 주인공에서 깨알같은 전통 무협 장르 패러디까지 완벽한 선물같은 영화. 


10. 타인의 삶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모든 영화는 인간이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것은, 별다른 원칙 없이 '그저 열심히' 하던 사람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오는 순간. 동독 비밀경찰의 숨가뿐 기밀 업무 속에서, 하나의 '인간'이 눈을 뜨고,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폰 도너스마르크는 왜 좀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주지 않는 것일까. 이 영화를 보시고 꼭 <작가미상>을 보실 것.

 

11.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뱀파이어는 주인이 초대하지 않으면 그 집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규칙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기에 한국에서도 호랑이는 창귀의 부름에 대답하는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었으니, 이 비슷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 사람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괴물도 청순하고 여릴 수 있다는 뜻밖의 경험. 순백의 눈 위에 그려진 순수의 그림. 아름다운 영화.

12. 타짜 (최동훈, 2008)

허영만의 원작은 걸작이 분명했는데, 최동훈이 아니었다면 그 숨결을 이렇게 살려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소재는 도박이지만 분명 이것은 의리와 불의, 성장과 복수의 무협 극화. 검결을 외던 검객들이 그저 화툿장을 손에 쥐었을 뿐. 불행히도 속편들은 <타짜>의 맥을 제대로 잇지는 못했다. 이제 곧 20주년이 되면 시리즈 리부팅은 어떨지.